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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에 선 남자 ㅣ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평점 :
마르틴 베크(Martin Beck) 시리즈의 세번째 권 『발코니에 선 남자』 에는 내가 좋아하는 북유럽 소설가 중 한 명인 요 네스뵈의 서문이 함께 한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1963년 여름 스톡홀름의 공원에서 놀던 두 어린 여자아이가 누군가에게 유인되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발코니에 선 남자』는 그 실제 사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 누군가를 특정하는 터라 결국 제목의 '발코니에 선 남자'를 주목해서 읽어갈 수 밖에 없게 한다. 제목이 스포인건가? 아니면 다른 역할이 있나?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스톡홀름의 공원들에서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발견된다. 동시에 도시 곳곳에서는 강도 상해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누군가는 보호자 없는 여자아이를, 누군가는 가방을 든 노약자를 노리고 있다.
고정적인 등장 인물들의 변화가 먼저 보인다. 2권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에서 육 개월차 신혼이던 콜베리는 2개월 뒤에 아내가 아이를 낳을 예정이다. 마르틴 베크는 아내와 사이가 더욱 나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새로운 동료인 군발드 라르손이 등장하는데, 마르틴 베크와는 상극인 듯 하다. 초반부터 '비록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까지 극소수만이 성공한 일을 해낼지도 모르는 찰나였다. 더이상 못 참고 화를 터뜨릴 정도로 마르틴 베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 말이다.'(p29) 란 표현이 등장하니 말이다.
여자아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맡은 콜베리는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녹초가 된 기분을 느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니 더욱 끔찍했을 것이다.
콜베리는 사회의 급속한 폭력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종국에 그것은 사회에 살면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만든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불과 작년 한 . 해동안만 해도 경찰의 기술력은 급속하게 상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늘 한 걸음 앞서가는 것 같았다. 그는 새로운 수사 기법과 컴퓨터를 떠올렸고, 그것들 덕분에 이런 사건의 범죄자도 몇 시간 만에 붙잡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훌륭한 기술적 발명이 관련자들에게 안겨주는 위안은 미미하다고도 생각했다. 그것들은 가령 그가 방금 남겨두고 떠나온 여인에게 어떤 위안을 안겨줄 것인가. 혹은 콜베리 자신에게.
사건은 계속 벌어지는 데 성과없는 추적은 칠 일째로 접어든다. 그 때 한 여자의 제보로 강도 상해 사건의 용의자를 붙잡고 취조를 시작한다. 이 용의자에게서 여자아이들을 살해한 사건의 범인을 목격했는지를 밝혀내려고 하고, 간신히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게 된다. 강도 상해 사건의 용의자의 취조는 군발드 라르손이 진행했는데, 함께 하던 마르틴 베크는 '막연하게 뭔가 기억이 떠오를 듯했다. 하지만 정체 모를 기억은 떠오르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p177) 이거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것 말고도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지만, 무엇인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p178) 의 상태가 된다. 군발드와 관련되어 계속 답답함이 생기는데, 마르틴 베크는 '군발드에 관해서 뭔가 꼬집어 기억이 안 나는 일이 있어'(p237) 라고 중얼거린다. 소설 초반의 군발드와 관련된 복선이 나중에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때가 되서 마르틴 베크가 왜 그렇게 답답해했는지를 알게 된다. ( 눈치 빠른 독자는 계속되는 힌트에 앞으로 되돌아가 발견해낼 테지만. )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계속 목격자들을 탐문하는 등 수사를 이어간다. 살해된 아이의 친구인 세 살짜리 꼬마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에게 받았던 지하철 승차권, 비정한 범죄자에게서 얻은 막연한 인상착의, 추적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막연한 해석 등 단서라고는 모두 구체적이지 않은데다가 심란한 것들이다.
발코니에 선 남자에서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결정하는 것이 화자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행동은 극 전개상의 필요성, 플롯의 재미, 좀더 넓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할 요량으로 주인공이 내리는 도덕적 선택 따위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 요 뇌스베
불현듯 무엇인가를 깨닫는 마르틴 베크. '마르틴 베크가 과거에 수차 이런 식의 순간적인 영감을 떠올렸고, 그것이 결국 까다로운 사건을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이번에도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p263). 마르틴 베크가 영감을 받긴 했으나, 요 네스뵈의 말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 수사의 과정이 계속 서술된다. 스톡홀름의 복잡한 골목을 헤매고, 경찰을 불신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캐내고,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을 해치워야하는 현실적인 일들이 말이다.
그들은 또 하루를 견뎌냈다. 마지막 살인이 벌어진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마지막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살인이라고 해야할까.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발 디딜 곳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휴식일 뿐임을 알았다.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밀물이 찰 것이다.
『발코니에 선 남자』 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수사 과정을 보여주기에 '소설 속 내용이 진짜 이야기라고 믿게 된다' 라는 요 뇌스베의 말에 절로 동의하게 된다. 범죄소설을 통해 사회에 숨겨진 빈곤과 범죄를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들의 집필 의도는 사회 전반과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 범죄소설작가 아카데미는 범죄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시리즈를 기념하기 위해 마르틴 베크상을 제정하여 1971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다음 편인 『웃는 경관』 은 시리즈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소설이라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