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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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43명의 승객(승무원을 포함하여)을 태우고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에어프랑스 006편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은 후 무사히 착륙한다. 그리고 세 달 뒤 6월,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관제탑에 구조신호를 보낸다. 비행기와 기장의 이름을 확인한 관제탑은 혼란에 빠져들고, 곧 북미 방공 사령부(NORAD) 가 개입하며 국가안보의 문제를 적용하여 특수한 프로토콜 42를 실행시킨다. 프로토콜 42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아노말리

L’Anomalie

에르베 르 텔리에 장편소설

민음사



「아노말리」 는 초반부부터 여러 시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등장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 서로 연관없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는지, 또 그들의 이야기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며 추리하듯이 읽어보게 된다. 이후 미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서야 왜 그들이 등장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6월에 착륙한 승객들은 자신들이 6월에 착륙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3월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사' 되었다. 3월에 먼저 착륙한 자신이 존재했던 것.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이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6월의 비행기를 뉴저지 공군 기지로 비상착륙 시키고, 과학자들을 소집하여 원인을 밝히려고 애쓴다. 과학자 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인들, 철학자들도 모여 다방면으로 분석하지만 다양한 가설만 세울 수 있을 뿐 뚜렷한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 이 과정은 SF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노말리」 는 ‘이상’ ‘변칙’이라는 의미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어? 당신이 둘이라는 걸?” 소설 속 이 대사가 작품의 주제를 보여준다. 소설은 뉴욕에서 파리로 비행기를 타고 온 인물들이 3개월 후 똑같은 여객기를 타고 온 자기의 분신과 만난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SF 장르가 흔히 구사하는 사고실험이다.



조르주 페렉,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마르셀 뒤샹 등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들이 포함된 문인 집단 울리포(OuLiPo, 잠재적 문학의 작업실) 의 일원인 에르베 르 텔리에는 '제약(contraintes)을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 을 이 책 「아노말리」 에서도 구현해낸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문인과 수학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문학적 실험 집단인 울리포는 일견 창작의 자유를 방해하는 듯 보이는 제약(contraintes)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문학을 일상적 기능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내려고 했다고 한다. 수학, 과학, 생물학, 음악 혹은 뚜렷한 규칙성을 띠는 놀이 등에서 제약을 찾아내 창작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일정한 규칙을 세운 후 그에 따라 글의 형식과 구조를 변형하는 문학 실험이  「아노말리」 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을지 궁금해하며 읽게 되기도 했다. 좀 더 검색해보니 현재까지 울리포 공식 웹 사이트(www.oulipo.net) 에 등재된 잠재문학 작가들은 서른여덟 명이라고.



물론 이런 문학적 실험을 분석하고 찾아내지 않더라고 이야기의 서사만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이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3월과 6월의 인물로 나뉘어 3개월 간의 시간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이후 각자의 삶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지켜보게 된다. 겉으로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실제로는 청부 살인 업자인 블레이크, 시한부를 선고받은 비행기 기장 데이비드 마클,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뮤지션 슬림보이, 한때 사랑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앙드레와 뤼시, 엄마에게도 말못한 비밀을 가진 어린 소녀 소피아와 엄마인 에이프릴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인물들간 관계들의 양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몰입하게 한다. 작가가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서로 다른 문체를 사용하는 형식실험을 시도했기에,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 되고,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되며, SF 와 철학을 넘나들기도 하는 단편들이 모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아노말리」 는 등장인물들 중 하나인 소설가 빅토르 미젤이 쓴 소설이기도 하다. 이런 문학적 장치 또한 재미있다. 



작가는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내 자신의 분신과 대면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라며 “자신의 분신과 대면할 때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여덟 명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라고 말하고,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각 인물들의 특징에 맞는 문체로 텍스트 구현했다”며 “살인 청부업자 이야기는 스릴러 법칙을 지켜가면서 썼고, 작가 이야기는 문학분석적 장르로 만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분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다보면 살짝 결은 다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Double)」 , 그리고 다비드 칼리 글, 클라우치아 팔마루치의 그림책 「누가 진짜 나일까(Le Double)」 도 떠오른다.  「아노말리」 에서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 인물들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주인공 골드랴낀과 비슷한 과정을 겪은 인물은 누구일까 생각도 해보고( 비슷하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 실제로 내가 나의 분신을 마주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게도 된다.  「아노말리」 속에서 소설가 빅토르 미젤과 인터뷰를 진행하던 한 방송인은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일단 비현실적인 기분이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존재 여부가 의심스러우면 볼을 꼬집어 보는 걸로 충분하죠. 그리고 또 하나의 나는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는 거울 같지만 내 비밀까지 다 아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노출이 되면 나는 변화 혹은 도피를 결심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삶에 둘이 있으면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뜻이죠. 틀림없이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아, 다 허무하구나, 아파트, 직장, 물질적인 것 전부가.... 내면의 알맹이, 온 힘을 다해 지켜야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요.


- p435~436,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자신이 가상이 아닌가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부분은 영화 <매트릭스> 가 저절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시간이 착각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한 세기도 거대한 컴퓨터 프로세서에게는 찰나에 불과할까요? 그러면 죽음은 뭐죠? 그냥 한 줄 코드상의 '엔드(end)'?


- p281



 「아노말리」 는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드물게 밀리언 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 참고적으로 지금까지 공쿠르상 수상작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이라고. ) 공쿠르상(The Goncourt Prize) 은 1903년 제정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 상으로, 프랑스의 아카데미 공쿠르(Academie Goncourt)가 "그 해 최고의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 과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문학상, 맨부커상과 함께 세계 3개 문학상 중 하나로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공쿠르(Edmond de Goncourt)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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