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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소설가 고(故) 박완서 님을 표현하는 수식어들은 참 많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의 이야기꾼' 이라는 소개였다. 오래 전에 회사 사보에 박완서님의 책을 한 권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 빌려왔던 표현이었는데 이후로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이 다가온 적이 없었던 듯. 이번에 개정되어 나온 작가의 첫번째 짧은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을 읽으며 다시 한번 그 수식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1970년대의 평범한 삶을 담아낸 콩트인데도 그리 세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세대를 뛰어넘는' 에 방점을 한번 찍고, 단편소설보다 짧은 분량임에도 꽉찬 내용을 읽으며 '이야기꾼' 에 밑줄을 좌악 치게 된다.
명절 동안의 기름 냄새에서 (드디어!) 벗어나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표지의 유선 전화기, 빗통 그리고 분명 검은색일 자개화장대가 정겹다. 양가에 비슷한 가구가 남아있었는데 얼마 전에 다들 정리해버리셨다. 검은색 자개장 옆에서 책을 함께 찍어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낡은 70년대 풍( 정확히는 90년대 제품이지만 ) 안락의자 위에라도 두고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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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지금과 비슷한 일상의 풍경인 것은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이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서 그럴까. 이를테면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그 시절의 아파트 건설, 부동산 투기 등의 개발 열풍의 모습을 담고 있는 콩트들, 「땅집에서 살아요」(p139), 「아파트 부부」(p149), 「아파트 열쇠」(p174) 는 부모님 세대에서 들었던 여러가지 푸념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면서도, 아파트에 사는 내 주위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특히 「아파트 열쇠」에 나오는 '사십 가까운 나이까지 직업을 가질 만한 세속적인 이유 없이도 직업을 가진 여자들' 의 모습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 서글펐다. '자신만만하고 생기발랄하고 나이보다 젋고 건강하고 말 잘하고 잘난 척 하기 좋아한다' 는 그녀들이 가진 '여편네 노릇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열등감. 세월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가.
여편네 티를 극복했다는 긍지와 여편네 노릇도 못하고 있다는 열등감은
백지장의 표리처럼 결국 같은 거였고
우린 '열심히' 한 면만을 강조하고 한 면은 무시하려는데
김 교수는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쪽을 팔라당 뒤집어 여봐란 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 p179, 아파트 열쇠
이번에 개정판이 나오기 전의 부제가 '바늘구멍으로 엿본 바깥세상 이야기' 였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콩트 쓰는 맛'을 방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눈에 거슬렸지만 일부러 고치지 않았다고 했다. 70년대에 썼지만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적어도 이삼십년은 앞을 내다보았다고 으스대고 싶은 치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그래서였나보다. 오늘날과 소설 속 모습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읽게 되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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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덕분에 나도 바늘구멍으로 주변 이웃들을 엿보는 기분이었지만, 주변의 이야기가 금새 나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책을 읽는 내게 나는? 내 가족은? 이란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기도 한다. 특유의 위트와 풍자가 발휘된 콩트 속 표현들에서 우리 문학사에 그녀가 쌓아올린 언어의 보고가 이 때부터 시작된 거였구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같은 여성으로서의 시선에서 숨겨진 내 속내를 들킨 듯 해서 깜작 놀라기도 했다. '서로 쥐고 쥐이는 결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결혼을 꿈꾸며 우선 서로 어른이 돼야 할 것 같다는 깨달음' (어떤 폭군, p353) 은 결혼을 앞두고 내가 했던 생각이었으며, '여자란 여자로 길러지는 걸까?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는 걸까' (아파트 열쇠, p179) 는 친구들과 늘 나누는 이야기이다. 외래어 노이로제 때문에 '애니 커트, 써쎈느 커트' 로 알아들은 커트가 실은 '언니 커트, 선생님 커트' 였다는 것(외래어 노이로제, p269) 은 모양만 달리할 뿐 나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로 정말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외래어 뿐만 아니라 여러 신조어들을 알아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의 흔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인간 본연의 도리에 대한 이야기로 엮여내는 작가의 내공에 감탄을 하며 읽었다. 사람이 사는 방식과 지켜야 할 도리가 과거나 현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설사 그 겉모습이 변화했을지라도 다른 모습으로 통하여 계속되는 것들도 분명 있다. 그런 것들을 캐내어 우리 앞에 펼쳐내어준 작가님께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