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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너의 심장이 멈출 거라 말했다
클로에 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12월
평점 :
날이 급격히 추워졌다. 이른바 본격적으로 '옆구리가 시려오는' 계절이다. 달달하고 따뜻한 음료나 핫팩 또는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필요해지는 계절. 그리고 이왕이면 달달한 로맨스도 한 스푼 필요한 계절.

어느 날, 너의 심장이 멈출 거라 말했다.
클로에 윤 장편소설
팩토리나인
남자 주인공인 전세계는 신문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나간다. 그곳에서 여자주인공 은제이를 만나 100일 동안의 계약을 맺는다. 남자 주인공은 그의 독백에 따르면 사랑을 돈으로 환산해주지 않는 여자와는 만나지 않는다는 남자다. ‘사랑도 무던한 노력의 결과니까. 사랑, 그 별것 아닌 걸 하기 위해 바치는 고뇌와 체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여자들은 모른다. 사랑이 어디에서 그냥 생겨나는 줄 아는지’ (p26) 라고 생각하는 남자. 이야기는 남자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식상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목소리는 레모네이드만큼이나 상큼했다. 탄산이 기준치를 초과한 레모네이드. 적잖이 건방졌고, 야무졌다. 새빨간 벨벳 헤어밴드가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그게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 p15
(…)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볼 때 눈의 크기, 속눈썹의 길이, 코의 높이 등 구체적인 생김새보다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색깔보다는 톤, 직접적인 자극보다는 미약하면서 지속적인 무드, 살이 닿았을 때의 온도, 숨결의 향 등에 더 민감하지만 모든 조건에 앞서 일단 그녀는 탈락이었다. -p21
남자 주인공의 시선에서는 여자 주인공 은제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인다. 어떤 계약인지도 모르고 큰 금액 때문에 덜컥 계약을 해버렸던터라 앞으로 하려는 일이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일’ 이라는 그녀가 황당하게 느껴진다. 그런 그녀에 대한 그의 속마음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터지게 하는 경쾌함과 엉뚱한 묘사가 가득하다.
이후 은제이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그의 속마음과 생각의 변화를 따라가다보면, 읽는 이들도 여자 주인공의 매력에 빠져버리게 된다. 죽기 전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실행해보기 위해 계약연애를 시작한 여주인공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함께.
사실은 나 스무 살까지 밖에 못 산다고 했는데 벌써 1년이나 더 살았지 뭐야. 나에게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장담 못 해.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것도 기적이니까.
- p47
로맨스의 최고 재미 중의 하나는 같은 시간에 대한 두 주인공의 시선과 감정의 차이를 몰래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만 전개되던 이야기는 이야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일기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항상 새침하게 남자주인공을 밀어내는 듯 보였던, 그래서 남자 주인공이 더욱 애달파한 것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체념하고, 그저 감정에 서툴렀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첫인상은 여주인공이 먼저 남주인공에게 호감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목소리에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
이마를 덮은 헝클어진 앞머리 사이로 약간은 장난스러운 눈빛이 까맣게 빛났다. 모델이라고 믿을 만큼 큰 키에 입체적인 못날, 과감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유쾌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슬리퍼 사이로 삐져나온 발가락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 (…)
얼빠진 남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허세나 비굴함 대신 솔직함이 느껴졌다.
- p391
남주인공의 변화는 감동적이고, 그의 독백은 가슴이 찡하다. 여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주인공의 상태가 악화되지만 그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기 위해 어깨를 구부리고, 팔을 접고, 나와 있는 배를 최대한 집어넣으며 숨을 참는 거라고. 한마디로 불구가 되어야 하는 매우 웃긴 코미디였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나를 병신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p286
영원한 사랑의 맹세처럼 서로를 소유하려 하기보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 된다. 갖고 싶다는 욕심은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내 것이 될 수 없지만, 나는 그녀의 소유가 되었다는 걸 확신했다.
-p182
소설의 각 장에 발췌되어 있는 문장들도 이야기와 너무 잘 어울려 따로 모아 읽게도 된다.

남자 주인공과 함께 울며 가슴 아파하고, 먹먹한 기분도 느껴가며, 이 둘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 궁금해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몰입하여 읽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도 따뜻해졌다. 역시 추운 날에는 로맨스가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