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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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장편소설

열린책들



심장병이 악화되어 죽음이 가까워지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기로 마음 먹은 한 철도 공무원이 등장한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하나씩 삶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유년기와 학창시절, 대학을 중퇴하고 철도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와 결혼, 가정 생활이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된다. 매우 일반적이고 큰 우여곡절은 없는, 주변에서 다들 경험했음직한 인생 궤적이 펼쳐진다.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그런데 주인공의 내면에서 또 다른 자아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정말 평범한 인생이냐고. 주인공은 자신이 써놓은 것들이 온전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독자에게도 인간의 삶이란 결코 겉으로 보이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다시 생을 되짚어간다. 앞에서 묘사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다른 시선에서 표현된다. 그는 스스로에게 평범한 인간, 억척스러운 인간, 우울증 환자 라는 자아들이 있었음을 깨닫고, 계속해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다른 자아들을 마주한다. 때로는 낭만주이자가, 때로는 영웅적인 자아가 등장하는 식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항상 내면에 존재하며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다중인격이나 정신분열이 아닌 '평범'한 일이지 않을까. 나 또한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자아가 공존한다. 가끔 난 스스로에게 '카멜레온 같은' 이란 수식어를 붙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은 또한 자기 내면의 모든 자아들은 다 어떤 순간을 계기로 어떤 사람의 영향으로 생겨난 경우들이라는 것 또한 깨닫는다. 나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되뇌이기도 하고, 그 많은 자아들을 조상들의 흔적과 연결시켜 보기도 한다. 즉 ‘나’라는 한 사람은 단독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상들의 일부의 총합 혹은 그것들이 여러 조합으로 모인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네가 될 수 있었던 모든 걸 잘 보라.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 각각의 속에서 네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놀랍게도 너의 이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어쩌면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



작가는 주인공의 이런 과정을 통해 다른 이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내면에 대한 관찰과 분석이 다시 타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과정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삶에 숨겨져 있는 다양하고 섬세한 면면들이 새삼 놀랍다.


'내면의 모든 존재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은 곧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다.' 라는 것은 카렐 차페크가 다른 작품에서도 강조하는 휴머니즘이다. 「평범한 인생」 이 카렐 차페크 작품 들 중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말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면이 아닐까. ‘나’ 혼자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가 ‘우리’ 라는 것.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무수히 많은 자아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자아들은 사람들끼리 서로 비슷한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평범하다' 는 뜻은 어떤 뜻일지 궁금해졌다. 검색해보니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예사롭다.(흔히 있을 만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대나 문화에 따라 평범함이란 정의는 달라지지 않던가.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평범한 인생' 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다른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 또한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인공의 입을 빌어 전하는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범한 인생이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고 외치는 듯 하다. 



「평범한 인생」 은 「호르두발」, 「별똥별」 에 이은 차페크의 ‘철학 3부작’ 소설의 마지막 작품이며, 세 소설은 각자 독립적인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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