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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 2014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라가치 상 수상작 ㅣ 생각하는 숲 17
인디아 데자르댕 글, 파스칼 블랑셰 그림, 이정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Le Noel de Marguerite
인디아 데자르댕 글, 파스칼 블랑셰 그림
생각하는 숲 - 17
80쪽 | 526g | 222*292*11mm
출간월 : 2014년 11월
시공주니어
빨강과 파랑, 초록색 체크무늬의 크리스마스 패턴으로 띠가 둘러진 표지는 이 그림책을 포장된 선물상자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스노우볼을 들고 있는 표지의 할머니는 미소를 띈 듯 하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 한 표정이네요. 책장을 두어장 넘기자 눈이 소복히 쌓인 한 마을이 보이는군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집집마다 멋지게 장식을 하고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그런 풍경을 창문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보입니다. 책을 펼쳐들었을 때 페이지 뒤로 얼핏 보이는 면지는 선물을 감싸는 포장지마냥 멋진 배경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 섬세한 디자인은 책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증폭시켜 주네요. 세련되고 절제된 일러스트는 이 책의 또 다른 감상포인트 이기도 하지요. 부드러운 갈색 톤과 만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일러스트는 아름답고 세련된 느낌을 줍니다.

사진 속 액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가족들의 모습. 이 그림만으로도 할머니는 이 자식들을 이렇게 액자 속 사진으로만 만나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두명의 자식과 손주들이 있는 할머니를 버림받았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군요.

"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끼리 재미있게 놀아. " . 마르게리트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하죠. 자식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는게 즐겁거든요.
남편, 단짝인 친구, 이웃사촌.. 할머니 삶의 한 부분이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자, 마르게리트 할머니는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차례에 대해 살짝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다치거나 상처받을 수 있는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 채, 안전하고 익숙한 집 안에서만 생활하려고 마음 먹었어요.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갑자기 이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이 뻑뻑해집니다. 어디서인가 많이 듣던 목소리가 제 귀를 울리네요.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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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버랩 되는 장면 하나.
「국제시장」영화에 대해서 아버지가 물어보신다. 월남전을 참전하셨고, 당신의 여동생이 독일로 갔던 영화 속 배경의 산증인. 주인공만큼이나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 영화를 보고 싶어하셨다. 결혼 전에는 뮤지컬이나 영화, 콘서트 등 부모님의 문화생활을 챙겨드렸던 나였는데 어쩌다보니 자꾸 잊는다. " 아버지, 제가 예매해놓을께요. 저랑 봐요. " 그렇게 이야기 해놓고서는 아이와 함께 외출한 어느날, 전화가 왔다. 내 연락를 기다리시다가 그냥 영화관으로 오셔서 현장예매 하셨단다. 현장에 와서 평일에 티켓을 사니 경로우대도 되서 할인도 많이 되서 더 좋다시며 『 너 바쁠텐데, 괜찮다. 』라고 하신다. 가슴이 먹먹해온다.
# 오버랩 되는 장면 두울.
어머니가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었다. 2인 이상을 시켜야하는 요리인데 아버지와 두분이서 가서 드시려면 양이 많아서 남기다보니 알뜰하신 성정 상 아까워서 못가겠다고 하신 곳이다. " 그럼 엄마, 밤톨군 녀석과 함께 저랑 같이 가요~ 방학 때 점심도 해결되고 좋네~ ". 그렇게 약속한 당일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을 늦게 먹었다. 통화 중에 무심결에 내가 그런 말을 뱉은 모양이다. 『 그럼 다음에 가자, 엄마는 괜찮다. 』라고 하신다. 방정맞은 내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또 가슴이 먹먹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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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겨 책 속 일러스트를 바라봅니다. 멋진 공간인데 이렇게 적막하고 공허한 느낌이라니. 오도카니 앉아있는 할머니 옆 창에 매달려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마저 이제는 쓸쓸해보입니다. 집 안과 집 밖의 공간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며 등장인물의 감정과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변화를 보여주는 표현, 그리고 빛과 공간을 이용하는 작가의 뛰어난 솜씨에 매료되는군요. 세계 최대 규모의 어린이 도서전 중의 하나인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해마다 세계에서 출간된 그림책들 가운데 작품성과 예술성 독창성이 뛰어난 그림책을 선정하여 라가치 상을 수여하는데, 이 책은 2014년에 수상을 한 작품이지요.

시선을 수직으로 확대시켜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그림자. 그리고 다음 장의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식탁 위 음식.
앞 선 페이지에서 밀려올려진 제 속 부끄러운 기억은 이 장면에서 결국 눈물 한방울 떨구게 했습니다.


이렇게 시선의 위치를 테마로 다루어 화면을 구성한 최초의 그림책이었던 『'아기 오리들한테 길을 비켜주세요. Make Way For Ducklings(1941) 』( 로버트 매클로스키 / 시공주니어 ) 이래로 많은 그림책들이 이 기법을 적용해왔지요. 사진이나 영화 등 시작적인 매체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올 듯 합니다.
『독자가 그림책의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그림작가가 선정한 의도를 읽는 것』(그림책의 그림읽기, 현은자 / 마루벌, p60) 라고 하더군요. 한 편의 영화처럼 시선의 위치를 바꾸어 화면을 구성한 작가는 텅빈 듯한 공간을 다양한 시점에서 보여주면서 할머니의 외로움을 전하려 했던 것일까요. 글로는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진정한 속마음을요.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자동차가 고장 나 곤경에 처한 낯선 가족이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행복한 일만 있어야할 것 같은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사고. 그런데 낙심하고 슬퍼해야 할 이 가족들에게서 들려오는 노래소리.

책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던 할머니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는 이 장면. 할머니의 놀라운 변화는 이 그림책의 절정이라고 감히 이야기해봅니다. 이 책이 전하는 선물이기도 한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기적이랍니다. 이제 타인과 다시 소통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할머니의 변화는 이어지는 간결한 문장으로 명확히 표현됩니다.

할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할머니가 두려워한 것은 삶이었어요.

제게는 이 마지막 문장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회 고령화로 노인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그럴수록 세대 간의 소통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 때에 이 책은 스스로 혼자가 된 마르게리트 할머니의 삶을 함부로 동정하거나, 슬프게 여기지 않는 시선을 보여 준다. 노년기에 고독한 삶을 선택한 노인들의 삶을 동정이 아닌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작가도 이렇게 이야기 했죠. 「동정이 아닌 애정으로 내 할머니, 더 나아가 노인들의 진짜 삶에 대해 약간의 마법을 넣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부모로서가 아니라 연로하신 부모를 둔 자식으로 읽는 이 책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훗날의 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구요. 그 때가 되면 저도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조심스러운 다짐을 해보게 되기도 하지요. 물밀듯이 밀려오는 여러가지 단상들. 왜 이 그림책이 '생각하는 숲'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는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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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밤톨군 주려고 미역줄거리를 잔뜩 볶았다. 한 팩을 다 볶으면 참 많다. 그러고보니 이거 엄마도 좋아하시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동안 부모님께 반찬을 받기만 했지 내 손으로 제대로 진지를 차려드린 적이 없는 못난 딸이다. 요리솜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 나이 사십줄 넘어서까지 손수 만든 반찬 한번 챙겨드려보지를 못한 못난 딸이다.
그릇을 꺼내 미역줄거리를 한껏 담았다. 그리고 전화를 했다. " 엄마, 맛이 있을랑가 없을랑가 몰겄는뒤~ 이 딸이 뭔가 뚝딱거려본 미역줄거리 좀 드셔보실래요? 일단 밤톨군 녀석은 잘 먹으니 믿어봐도 되지 싶은데... ", " 밤톨군 다 먹이지~ 우리 줄 거 어딨다고! ", " 이거 한번 만들면 넘 많아요. 어차피 우리 식구 다 못 먹어~ 엄마도 맛 좀 보세요. 이런 기회 흔지 않아요~ " 수줍게 건네는 말에 기쁨이 가득한 어머니의 칭찬이 쏟아진다. " 우리 딸 음식 솜씨~ 한번 확인해보는겨? 아이코 좋아라. 엄마, 아빠 잘 먹을께~ 안 그래도 반찬하기 귀찮았는데 잘 되었네! "
있는 거 덜어드리는 건데, 별것도 아닌 걸 참 좋아하시니 더 민망하다. 부모님은 미역줄기가 아니라 뭐라도 챙겨드리고픈 내 마음을 받아주신거다. 나는 다른 거 뭐 드릴거 없나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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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새박사, 꽃박사」인 할머니가 자랑스럽답니다.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관심을 가지며 활기차게 자신의 삶을 즐기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저도 새삼스럽게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씁니다. 종이학을 접어 카드에 동봉하며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이야기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