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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바닥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6월
평점 :
이케이도 준의 이름을 만나면 나는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만큼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다. ( 일드도 다 찾아서 봤다. )
제44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며 그의 데뷔작이 되었던 『끝없는 바닥』 을 펼치며 『한자와 나오키』 와 같은 기업소설( 좀더 세분화해보면 은행이 무대가 되는 소설 )의 시작을 엿볼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들썩거렸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당시 “은행 미스터리의 탄생을 선언하는 작품”이라며 새로운 분야의 미스터리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인 이기 하루카는 대형 은행에서 융자 담당으로 일하는 평범한 직원다. 외근을 나가던 중 마주친 동료 사카모토는 “너, 나한테 빚진 거다?” 라는 묘한 한마디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났는데 몇 시간 후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알레르기로 인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다.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사카모토가 고객의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온 형사는 사카모토의 아내인 요코가 이기의 전 연인이었기도 한 터라 이기를 의심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이 일련의 사태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소설은 벌어진 사건의 해결을 위한 주 서사에, 돈과 권력을 좇는 인물과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인물의 대립구도가 강조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을 보는 시선이 어떤지 금방 알 수 있다.
회사는 너 같은 놈이 제일 다루기 힘들어. 출세에 혈안이 된 놈들이랑은 다르고, 그렇다고 해서 안온하게 월급쟁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 달라붙어 있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앉는다는 비애도 없고, 요컨대 너한테는 지킬 게 없어. 그러니까 조직 입장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로 보이지.
"그렇게 부은행장이나 부장이 중요합니까? 파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기 출세를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이죠. 필요 없어지면 키우던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놈들이에요. 선배 의견은 어떻습니까?"
"내 의견? 나는 월급쟁이야. 상사가 하는 말은 따를 수밖에 없어. 그게 기업의 논리잖아."
"비굴하네요. 비애가 느껴집니다. 그런 기업의 수장이 꼭 나쁜 짓을 하죠."
"이 새끼……. 장래가 아깝지도 않아?"
작가는 은행에서 일하다가 소설가로 데뷔했기에, 그의 경험이 매우 전문적으로 현장감있게 녹아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1998년은 일본 장기 신용은행의 파산, 불량채권 등 일본이 금융위기를 겪던 시기라 더욱 이 책이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소설 속 사건의 시작은 은행에 관련된 일이었지만 무대는 '산업의 쌀'로 비유되는 반도체 업계로 확대되며, 연속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하드 보일드한 감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 다만 오래 전 데뷔작이기에 비디오테이프 등의 오래된 아이템이 등장해서 옛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주변의 시선으로 성격을 짐작했던 이기가 자신의 속내를 밝히는 장면에서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진다. 무엇인가 지킬 것을 갈망하며, 인생에서 키워갈 온기를 찾는 주인공.
나는 다카하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주위에서 마시고 있는 이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표정도 있는가 하면 가라앉아서 납빛을 한 눈을 가진 사람도 있다. 터질 것 같은 웃음도 있는가 하면 분노로 얼굴을 붉히고 뭔가를 필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많은 인간이 있지만 집단으로 인식할 수는 없다. 있는 것은 개인이다. 도시 특유의 단절된 감각에 오랜 시간에 걸쳐 익숙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내 가슴속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의 추함과 허무함이 표류할 뿐이다.
지킬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
갈망하고 있었다. 추억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것으로서. 인생에서 키워갈 온기를 나는 갈망하고 있었다.
이 소설 속 이기를 바탕으로, '한자와 나오키' 라는 캐릭터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보게도 된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은 대부분 영상화가 되었는데, 이 소설 또한 2000년 2월, 후지 TV에서 와타나베 켄 주연으로 TV 드라마화 되었다.
주인공의 끈질긴 추적으로 사건의 진실은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은행과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관련된 음모, 은행 안의 복잡한 파벌 싸움을 마주하게 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도 불사하는 비열한 상사와 정면 대결하게 되기도 하며, 살인을 저지르는 잔혹한 범죄자와도 맞서 싸운다.
형사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이기 씨, 이 사건은 분명 당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사카모토 씨한테서 당신이 물려받은 은행원으로서의 본능이랄까 집념이랄까 그것이 사건을 해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의 제목을 다시 생각한다. 『끝없는 바닥』 . 누구의 바닥인가. 은행과 기업의 유착이 보여주는 비리의 바닥인가, 도덕을 상실하고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바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