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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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을 읽고 났을 때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해 안쓰러움을 동반한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인가 작가의 비밀을 공유받고 있다는 느낌에 왠지 작가를 공감해주고 이해해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은 이번에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 를 읽을 때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자기 고백적인 내용과 문체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달려라 메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단편 『도쿄 팔경』 에서 작가는 십 년간의 도쿄생활을 그때그때의 풍경에 내맡겨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제법 점잔 빼는 얼굴을 한 삼실 줄 남자' 가 된 그는 '청춘에 대한 결별 인사로서, 아무한테도 알랑거리지 않고 쓰고 싶었다'(p88) 이라고 고백하고도 있다. 책 속에서 H라고 언급된 전부인 오야마 하쓰요와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처녀작인 <추억> 이라던가, 스스로 유서라고 불렀던 <만년>, H와 온천으로 죽으러 갔을 때의 경험을 담은 <우바스테> 의 작품들이 나온 배경들을 알 수 있게 된다. H와 헤어지고 다시 중매로 결혼한 후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생활을 보내던 그는 스스로를 '한 사람의 원고 생활자'(p113) 라고 표현한다. 



후대에서 '서른 살의 다자이 오사무는 결혼을 계기로 인생과 문학 모두에서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평한다. 질풍노도의 청춘을 뒤로하고 가장이자 직업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다자이의 문학 세계는 이 시기에 한층 다채로워졌다고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


결혼한 이후에도 그는 여러 내연녀들을 만났다. 덕분에 나는 자신의 치졸함을 감추지 않는 그의 자기고백들이 스스로의 방탕함에 대한 교묘한 자기합리화처럼 읽혀질 때도 있다.  「비용의 아내」 를 읽다보면 소설은 픽션이나 작가의 삶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술 때문에 엄청난 빚을 지고 늘 바람을 피우는 방탕한 소설가 오타니에게서는 작가의 모습이, 그런 못난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감싸안는 아내는 다자이 오사무의 부인 이시하라 미치코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말년의 다자이 오사무와 3명의 아이들을 보살폈건만 다른 여성과 동반 자살하는 모습을 봐야했던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비용의 아내」 는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일본 영화가 떠오른다. ( 2009년은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이라 영화, 애니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작가를 기린 듯 하다. ) 원작을 읽은 후 함께 감상해도 즐거운 시간이 될 듯 하다. 



표제작인 「달려라 메로스」는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일본의 국민소설이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작품을 원전으로 한다. 주인공인 메로스는 포학한 폭군 디오니스 왕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붙잡히고, 여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처형 전 사흘의 여유를 부탁하게 된다. 왕에게 자기 대신 친구 세리눈티우스를 인질로 데리고 있으라고 하고 떠났다가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돌아온다. "달리는 거야! 신뢰받고 있으니까. 달리는 거야! 제시간에 도착하는지, 못 하는지가 문제가 아냐. 사람 목숨도 문제가 아냐. 난 어쩐지 훨씬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를 위해 달리고 있어!" (p65)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 다자이 오사무와 친구인 단 가즈오 사이에서 있었던 '아타미 사건' 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친구와 술을 마시던 다자이 오사무가 돈이 다 떨어지자 돈을 구해오겠다고 떠나놓고서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 기다리다 지친 친구가 다자이 오사무를 찾았더니 그는 돈을 빌리려던 스승과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자 "기다리는 사람이 괴로울까,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괴로울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문장은 2009년,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한 일명 <푸른문학 프로젝트> 속  「달려라 메로스」 의 프롤로그로도 등장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집안의 십일 남매 중 열째로 태어났다.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라는 사실에 평생 동안 부끄러움을 느꼈던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돈 많은 지주 가문이어서 오는 죄책감, 의지박약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 부정이나 패배의식, 인간에 대한 자조와 사회에 대한 분노 등을 재료로 삼아 문학으로써 승화시켰다. 이는 패전 이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 작가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데카당스 문학’ 의 대표 작가로도 불린다. 위키에 따르면 데카당스(Décadence)는 단어 자체는 '퇴폐', '쇠락'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 시작한 문예사조에서 '퇴폐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예술적인 것'을 지칭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전후 혼란해진 일본 사회를 반영하는 문학을 일컫는 말로, 전후 세대의 실존적 허무를 다룬 소설들이 포함된다. 기존의 사회 규범이나 도덕에 대항하고자 하는 경향이란 면에서 전체주의, 군국주의를 강요했던 당시 일본사회에서 개인의 실존을 이야기하는 것은 꽤 '데카당스' 적이었나보다. 


<혹부리 영감>, <우라시마 씨>, <카치카치산> 등을 포함한 「옛이야기」 편은 작가의 각색으로 더욱 재미있어진 듯 하다. 용궁에 다녀온 우라시마씨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 같은 용궁 선녀의 선물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삼백 살이 되어버리는 <우라시마 씨> 이야기 속에서 "세월은, 인간의 구원이다. 망각은, 인간의 구원이다" 라며 "일본 옛이야기는 이처럼 깊은 자비심이 있다" (P189) 라는 문장에 담긴 작가의 유머에 함께 웃었다고 할까. 


 「달려라 메로스」 에 담긴 단편들은 원작 소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른 컨텐츠들이 많아서 더욱 즐거운 독서가 된다. 단편집이기에 출퇴근 길에 짧게 한 편씩 읽기에도 좋았던 소설집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접하는 이도, 이미 다자이 오사무의 팬인 독자에게도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이 책을 선물해준 책친구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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