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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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자마자 한 호흡에 다 읽어버렸다. 제 1회 K-스토리 공모전 대상 수상작인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색깔을 가진 소설이다. 전반적으로 웹소설같은 산뜻한 가벼움을 품고 약간의 호러와 미스터리 장르를 보여주다가 판타지 로맨스로 마무리된다고 할까. 휴가지에서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되지 않는다

리러하

팩토리나인

인공 서주는 무너지지 않으면 다행인, 허름한 단톡주택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오래 묵은 세입자들은 하나둘 떠났고, 새로운 세입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날, 집 안에서 이상한 사람과 장면들을 목격하고 할머니가 지옥에 방을 임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옥이 요새 리모델링하느라 죄인들 둘 데가 모자란대서 빈방이랑 남는 공간 빌려주기로 했다.(p13)" 할머니의 쿨한 대답에 잠시 당황하지만 금새 긍정하는 주인공 또한 범상치 않다. 문득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도 되는 설정이다.

일상은 어지간해서는 비틀어지지 않는다. 집 앞 골목길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옆집이 야반도주해도, 보일러실 밑에서 용암이 흘러도 집은 똑같다. 복도에는 먼지가 쌓이고, 창틀은 비가 올 때마다 회색으로 흘러넘친다. 염병할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 p23

집이 지옥이에요.

비유 아닌데요. 진짜로 집에 지옥이 있다니까요. 사실 저희 집이 하숙을 해서 방이 엄청 많은데, 밤마다 비명이 들려요. 어느 방에서는 사람 손톱을 찌르는 걸 본 적도 있고요. 얻어먹은 게 있다보니 못 본 척 했지만 ...

있죠.

제 지옥에는 ...... 악마가 살아요.

비유가 아니에요. 맛있는 걸 만들어주는 악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가장 비싼 생일잔치, p95-96

생하는 이야기 속 사건의 흐름은 군더더기 없는 속도로 진행되는 편이라 이른바 고구마 전개는 없다. 주인공 서주와 할머니의 관계, 할머니 아들의 정체, 서주를 챙기고 있는 악마의 진정한 의도 등을 궁금하게 하면서 흡인력을 높인다. 서주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터라 주인공의 심리를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는데, 힘든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개그감이 충만한.. ) 그녀의 마음 속 소리들은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악마가 좋은 소리를 하면 그 이면에 통신사30개월 유지 약정 같은 함정이 있을 것 같단 말이야(p117)' 라던가 '이거 한 문장만 말해도 나에게 천만 영화 맡겨놓은 것처럼 구는 인간들이 우글우글했는걸. 거기에 스릴러와 막장까지 뒤섞어 아침드라마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필요는 없지(p85)' 등 현실 속 웃픈 장면들을 끌어들인 표현들에 저절로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대화에서 느껴지는 악마의 캐릭터는 천진난만하다. "가능하면 비유를 안 하려 했는데, 아예 안 쓰자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공기업 직원 같은 거죠. 잘리지 않는데,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해주고 직원들 배치 뺑뺑이 돌리는 것까지 닮았어요(p152)", "칼 맞기 직전, 이렇게 말하긴 했어요. '힘드셨겠다', 이건 인간을 상대하는 공감의 화법. '건강하게 오래,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건 세입자로서의 깔끔한 마무리. 여기에 문제가 있을까요?(p167)"

경쾌한 어조에도 주인공 서주의 결핍, 외로움은 절절하게 느껴진다. 온갖 기묘한 세입자들을 만나고, 매 계절 다양한 형태로 난장판이 되는 집을 마주하며 그걸 수습하는 게 일상이 되고, '이 썩을 집' 이라고 부르지만 어느 순간 낡고 삐걱대는 집, 늙고 삐걱대는 집주인 그 두가지를 잃을까봐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할머니 아들과 관련된 중심 서사의 진행 속에 간간히 밝혀지는 서주의 인생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세입자로 들어온 악마라니. 이 설정은 판타지 로맨스의 전형적 클리셰로 느껴질 수 있음에도 미스터리, 호러 적 장치와 현실적 배경이 더해져서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필명이 독특하다. 작가 소개를 보니 '리러하' 는 늑골(rib), 폐(lung), 심장(heart) 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를 한 조각씩 떼어 와 지은 필명으로 '어떤 식으로든 가슴에 닿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는 생각을 직접적인 단어를 빌려 기억하고자 했던 작가의 마음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작가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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