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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의 정치경제학: 서울과 삶, 서울의 삶

 

 

서울의 하루는 다른 곳의 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서울의 일 제곱킬로미터는 다른 곳의 일 제곱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옮겨 다녀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이다. 압축 성장이 서울을 특별한 도시로 만들었다면, 그 특별함은 다시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생각과 행동, 실천을 가지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해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서울의 장소들은 반드시 특정 공간일 필요도,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장소일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장소이자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장소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서울에 관한 책이지만 서울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 - 책날개 中(프롤로그 중 일부 확장변형)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는 국가 브랜드 슬로건으로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을 썼다. 역동적이고 너무도 빠른 나라, 수도 서울은 특히 더 그렇다. 다른 수도나 메트로폴리탄도 그렇지만,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사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토박이 자체도 적은데다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본적과 아버지의 연고를 기준으로 단 한번도 살지 않았던 곳이었어도 고향으로 삼아왔기에 더욱 그렇다. 서울에 대한 책은 꾸준히 쏟아진다. 분야와 주제도 각양각색이다. 서울도서관처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서울 관련서의 출판을 지원하고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작동과 소진이라, 왠지 제목이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란 제목 뒤로 곧바로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제가 붙는, 사실상 한 덩어리이나 길이 때문에 임의로 본제와 부제로 나눈 듯한 책. 저자 소개를 확인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사회학 서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는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물론 정치경제학은 경제학 내 분과학문이 맞다. 그런데 이 책에서 수식이나 시장이론 같은 흔한 경제학적 기제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경제학보다는 정치학에 정치학보다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었다. 물론 이 학문들 모두 사회과학이라는 큰 틀로 묶이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한 ‘동료 학문’이긴 하지만.

 

 

'반포'는 적어도 서울에서 살아온 사십 대 이상에게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이렇듯 공간은 그 무엇이건 내용물이 채워지기를 다소곳하게 기다리는 텅 빈 그릇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기는 다소곳하게 기다리는 텅 빈 그릇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기는 내용물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인 셈이다. - p.16

 

동호대교를 따라 강북에서 강남으로 건너와서 지하철3호선을 따라 올라오면 양쪽으로 유명한 성형외과 거리가 펼쳐진다. 중국 시장을 겨냥한 탓에 간자체 한자로 쓰인 간판은 얼핏 보면 차이나타운이라 해도 믿을 만한 정도다. 유학생들이 많이 모리는 대학 근처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단 근처에서 보는 ‘양꼬치’나 ‘환전’을 의미하는 한자와 성형외과 거리에서 보는 ‘정형(성형의 중국 식 표현)’이나 ‘미인’을 의미하는 한자는 그래서 마치 ‘맨숀’과 ‘○○팰리스’, ‘고시원’과 ‘오피스텔’ ‘헬스클럽’과 ‘피트니스’의 대비와도 흡사한 느낌을 준다. - p.92

 

공장에서 기계를 빨리 마모되도록 만듦으로써 새로운 기계로 바꾸려는 행동이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생각해보면, 땅값 상승으로 떠받쳐온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유인 구조가 얼마나 기형적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훨씬 더 철저하고 우아한 배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공간과 비교해본다면 그 역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안전요원이 주민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통제가 되는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들이나 의원 전용 출입구와 엘리베이터가 따로 잇던 국회의원회관 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p.112

 

1970년대 말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은 십만 원가량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삼심 평대의 분양가는 이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비율은 강남 아파트를 기준으로 할 때 대략 15에서 16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국민은행 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2014년 8월 현재 서울의 아파트 3.3제곱미터, 즉 한 평당 평균 가격은 1933만 3천 원이다. 대략 평당 이천만원으로 잡으면 삼십 평짜리 아파트 가격은 평균적으로 육억 원 정도 하는 셈이다.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을 삼천만 원으로 잡으면 약 이십 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물론 이것은 서울시 전체 평균이므로 강남 지역에 있는 아파트라면 비율이 훨씬 높아서 20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지난 한 세대 동안 학력자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평등이 얼마나 심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p.186

 

테헤란로 근처 구역을 담당하는 서초경찰서 앞에는 땡볕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도에 간이의자까지 펼쳐놓은 채 집회 신고를 하러 온, 감히 무슨 일인지 말을 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체격이 우람한 젊은이들의 긴 행렬이 눈에 띈다. 자동차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맞아떨어졌던 예측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는다. 차림새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내 서글픈, 그러나 그다지 틀리지도 않는 본능으로 판단하건대 대기업의 정사원, 말하자면 와이셔츠에 넥타이 메고 출근하여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이는 분명 아닐 이 젊은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제아무리 컴퓨터 네트워크가 발전해도 마지막 순간의 교류는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듯, 사회를 움직이는 신경망의 말단부에서 관계자와 비관계자 사이에 출입금지의 벽을 둘러치는 역할을 그렇게 아마도 비정규직일 젊은이들이 맡고 있다. - p.195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이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광화문 앞 광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른거리는 국가주의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사실 서울 시내를 장식하는 상징적 조형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만들 것인가는 매우 복합적인 정치경제학의 산물이다. (...) 과거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주로 억압적 국가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제는 자본의 지배, 국가의 틀을 빌린 자본의 통제 혹은 자본의 언어로 말하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시간 구조를 뼈대로 삼아 형성된 서울의 공간적 구조를 구별 짓기와 추격의 과정,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과 실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로 귀착된다. - p.219

 

 

저자 역시 서울 토박이는 아니다. 부산에서 출생했고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저자에게 서울은 매력적인 문제의식을 촉발하는 강력한 소재였다. 처음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기억의 궤적으로 서울을 톺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책 전체의 기저를 담당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의미로 확장하고 톺아본다. 광화문, 노량진, 반포, 구로공단, 목동, 강남 등 익숙한 서울의 공간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 저자는 집요하게 사유한다.

 

 

그런데 이러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저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미묘하게 서울과 비서울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이 책은 서울을 담은 서울 얘기와 서울에서 확장하는 다른 대상에 대한 이야기와 탈서울의 일반적 관념론들이 뒤섞여 있다. 가까이서 보면 이질적인 뒤섞임이 크게 보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서울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읽다가 조금 당황스러움, 기막힘, 산만함을 느끼기도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은 인도 출신이니만큼 빈곤과 기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가 인도와 중국 등의 사례를 분석한 끝에 내린 결론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곳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 p.86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예전 파리의 지하철역에 무임 승차를 막기 위해 쓰여 있던 문구라고 한다. 로맹 가리는 이 문구를 발기부전에 빠진 노인의 고뇌를 그린 소설 제목으로 갖다 썼다. 그 경지가 얼마나 절박한 경지인지, 도대체 소설로까지 형상화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주거 공간이나 일터에 붙어 있는 출입금지 경고문에 비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의 아픔과 서글픔이 아니리라 짐작한다. 오래전 어느 글에서 읽었다. 한국사회에서 예식장과 러브호텔은 똑같은 기호를 갖고 있다고. 두 장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마치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 듯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그것. 바로 섹스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곳이라는 점이다. ‘궁전’ ‘황실’ 따위의 이름에 동화 속 공주가 살 듯 한 성을 묘사한 외관이나 인테리어는 지난 세기 서울의 예식장이나 러브호텔에 즐겨 사용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섹스 금지의 마법은 드디어 풀리고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가 시작된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예식장이 합법과 축복의 장소로 상정되는 곳이라면, 러브호텔은 아마도 비합법적 관계 혹은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함과 쑥스러움의 장소라는 것. 그러나 21세기 서울 어딘가에서 동화 속 세계를 묘사하는 외관과 인테리어를 한 예식장이나 모텔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그 지역이 이른바 변두리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제 예식장은 레드 카펫이 깔린 칸느 영화제 개막식장의 입구로 그 은유를 바꾸었다. 이름도 영어나 유럽어를 차용하거나 변형함으로써 결혼식을 쉽게 떠올리지 않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궁전예식장’이 백설공주의 성을 키치스럽게 모방했다면 ‘더 라움’은 대중적인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전략을 취한다. 들어갈 수 있음과 없음의 차이.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보라’와 ‘어떻게든 따라가겠다’의 차이인 것이다. 안과 밖의 은유는 이렇든 그 ‘안’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위계로서 성립한다. 안과 밖의 은유, 그 위계의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의 한편에서는 배제의 논리가, 그 반대편에서는 모방과 추격의 논리가 작용한다. 그리고 두 논리에 공통된 것은, 물신의 논리다. - p.175

 

대학 근처 네거리 뒷골목의 천변을 따라 ‘불나비’나 ‘로즈’ 따위의 이름에 유치한 조명을 갖춘 술집들, 우리가 ‘세느 강변’이라 불렀던 곳을 지나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세느 강변에는 술시중을 들 뿐 아니라 아마 성매매도 가능했을 ‘매미’라고 불리던 여종업원들이 있었다.

“매미가 왜 매미인 줄 아냐?”

“……”

“팔 매, 아름다울 미.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파는 사람이란 뜻이거든. 꽤 운치 있는 이름 아니냐?”

늘 자신만만하던 친구가 들려준 얘기였다. 어느 날 그는 ‘세느 강변’에서 술을 마셨다. 식용 알코올을 증류한 뒤 첨가물을 섞은 조악한 양주였을지도 모른다. 그날따라 ‘매미’는 아이 우유 값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돈을 달라며 졸라댔다. 앳된 대학생 손님이 엉큼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순간 문득 뿌연 액체가 흘러나왔고, 그는 그 순간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지폐 몇 장을 던지듯 뿌려놓고 달려 나왔다. - p.211

 

 

저자는 서울을 ‘우리의 삶을 운영하는 OS(운영체제)’라고 본다. 그리고 서울이 가진 주 정체성으로 물신과 배제, 추격과 모방, 능력주의 등을 언급한다. 이런 시선이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경제학자’가 쓴 사회학서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한편 이 책에선 세 가지 ‘도구로써의 서울’ 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소비, 주거, 여가, 노동, 종교, 대학, 사교육 등 우리 삶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써의 서울이다. 두 번째는 케인즈, 마르크스, 피케티 등과 연결되는 학문 이론의 사례로써의 서울이다. 마지막으로는 재개발, 양극화, 지대 등을 통해 한국을 바라보는 거울로써의 서울이다.

 

 

적당한 재미도 있고 어려운 구석도 전혀 없어 대부분의 이들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요즘 일반교양서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에세이 같은’ 교양서 중 하나이다. 다만 읽기는 가벼웠으나 독후감이 영 상쾌하지 않다. 저자가 선택한 자본주의적 프레임들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적 삶의 비애와 연결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자가 실컷 늘어놓은 서울의 정치경제학이 가리키는 것은 ‘삶’이었다. 서울과 삶, 서울의 삶. 다만 그것이 반쪽 같은 구석은 있다. 살아가는 건 늘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늘 슬프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울을 알고 서울을 살아가는 이에게 거울 놀이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거울 자체는 일면을 비추지면, 거울을 쥔 자가 움직이면 여러 면을 볼 수 있지 않은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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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 테오의 13일
로렌차 젠틸레 지음, 천지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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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행복이 간절했던 꼬마의 비장했던 13

 

 

 

다섯 살 때 퇴근하신 어머니께서 작은 금붕어 두 마리가 담긴 작은 어항을 내 가슴에 안겨 주셨다. 강아지 까망이 이후로 살아 있는 동물 친구가 생겨 기뻐 날뛰던 나는 까망이와 놀듯 금붕어와 온 동네를 뛰놀기 위해 어항에서 금붕어들을 꺼냈다. 금붕어 두 마리가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 걸 나는 금붕어도 나처럼 새 친구가 생겨 기분이 좋은지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금붕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목격하고 인지한 죽음이었다. 살생을 저지르면서 생명과 죽음을 배운 비참한 경험을 겪고서야,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수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사랑하는 무수한 것들의 죽음을 겪는 인간이라는 비극적 존재임을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죽을 수 있고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 사람들은 그런 나를 질풍노도의 중이병(사춘기)’라고 규정하였다. 아홉 살 때 폐렴에 걸린 적이 있다. 양육 경험이 부족하고 큰애바보였던 아버지 덕에 선천적으로 병약해 열 살을 넘기기 힘든 운명인지 오해하고 살아왔고, 그 즈음 하나같이 주인공들이 폐병으로 죽는 드라마와 위인전기에 심취했던 나는 희뿌옇게 변한 흉부 X-레이 사진을 보고 겁에 질려 소아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홉 살은 죽기엔 너무 어린 나이 같아요.” 평생 놀림권을 획득한 벽 차는 일화지만, 살면서 너무 힘들어 나쁜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그 기억이 번번이 나를 살게 하였다.

 

 

그런 개인적 경험 때문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있다. 10세 이하의 건강한 아이가 자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어른들의 욕심일까 하고 말이다. 내 인생의 영화 중에 전쟁을 겪고 있는 어린 아이가 죽음으로 행복을 이루는 작품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영화를 동심 파괴 영화이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판타지라고 했고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나는 어린 아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욕망이 설정한 픽션이거나, 전쟁 등 어른이 아이에게 나쁜 상황을 만들어줘 아이를 겉늙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88년생 작가의 소설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를 읽으면서도, 비교적 젊기에 순수하고 천진한 마음을 잘 그린 동화라고 느끼기보다 20대 후반도 완전한 어른의 눈을 갖는구나 하며 서글퍼졌다. ‘테오의 13이란 부제가 달린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죽고자 하는 여섯 살 테오의 13일간의 자살준비기이다. 어린 아이가 주인공인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목표하는 것처럼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도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절로 웃음 짓게 하는 동시에 어른의 세계를 낯설게혹은 따갑게봄으로써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저승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보다. 자기들이 사용한 나쁜 말들 때문에 지옥에 갈까 봐 두렵기 때문에 말이다. - p.50

 

"이 책 읽어 보셨어요?"하고 묻거나 "이 영화 보셨어요?"하고 물어보면 어른들은 안 봤다는 대답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한다. 1. ", 오래 전에." 2. "뭔가 의미가 담긴 제목이었지." 두 가지 모두 그게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 알고 있는 척을 해서 자신은 더 이상 알고 싶은 것도 없고, 또 사람들이 다른 질문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 p.77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며칠 후에 있을 굴리엘모의 생일잔치 이야기를 했다. 평소엔 운동장에 나가서 노는 여자애들까지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생일잔치에 갈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어디에 있는지 하느님이 신호를 보내 주면 나는 그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리엘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생일잔치에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 p.103

 

 

이탈리아인인 주인공 테오는 여덟 살 난 남자 꼬마애이다. 테오의 고민은 엄마와 아빠가 너무 자주 싸워 온 가족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는 늘 테오에게 인생에서 승리하는 게 중요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래서 테오는 부모님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서 부모님을 서로 못 싸우게 만들어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부모님께서 주신 생일 선물이 테오의 삶을 바꿨다. 나폴레옹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는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란다. 테오는 부모님과의 전투에서 필승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조언이 꼭 필요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단 한 가지 열망 때문에 테오는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하루하루 자살하는 방법과 나폴레옹이 있는 곳을 찾으며 묵묵히 자살을 준비하는 테오의 13일을 담은 책이다. 출판사의 연륜 만큼 외국문학을 선택하는 열린책들의 안목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수상 타이틀 하나 없던 신인 작가의 데뷔작 판권을 샀는데(두 번째로 판권을 사서 심지어 영역본보다 우리말 번역본이 먼저 나왔다) 번역 중에 작가가 자국에서 문학상을 탔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중역이 아닌 전공자의 직역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원서엔 테오가 여섯 살로 설정되어 있는데 우리식 나이인 여덟 살로 바꾸는 등 섬세한 번역을 엿볼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언어와 정서 차이 상 우리나라에서 외서 번역시 제목을 바꾸는 일은 정말 흔한데, 부주의하게 서지사항에 있는 원제를 확인하지 않았다가 고생을 좀 하였다. 대체 왜 책 제목이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인지가 궁금한데 책을 두 번 읽어도 테오가 바람이 되고 싶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았다. 멍청하면 사서 고생한다고 난독장애가 재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저자 홈페이지 뿐 아니라, 원서 출판사나 이탈리아 온라인 서점의 리뷰까지 힘겹게 읽으면서 책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어야 하였다. 편집자에게 직접 문의해야 확실한 이유를 알겠지만 아마 죽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거나 후에 이 책을 읽을 독자가 부디 같은 생각과 같은 실수를 안 하길 빈다. 이 책의 원제는 그냥 ‘TEO’, 부제도 따로 없다. 테오의, 테오에 의한, 테오를 위한 책 그 자체이다. 열린책들의 책 소개글을 보고 몹시 기대했는데, 처음 읽을 땐 흩날리는 바람처럼 가볍고 평이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다시 읽었더니 문학상을 받을 만한 구석이 있구나 싶고 책에 대한 감정이 한결 나아졌다. 내내 촌철살인이고 미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멈칫거리게 하는 괜찮은 문장들이 있어 기분 좋게 완독할 수 있었다.

 

 

- 테오. 때로는 꿈속에서 답을 찾기도 한단다.

꿈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아빠가 그랬어요.”

테오, 꿈은 현실보다 더 진짜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네 안에 있는 거니까. 네 거니까.

수지 아줌마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꿈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 꿈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또 계속 바뀌는데. 나는 로셀라 선생님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유령 꿈과 용이 혀로 불을 뿜는 꿈을 자주 꾼다. 어느 날 밤엔 전쟁터에서 누나와 적이 되어 싸우는 꿈을 꾼 적도 있다. 누나는 칼로 나를 찌르면서 말했다. “테오, 사랑하는 나의 동생.” 하지만 누나는 현실에서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만 빼고는. - p.106

 

우리 집의 행복을 되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러면 누나도 다시 행복해질 것이고, 나도 그럴 거다. 비록 그때가 오면 나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다행히 바보가 아니라서 보이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죽는 것이다. 갑자기 추위가 느껴졌다. 죽는다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노인들한테 일어나는 일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 아이가 죽을 때는 하나의 가능성이 죽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더 자라지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하고,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되지 못하는 게 어른들한테는 슬프게 느껴졌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어차피 결혼도 하고 싶지 않고 아이도 낳고 싶지 않다. 우리 반 여자아이들도 좋아하지 않고, 여자아이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공기를 마셨다.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유령 퇴치용 램프를 껐다. 이제 무서움 따위는 없었다. 내 전투의 가장 어려운 한 걸음이 될 테지만, 이제 나는 죽음이 불행한 것이 아니며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안다. - p.173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테오. 좋은 말만 대충 하는 어린이 도서 속 나폴레옹에 대한 묘사를 철썩 같이 믿는 테오가, 구글에서 자살만 검색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패배)에 대해서도 검색했더라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그 나이 특유의 저돌적인 기세, 너무나 순수하고 간절한 바람 때문에 귀여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짠하였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 아이의 시선을 흉내 낸 것임을 알면서도 테오가 수긍하지 못하는 어른의 이율배반적이거나 무책임한 모습들을 보며 뜨끔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였다. 한편 테오처럼 우리가 13일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가장 열망하는 한 가지 바람에 대해 몰두한다면 얼마만큼의 깨달음을 얻을까 궁금해졌다. 일기장처럼 하루하루 끊어져 있는 이 책은 그 소소한 전개와 구성처럼 결말도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테오의 치기어린 질주에 브레이크 같은 결말이었고, 테오의 13일이 헛되지 않으면서 아무도 울지 않아도 되는 결말이어서 좋았다. 다 읽고 책을 덮으니 표지에서 뒷짐 진 나폴레옹과 테오의 뒤로 제제나 어린 왕자, 니콜라나 토토 같은 익숙한 아이들이 아른거리는 듯하였다. 반가워 손을 뻗으니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바람이었나 보다.



p.s.- 이번 열린책들의 우리말 번역본 표지는 Marco Cazzato의 원화를 커버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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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2-0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나이로 10살쯤 되는건데.. 예를 들어 아빠 어디가 같은 데 나오는 애들 보면 테오가 전신적으로 너무 순진한 면은 있어요.

이섬 2015-02-05 18:43   좋아요 0 | URL
서평에도 썼지만 원서엔 여섯살 설정. 역자가 번역하면서 여덟살로 바꿨어요. 그 정도 나이면 충분히 가능한 미숙함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 이러나 저러나 테오가 어른들의 상상 속에 구현된 아이라고 느꼈습니다

CREBBP 2015-02-05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덞살이라고 하기엔... 구글링이랑 좀 성숙한 거 아닌가요 ㅎㅎㅎ 이래저래 안맞는 듯
 
읽어보시집 - SNS 스타 작가 최대호의 읽으면 기분 좋아지는 시, 스페셜 에디션 읽어보시집 1
최대호 지음, 최고은 그림 / 넥서스BOOKS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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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시집] 지금 우리가 부른 시인

 

 

대졸자 증가와 극심한 취업난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글쓰기와 책에 대한 대중들의 경외심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다. 글쓰기 책이나 강의가 인기 많고, 특히 SNS에 최적화인 짧은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높다. 우리 세대는 이제 4년제 대졸자치고 공모전 수상 경력 없는 사람 찾기 힘든 경지에 다다랐다. 여행을 가도 책으로 내는 것은 이제 세대 보편적 욕구가 아니라 필수적 사명이다. 파워블로거나 바이럴마케팅 업체가 아니어도 일 방문자수 수천대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SNS 팔로워 수천 명을 관리하는 영세 네티즌이 수두룩하다. 과거에는 자소서에 한줄 더 쓰러 기획 동아리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유령 회사쯤은 만들어야 너 좀 경험과 열정 있구나 하는 시대다. 블룩(blog+book)5년을 채 못 버티고 흔해 빠진혹은 퇴물아이템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하였다. 열정페이는 작가 지망생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글을 기고하고 책을 낼 수 있는 채널과 방법은 늘었다. 대신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무료 원고나 푼돈에 저작권을 양도하기를 제안한다. 이토록 아름답고 스마트한 우리들의 시대의 문학 트렌드를 요약하면 콘텐츠적으로는 축소화고 시스템적으로는 ‘CPND’라 하겠다.

 

 

평소 시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요즘 너무 바빠서 철벽 수비로 신간을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엄청난 망설임 끝에 <읽어보시집>을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시에 대한 조예와 관심보다, 죽은 마케터의 살아 있는 본능 때문이었다. 지금 시대가 부르는 유행 타거나 트렌디한 제품, 영감과 공부거리를 주는 제품에 대한 본능적 이끌림 말이다. <읽어보시집>의 저자 최대호는 하상욱에 이어 두 번째로 정식 단행본을 낸 SNS 시인이 되었다. 그는 2의 하상욱보다는 한국 최초의 손글씨 SNS 시인으로 불리길 원한다고 하였다. 혹자는 문인화가이자 시인으로 페이스북에 그림이 있는 붓시를 올리는 김주대까지 합쳐 우리나라 3SNS 시인으로 꼽지만, 그는 90년대 초반에 정식으로 등단한 정석 시인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SNS 시인으로 말하기 곤란하다. 똑같이 손글씨 시를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고 등장 시기도 비슷해 최초를 겨뤄봐야 할지도 모르는 이환천 시인의 경우 아직 페이스북 펜 수가 4만명 대이고 책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장르 개척자이자 선점자로 성공은 하긴 했지만, 수많은 경쟁 상대들이 쫓아오고 있는 중이다. 


트위터 https://twitter.com/dhcusoon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bosizip

블로그 http://blog.naver.com/dhcusoon

카카오스토리 최대호

 

 

최대호의 가장 큰 차별점은 거의 모든 PC 및 모바일 웹 채널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카카오스토리를 비슷하면서 다르게 운영하고 있고, SNS만큼은 아니지만 블로그도 사용한다. 또 지금은 운영 중지되었지만 홈페이지에 애플리케이션까지 만들었다. <읽어보시집>의 책 출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책 제목은 읽어보시집은 저자의 페이스북 이름이다. 그 제목으로 자신의 각종 SNS에 올렸던 주옥같은 시들을 모아, 친동생이 그림을 그리고, 가족들이 합심하여 가내수공업으로 종이책을 만들고 주문 판매하였고, 전자책 플랫폼 중 하나인 리디북스를 통해 무료 전자책으로 배포하였다. 그러다가 종합출판사인 넥서스의 눈에 띄어 러브콜을 받고 ISBN이 붙은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책 제목도 바꾸려다가 그대로 가기로 하였다. 언뜻 시집과 넥서스의 조합이 낯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직접 보면 바로 의문이 풀린다. 넥서스에서 내는 책들은 대부분 실용, 청춘, 트렌디로 설명 가능하다. SNS 기반에 흑백 삽화를 곁들여진 읽어보는시집은 컬러링도 가능한 읽고 쓰는시집으로 발상을 심화시켰다. 가내수공업으로 제작했던 책은 한정판 부록의 형태로 본책에 딸려 스페셜 에디션이 되었다

 

 

또 취업준비생인 저자에게 이 책은 수많은 청춘 이력에 묶일 일종의 포트폴리오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하는 데 5시간, 쓰는 데 5, 읽는 데 5일지언정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거리가 많은 흥미로운 책이었다. 동종 업계 경쟁자 혹은 동료를 접한 자극과 설렘도 있었고. SNS에서 소비되는 시기에 무겁지 않고, 짧지만 반전을 강조하고, 내내 유쾌하다. 아무리 아껴 읽어보려 해도 순식간에 마지막 장을 덮고 마는 책이다. 그러나 <읽어보시집>엔 글로 놀리는 오빠와 그림으로 복수하는 애증의 남매애가, 오그라든 손발로 공감의 물개박수 치게 만드는 연애 좀 많이 해본 오빠의 애정시가, 힘들어도 씩씩하고 건강한 청춘이 담겨 있다. SNS에서는 볼 수 없는 시들이 적잖고, SNS의 속성상 뒤로 밀리거나 다른 글과 섞여버린 타임라인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한 번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 한국 문학의 위기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책의 등장이 기성, 신인할 것 없이 가볍고 얇은 소모성 작품 집필에 몰두하는 요즘 세태를 확인 사살하는 또 한 컵의 기름이라고 곱게 보지 않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읽어보시집>은 최대호는 지금 우리가 부르고 만든 시인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찾고 열광하는 글이 궁금하다면 <읽어보시집>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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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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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Far From the Tree: A Dozen Kinds of Love(2012;미국)

           Far From the Tree: Parents, Children and the Search for Identity 

본문은 동일하나 재밌게도 하드커버에서 페이퍼백으로 오며 부제가 달라졌습니다.

* 2012 전미비평가협회상, '뉴욕타임즈' 올해의 책, '타임' 올해의 책, '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 '보스턴 글로브' 올해의 책, '클리브랜드 플레인 딜러' 올해의 책,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올해의 책, '애드버킷 올해의 책'

   2013 데이턴 평화 문학상, 제이 앤터니 루카스 도서상, 베터 라이프 도서상, 아니스필드-울프 도서상, 정신질환 진미연합 뉴욕지부 선정 희망의 씨앗 도서상

   2014 WELLCOME BOOK PRIZE Winner

[모와 다른 아이들 1] 부모와 아이, 그리고 수평적 정체성

 

 

누구나 살면서 잊히지 않고 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결정적 만남을 경험한다. 내게는 6년 전에 들었던 김진혁 전 EBS PD의 특강이 그랬다. 지금은 숱한 인터뷰 기사로 많이 알려진 얘기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육성과 표정으로 접해서인지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EBS의 장수 효자 프로그램인 5분 다큐 <지식채널e>의 초대PD이다. 지금이 방계프로그램도 더 나오고, 책도 훨씬 많지만 개성이 가장 강하고 반응도 가장 뜨거웠던 때는 역시 그 초기 시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김진혁 PD의 지식채널e 영감의 원천을 궁금해 하던 때 그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것은 가난과 장애 등 소외의 목격이었노라고, 그것은 우리가 동정조차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누군가의 현실이자 삶 자체라고 하였다. 소외를 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만, 스스로 소외자가 되지 않으면 영원히 완벽하게는 알 수 없는 것이 소외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는 내게도 일종의 해방이었다. 내가 가진 정체성들과 앞으로 겪게 될 상황을 견딜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고, 세상을 읽는 한 가지 프레임이 하나 더 늘었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은 두 종류의 정체성을 제안한다. 하나는 동일한 가계 안에서 대물림되는 수직적 정체성이다. 여기에는 민족성과 국적을 비롯해 일반적으로 언어와 종교도 포함된다. 또 다른 하나는 수평적 정체성이다. ‘수평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해당 정체성이 가족이 아닌 동류 집단을 통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평적 정체성은 청각 장애나 왜소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도 중복 장애 등 일반적으로 부모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자녀의 장애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 더해서 이 책은 신동이나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 범죄자, 트랜스젠더 등 보다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예외적인 특징들도 탐구한다. - p.14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내 안의 아픔을 고민했고 대부분 치료되었다. 조금은 놀라운 일이다. 수평성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일관성을 찾는 것이고,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나는 내 이야기를 고쳐 쓰게 되었다. 내게는 게이로서의 수평적 경험과, 나를 낳아준 가족과 공유하는 수직적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경험이 더 이상 완전하게 통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악화되는 것 같지 않다. 부모님에게 분노하고 싶은 욕구는 이제 그 흔적만을 남겨 둔 채 모두 증발했다. 낯선 사람들의 관용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부모님에게 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기만 했지, 당신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부모님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부모님과 어디에서나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다. - p.93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주류인 사람은 거의 없다. 정상인과 장애인,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부자와 빈자, 기혼자와 미혼자 등 다양한 기준에서 주류도 비주류도 되면서 폭력을 교환한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1,2>의 표지는 저자와 수려한 외모와 남다른 학벌 및 이력, 책의 화려한 수상 타이틀로 가득하다. 그러나 표지를 벗기고 하드커버 본 책만으로 책을 대하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표지 없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1,2>는 게이에 난독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가 무려 1600쪽이 넘도록 힘겹게 글을 써내려 간 일종의 개인의 고통스러운 투쟁의 기록이었다. 12장으로 이루어진 <부모와 다른 아이들 1,2>의 첫 장이 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와 삶을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책이었고, 그래서 자신이 궁금하고 고민하는 바에 대하여 쓰고 싶은 만큼써내려간 책이었다. 똑똑한 고학력자가 당연히 쓸 수 있는 해박하고 방대한 교양서로 보였는데, 알고 봤더니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치열한 노력의 인간승리 결과물이었다.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태는 일반적으로 무지와 관련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간절한 믿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식의 책임 전가는 어떤 아이도 구원해 주지 않는다. - p53

 

육체적인 장애는 배타적인 담론으로 이루어진 법적, 의학적, 정치적, 문화적 화술에 의해 만들어진다. - 로즈마리 갈란드 톰슨(p.223)

 

부모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자녀가 부모보다 높은 수준의, 아니면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사회 문화적인 성취를 이루길 기대한다. - 앨런 로스(p.647)

 

 

부모와 아이, 번식으로 발생하는 특수한 인간관계. 두 사람이 서로의 DNA를 결합해 몸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든다. 자신들과 조상들을 쏙 빼닮은 이 어리고 약한 인간은 한 동안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살 수 있고, 커서도 상당한 시간을 함께 살며 독립해서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끈끈히 묶여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가 자신들보다 모든 면에서 낫거나 최소한 비슷하길 바라고, 그래서 온갖 욕심을 품는다. 아이는 자라면서 그런 부모의 기대가 부담스럽지만, 자신도 부모가 되면 같은 전철을 밟는다. 그러나 어떤 부모든 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땐 그저 사지 멀쩡하고 건강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기만 해도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른 아이들은 그들을 생산한 부모조차 거부감과 당혹감에 휩싸이게 하고, 남들이 겪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부모가 아이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할 때 그들은 아이에게 불가능해서 포기할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다른 아이들 1,2>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와 그의 부모를 대변하고 대중들의 편견과 왜곡, 무지를 지우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하지 않은 특징들을 저자는 수평적 정체성이란 개념으로 통칭한다.

 

<부모가 다른 아이들 1>은 저자의 자기 반영적 접근이 많은 첫 장 아들(게이)을 제외하고 우리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다른 아이의 유형인 장애를 다루고 있다. 불행히도 이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예방할 수 없는 확률적인 문제이다. 발생의 변수가 너무나 많다. 양수 검사 등 현재의 태아 장애 진단법은 아이가 정상이라는 확답을 얻기 위해 아이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방법이다. 또 비용이 높아 저소득층일수록 장애아 가정 비율이 높고, 장애아라고 낙태하거나 일단 낳고 장애아면 버리는 등 다른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촉발한다. 장애아를 둔 부모는 잘못이 없어도 평생 스스로도 사회의 강요로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일반적인 부모-자녀 관계와 달리 아이의 평생을 책임지려 하는 집착적이고 의무감에 불타는 양육태도를 보인다.

 

 

내가 부모님께 감사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가 나를 시에서 유일한 특수반이 설치되어 있는 공립초등학교에 보낸 것이다. 유치원 다닐 때도 절친 중에 소아마비였던 아이가 있었고 헬렌 켈러 등의 장애를 가진 위인들의 전기들을 숱하게 읽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본 적 없었던 아이들을 보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였다. 특수반은 정상아와 장애아(문제아 포함)를 구분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라 장애아가 정규교육과정에 적응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반이었고, 일반 학급과 특수반을 오가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숱한 학부모들이 우리 학교를 장애인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 일반학급에서 아이를 교육시키기 위해 선택하였다. 내가 아무렇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고, 정상인과 장애인은 분명히 다르지만 특별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착하지도 약하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평생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제이컵이 청각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그에 따른 의미를 찾아내도록 선택받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이컵의 숙명이죠. 제이컵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 제이컵이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그랬다면 제이컵이 더 행복했을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더 행복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제이컵은 그냥 내 아들일 뿐입니다. - p.150

 

오래 전 로즈(왜소증)의 치료를 위해 존스 홉킨스 병원에 간 적이 있었어요. 로즈를 데리고 승강기에 타고 있었죠. 그때 한 어머니가 그녀의 아이와 함께 승강기로 들어왔어요. 그 아이는 침을 흘리고 있었고 척 보기에도 중증 다운증후군이 분명했죠. 나는 마치 ", 우리 아이는 그럭저럭 감당이라도 되지만 당신의 아이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겠군요"라고 말하듯이 무척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그녀가 정확히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 p.230


자신이 준 사랑만큼 티가 나지 않는 자녀를 사랑하려면 다른 사랑보다 더 지독한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폐증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자폐 아동은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불완전하게나마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낀다. - p.403

 

정신분열증 환자의 자기 권리 주장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곤란한 문제를 제기한다. 환자 자신의 현재 경험보다 더 진정한 자아가, 정신분열증 증상을 보이는 자아를 제외하고 또 다른 참된 자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 p.597

 

 

살면서 장애인과 교제한 경험이 별로 없고, 그래서 막연히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책이 <부모와 다른 아이들 1>이다. 대표적인 부분이 정상인들이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상처를 받는 그들 특유의 배타성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는 그것을 문화라고 표현하는데 게이 문화처럼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등 장애의 유형에 따라 그들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유대를 형성한다. 그들은 장애는 불편하고 그래서 현대 의술로 그들을 정상인과 최대한 비슷하게 되면 좋겠다는 정상인들의 전형적인 착각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농문화를 예를 들면 같은 청각장애인이면서 부모님까지 청각장애인이 아니란 이유로 그와 그의 부모를 청각장애인의 커뮤니티에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선호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학교나 직업)이 있다. 그리고 정상인들의 착각과 달리 그들이 고집하는 문화안에서 꽤 잘 산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1>은 아들(게이),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장애(중도중복장애) 일곱 가지 주제를 다룬다. 엄청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통해 방대한 서술을 해놓은 만큼 책이 주제들과 관련하여 미처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인공와우수술은 잔존 청력을 완전히 제거한다거나 수화도 언어만큼이나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 다운증후군을 성형을 통해 외모적으로는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과 다운증후군은 남자만 생식능력이 없지 여자는 정상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 또 자폐증 환자의 3분의 1 이상이 1개 이상의 다른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은 정신분열증 부분이었는데, 우리가 현재 정신분열증의 범위를 너무 광범위하게 보고 있어 정의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정신분열증은 10대 후반에서 20대에 발현하여 몇 년에서 수십 년까지 잠복했다가 발병하면 치매처럼 뇌의 퇴행이 진행된다. , 완치가 불가능한 병, 따라서 정신분열증 선고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더 이상 못 하게 하는 무서운 낙인인데 약 먹고 치료하면 괜찮아지는 병으로 쉽게 생각한다.

 

 

원래 <부모와 다른 아이들 1,2>1000쪽이 조금 되지 않는 한 권짜리 책이다. 그게 자간 등 편집의 차이도 있고 원주를 옮기고 옮긴이의 추가적인 주석을 달다보니 우리말 번역본은 1600쪽이 넘어간다. 그래서 서평을 쓸 때 원서의 구성을 고려하여 서평을 하나로 쓸까 했지만 내용상 전반부와 후반부의 방향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각권 서평을 따로 쓰기로 하였다, 두 권으로 분권되었다는 점 외에 우리말 번역본만의 특징으로 한국어판 서문의 존재와 원문을 옮기는 데 있어 독특한 어휘의 사용을 들 수 있다. 건청인(비청각장애인), 이부(동복)형제, 퍼시(보지), 소인(난쟁이), 농인(귀머거리) 등 보통의 번역본에서 잘 안 쓰는 표현. 최대한 아이들의 이례적인 특징을 지칭하는 용어들에 가급적 선입견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이질적인 표현 때문에도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우리말 번역본상 2권인 원서의 후반부 주제는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 아버지 다섯 가지. 그 부분에 대한 언급과 이 글에서 미처 못 한 이야기는 다음 서평에서 마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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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지배하는 유통 마케팅의 힘 성과를 지배하는 힘 2
양승식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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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지배하는 유통 마케팅의 힘] 바로 쓰는 유통 마케팅 교과서

 

 

새해가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어제의 숙취와 오락을 뒤로 하고 시무식과 새 시즌을 맞으며 각자 한해의 각오를 다진다. 연일 쏟아지는 기업과 기관들의 오너 신년사를 체크하고, 나름의 1년의 계획도 세우고, 작심삼일로 끝날지라도 공부나 금연 등의 개인미션을 행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늘 활기와 의욕이 넘치는 1, 며칠 전 위메프 인턴 사건이 제대로 얼음물을 끼얹었다. 연말부터 이어진 갑질과 미생의 이슈의 연장선이었고, 노예인턴·알바수습·열정페이 사례가 또 하나 늘은 것이었다. 그래서 새롭고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현직 유통맨과, 유통맨을 꿈꾸는 이들을 연초부터 크게 침울하게 만드는 뉴스였다. 그들은 유통업에서 갑의 직무를 수행했지만, 필드테스트에 떨어지자 하루아침에 곧 정규직인 인턴에서 일당 5만원 짜리 단기 알바로 전락하였다. , , 정들은 허망한 갑의 현실에 당황했고 갑은 보시다시피 우리 처지도 말이 아니라며 애써 담담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보가 얼마나 터지든, 유통업이 수많은 누군가의 꿈이고 직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무거운 마음은 한 잔 술에 의지해서라도 얼른 털어버리고, 다시 현장을 뛰고 자격증이나 어학 공부를 틈틈이 하며 바쁜 일상과 자신의 역할을 지켜야 한다. 유통업은 산업 특성상 휴일과 밤낮이 별 의미 없기에 업무의 종류도 다양하고,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그래서 매력도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막막하고 막연하기도 하다. 몇몇 학과에서 관련 전공을 두고, 몇 가지 관련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직접 몸으로 구르며 일을 해봐야 익히는 게 태반이고, 유통업 내에서 어떤 일을 하냐에 따라 필요한 공부가 또 달라지는 것 같다. <성과를 지배하는 유통 마케팅의 힘>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유통 및 물류업에 발을 담그고 있고 MD가 최종 목표인 입장에서 이 책을 쓰며 유통업을 위한 마케팅서는 달라야 하며, 이 책은 유통 마케팅 교과서의 바이블을 목표로 썼다는 저자의 말이 무척 솔깃하였기 때문이다.

 

유통 시장과 유통 거래의 유형, 유통 용어, 제안서 작성법, 입찰 및 조달, 영업 마케팅 노하우와 예비 창업자를 위한 조언 등 주제에 맞게 교과서 형태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목차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책도 크라운판에 코팅지, 컬러 인쇄에 가격도 2만원 선이다. 그게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교과서는 교과서되 읽고 바로 쓸 수 있는 실용성 강한 책으로 썼다. 업계 종사자에게 대환영인 책이다. 그러나 취업준비생이라면 책상에 놓고 공부하듯 읽을 수 있지만, 직장인 대부분은 책을 들고 다니며 출퇴근 시간 등 짬짜미 읽게 마련인데 그런 입장에선 국배판 이상의 책은 부담스럽다. 전자책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없어서 살짝 아쉬웠다. 저자는 책머리에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소개하며 유통 마케팅 전문가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요약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케팅은 마케팅과 영업관리 직무를 구분하는 현재 HR 기준에서의 마케팅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마케팅 혹은 마케팅=영업이라는 과거 관점의 마케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가장 도움을 많이 얻을 독자는 벤더이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영업 교과서인지 알았을 정도이다. 그만큼 저자가 오랫동안 벤더로서 영업을 많이 한 사람인데, 이런 것을 알려줘도 되나 싶을 만큼 개인적인 영업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다. 물론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MD와 바이어, 매장 직원 등 각각의 이해당사자를 성별과 성격에 따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그들의 사생활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지 등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요컨대, 이 책은 유통업의 대략의 얼개와 기본 용어를 단 시간에 파악하고 영업을 중심으로 유통업을 파악하고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유통 마케팅에 관심 있지만 벤더는 아니라면, 저자의 논의를 역으로 접근해 벤더의 전략적 접근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기 좋은 책이니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성과를 지배하는 유통 마케팅의 힘>은 스타리치북스의 경영서 시리즈 성과를 지배하는 힘두 번째 책인데, 분량과 내용도 적당하고 참 책이 괜찮아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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