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1974년 2월 4일, 당시 미국 언론을 좌우했던 언론 재벌로, 영화 <시민 케인>의 모델이기도 했던 윌리엄 허스트의 손녀가 SLA에 납치된다. 


SLA는 Symbionese Liberation Army 약자로 ‘공생(共生)해방군’으로 불린다. SLA의 심바니어즈 Symbionese는 서로 다른 종이 함께 존재한다는 공생의 의미인 심바이오시스 Symbiosis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직의 리더인 도널드 데프리즈는 무장 강도로 복역하던 중에 급진 정치범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였고, 결국 탈옥한 후에 조직을 결성하였다. 경쟁과 사적 소유에 반대하고, 인종주의와 성차별 노인차별 파시즘 개인주의에 맞선다는 것을 표방하며, 자본주의 국가 타도를 외치던 '흑인해방, 여성해방 극좌파 통일전선'으로 시작했지만, 사회와 체제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장한 소규모(조직원 12명) 집단은 살인과 강도 짓을 일삼았던 터라 '극좌 모험주의 테러집단'이라는 평도 받았다. 

 


jtbc 뉴스룸

 


jtbc 뉴스룸

 

SLA의 멤버들은 본명을 버리고 영어권과는 거리가 먼 이름으로 바꾸었다. 패트리샤 허스트도 SLA에 가입한 후에 '타니아'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타니아'는 체 게바라와 함께 볼리비아 내전에서 죽은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혼혈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동료가 되어 함께 은행강도를 하다 체포가 된다. FBI 리스트에 기재된 퍼트리샤(패티) 캠벨 허스트(Patricia Campbell Hearst, 1954~) 의 직업은 ‘도시 게릴라’ 였다.

퍼트리샤 허스트가 납치된 후 납치범들과 동조한 행위에 대해 '스톡홀름 신드롬'에 의한 피해자라는 의견과 자발적인 참여였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저자의 궁금증은 이 소설 「17일」 을 낳았다. 과연 퍼트리샤의 전향은 SLA에 의한 세뇌였을까, 자유의지의 결과물이었을까. 

 



17일 
롤라 라퐁 지음  
문예출판사 


소설은 퍼트리샤의 범죄 행위가 SLA에 의해 세뇌당한 결과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단에 고용돼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할 보고서를 만드는 미국 교수 진 네베바를 가상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진 네베바는 자신을 도와줄 비올렌이라는 여학생을 고용한다. 화자인 '나'는 유년시절부터 비올렌을 지켜보며 그녀의 영향 아래 성장한 인물로, 이 두 명의 과거를 한 걸음 너머에서 다시 쫓아가며 그들이 진행했던 작업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하고 있다. 즉, 이야기는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진 네베바와 비올렌의 조사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묘사된 퍼트리샤 허스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담으면서, 시간이 지난 후 그 과정을 들여다 본 화자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퍼트리샤 허스트가 누구인지, 즉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테러리스트인지, 아니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대학생인지, 아니면 진정한 혁명가인지, 아니면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겠지만 삶의 의미를 못 찾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불쌍한 여성인지, 아니면 그 좌파의 신념을 신봉하게 된 평범하다 못해 어딘가 좀 모자란 인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종당한 좀비인지, 혹은 분노하여 미국이라는 나라를 공격하는 젊은 여성인지를 2주일 안에 밝혀내야 했던 것입니다. 
- p26

 

진 네베바와 비올렌은 퍼트리샤가 남긴 음성 메시지와 사진, 당시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해 퍼트리샤의 변화 뒤에 숨은 힘을 추적한다. 언급된 사진, 언론보도 등은 실화에 기반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문장이 묘사하는 실제 사진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이 모습 뒤에 누군가가 있나요? 타니아에게 경직된 미소를 짓게 한 그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그녀에게 두 다리를 벌린 채 언제 어느 때라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사방을 경계하는 총잡이의 포즈를 취하라고 가르쳐준 것일까요? 그 누군가가 그녀의 손가락 위치를 하나하나 가르쳐준 것일까요? '이거, 금방 배울 수 있어. 이 세상에 스스로 깨우칠 수 없는 건 없어. 자, 오른손으로는 개머리판을 잡고 손가락은 방아쇠 위에 올려놔. 그리고 왼손으로는 탄창을 꽉 움켜잡아.' 그 누군가가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을 겁니다. 그 누군가가 제대로 다려지지 않은 카키색 군복 상의의 첫 번째 단추를 풀라고 시켰을 겁니다. '여기는 수녀원이 아니니까 맨살이 좀 드러나도 상관없어' 

<중략>

그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 지시하거나 그녀 대신 결정을 내린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타니아 자신이 그 붉은 색 천을 골라서 직접 벽에 고정시킨 다음 SLA 상징인 일곱 개의 코브라 머리 깃발 앞에 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의 포즈를 취해봤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포즈도 취해보고 저런 포즈도 취해보던 그녀는 결국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몸무게를 두 다리 사이에 분산시켜 넓적다리를 살짝 벌리고 외전근을 팽팽하게 당긴 다음 배를 꽉 죄고 거기에 개머리판을 고정시키는 자세를 취한 뒤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셔터를 누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 p180-181

 


패티 허스트가 LA 방송국에 배포한 자신의 사진

 

타니아 즉 퍼트리샤 허스트는 자신이 SLA의 일원이며 대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성명을 담은 녹음 테이프와 사진을 LA 방송국에 배포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포스터로 만들어져 수천장이 팔리고, '프루트 오브 더 룸' 티셔츠에 복사되어 1976년 가장 많이 팔린 사진이 되었다고. 그리고 책 속의 진 네베바는 이 사진을 '죽음에 대한 팝아트' 로 규정한다. 즉 손쉬운 유혹의 힘에 대한 투쟁을 보여주는 타니아의 섹시한 사진을 미국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했다는 것. 

 

퍼트리샤 허스트의 이야기는 곧 혁명가 신케와 그녀의 약혼자, 그녀의 아버지 등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던 남자들 사이에 끼어 꼼짝 못 하고 발버둥친 한 젊은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p297

 

그들이 퍼트리샤의 선택이 세뇌도 악마화도 아닌 그녀의 자유의지라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는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언급되고 있다. 1704년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인질로 잡혔던 백인 여성들 중 일부가 “제발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지 말아 달라”며 인질로 남길 원했던 사례가 그 한 가지다. 이들은 원주민과 지내는 동안 ‘가정과 성경에 얽매여 살고 아무도 의견을 묻지 않았던 피조물’에서 벗어나 야영지에서 불침번을 서고 숲에서 나무를 주우며 자유와 책임을 경험했기에 자신의 의지로 인질이 되길 택했다고 한다.

 

진 네베바는 한 여성잡지에 유망한 여성 50인으로 실렸으며, 박학다식한 괴짜이자 독설가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또한 1970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시위에 참가해 체포된 이력에, 스미스칼리지에서 최초로 학위를 받았다가 이후 정치적 선전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학위를 박탈 당하기도 했다. 그런 진 네베바가 사건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곧 19살이 되어가는 조수, 비올렌에게 미친 영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올렌이 진 네베바를 잊지 못한 것에 비해 진 네베바는 자신의 조수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서른 일곱살 무렵의 화자는 미국으로 가 일흔 두살의 진 네베바 교수를 만나 질문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신의 미래를 담고 있을까요? 만남이란 결정적인 것일까요? 선생님은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지요. 선생님은 자신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선생님은 그들 중 일부가 선생님께 지난칠 정도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반대로 그 일부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걸로 보아 선생님의 가르침이 그들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 p308

 

'퍼트리샤 허스트 납치사건을 다뤘다' 라는 정보만으로, 실제로 일어났던 자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물이거나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은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의 「나의 살인자에게」 /(다산책방) 처럼 실화를 재 구성한 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후 해당 사건은 소재였을 뿐, 내가 책 속에서 건져낸 단상들은 '여성이 돌봄의 주체나 유순한 자녀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 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헤쳐와야 했는지와,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퍼트리샤 허스트의 사연은 스톡홀름 증후군의 대표적인 사례로도 인용되지만, 유전무죄의 사례로도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마지막에 그 점을 살짝 언급하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잠시라도 '타니아' 로 대표될 수 있는 어떤 목소리와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퍼트리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치지요. 하지만 그녀는 부자였기 때문에 이번 재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거예요. 허스트가는 퍼트리샤가 석방되도록 애썼고 1979년에는 캠페인까지 해서 성공을 거두었어요. 카터가 그녀를 특별 사면해주고, 클린턴이 복권시켰지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이런 특혜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많은 미국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가벼운 죄를 짓고도 감방에서 몇 년씩 썩어야 하는데 말예요... 하지만 허스트가는 현실을 자기네 독자들의 욕망에 맞추는 그런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어요.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퍼트리샤가 감옥에서 나오던 날 10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미소와 '용서해주세요' 라고 쓰인 티셔츠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겼지요. 말하자면 퍼트리샤는 타니아를 땅에 묻는 동의한 거예요. 그렇지만 타니아가 존재했던 건 사실이죠.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 p307, 진 네베바 교수의 말 중에서

 


 

한 사건에 대해 퍼트리샤 허스트, 진 네베바( 그리고 비올렌), 그리고 화자에 이어지는 세 여성의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으로서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책 모임의 사람들과 독서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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