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어느새 입춘이 지났다. 그래도 거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남아있다. 꽃샘추위가 오면 눈이 한 두번 더 올까.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표지의 눈송이를 들여다보며 이번 시즌의 마지막 눈을 궁금해해본다. 햇볕이 나 있을 때, 잠시 오다가 그치는 눈인 여우눈이 내리지 않으려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의 여우눈 에디션을 읽으며 해보는 생각.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

세계사



박완서 작가의 소설도 좋아하지만, 생각해보면 에세이를 더 즐겨 읽어왔다.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 을 사랑한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가 이야기하는 희망과 사랑의 기운이 오롯이 다가와 ‘나도 따뜻한 사람일까’ 란 생각도 슬며시 해보고,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란 포부도 품어보게 한다.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쓴 660여편의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중에서 추려진 35편의 글들이 ‘마음이 낸 길’, ‘꿈을 꿀 희망’,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 ‘사랑의 행로’, ‘환하고도 슬픈 얼굴’, ‘이왕이면 해피엔드’ 의 여섯 장에 나뉘어 담겼다.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는 자신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글을 쓰게 된 것이 자신의 시골뜨기 근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며 고향에 감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작가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켜나 있음을 차라리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고, 와중에 있는 것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더 잘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는 작가는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 할 때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 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p236,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어디론가 여행을 다녀온 후의 에피소드인가 하며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잃어버린 여행가방' 편은 들려주는 이야기의 구성에, 생각의 흐름과 깊이에 감탄을 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주인없는 분실가방들의 경매 이야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작가가 가방을 잃어버렸던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일까만 궁금해했던 나는 작가의 가슴앓이의 이유를 알게 되자 깊게 공감했다. 


만일 누가 그 가방을 연다면 더러운 속옷과 양말이 꾸역꾸역, 마치 죽은 짐승의 내장처럼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나올 것이다. (...) 나의 그 큰 여행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내 여행가방을 연 속 검은 사람의 기대와 호기심은 단박 실망과 경멸로 변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우연히 가방을 주웠든 혹은 정말로 속이 검었든 간에 내 가방을 열어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경멸했을 생각을 하며 오랫동안 심한 수치감으로 괴로워했다. 


- p246, 잃어버린 여행가방




그리고 노년의 작가는 이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이 떠난 뒤에 남을 집과 가재도구를 걱정한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이 아닐까"(p246) 라는 문장에 또 다시 감탄한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p247) 라고 한 작가는 이제 자신의 육신을 여행가방에 비유한다. 우리 주변의 흔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인간 본연의 도리에 대한 이야기로 엮어내는 솜씨가 정말 탁월하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 p247





아들을 먼저 앞세워 떠나보낸 후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는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에서 작가가 절절히 토해낸 문장들은 머리가 아니라 그대로 마음으로 전해진다. 필사를 해보고 싶은 문장들 또한 가득하다. 


인간의 목숨이란 이렇게 치사하다. 참척의 고통은 인간이 질 수 있는 고통의 무게의 극한이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도 죽음만이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그게 여의치 않자 그 다음엔 저절로 죽어지려니 했던 것도 그 고통의 무게에 압사당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 나를 강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각자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은 결코 주지 않는다는 말은 역시 맞는 말이었다. (...) 때때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처연해지곤 한다. 


- p260,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던 작가는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지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가 없으면 미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p264) 라고 글을 맺는다. 



박완서 작가가 타계한지 10년이 지났다. 1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에 대한 행사들이 개최되고, 책들이 리뉴얼 되서 다시 나온다. 나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를 읽는다. 일상에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는 그의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 일상에도 빛이 더해진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결코 쉽게 쓰일 수 없는 문장들이 쉽게 읽힐 때, 어떤 배려 깊은 다정함도 함께 읽게 된다.' 라고 하던 임현 작가의 말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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