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꽃과 나무의 정령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소박한 식탁에서 수제로 만든 흑빵을 즐겨 먹고, 일생동안 손에 맞춘 뜨개 장갑과 함께 하는 곳.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루프마이제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한 편을 읽어본다. <츠바키 문구점>의 작가 '오가와 이토'가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에서의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루프마이제공화국은 라트비아의 문화와 역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나라이다.  이런 판타지적인 배경에 경어체의 문장과 아름다운 삽화가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글,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작가정신



이 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뜨개장갑. 책 속에는 '엄지장갑' 이라고 표현이 되어있다.  '엄지장갑은 그 사람을 지켜주는 부적 같은 것(p48)' 이라고 한다.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주인공, 마리카의 일생에도 항상 특별한 장갑들이 함께 한다. 마리카가 태어나서 처음 끼게 될 엄지장갑은 할머니가 새빨간 털실을 골라 정성스레 떠주셨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매년.


엄지장갑이면 벙어리장갑일까.. 나름대로 그 이미지를 상상해본다. 마침 아이의 그림책 굿즈로 함께 나온 가방과 엽서가 눈에 띈다. ( 그림책 이름도 '장갑' 이라지. 우크라이나 민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다. ) 마리카가 처음 낀 장갑은 이런 모양이었을까. 



엄마의 소설과 밤톨군 그림책의 콜라보


루프마이제공화국에는 중요한 규칙이 있다. 아이들이 열두 살이 되면 누구나 수공예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남자 아이는 접시를 만들고, 바구니를 엮고, 못을 박을 줄 알아야 한다면, 여자 아이는 실을 잣고, 수를 놓고, 레이스를 달고, 엄지장갑을 뜰 줄 알아야 한다고.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마리카는 바느질도 뜨개질도 싫습니다. 엄지장갑도 뜨고 싶지 않습니다. 

그보다 밖에서 노는 것이 백배는 더 즐겁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엄지장갑이나 뜨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p46, 제 2장 축하의 술, 시마코프카

귀찮고 싫었던 일이 마리카가 성장하고, 삶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삶의 기쁨으로 변한다. 


어느덧 따뜻하고 아름다운 엄지장갑을 뜨는 일이 마리카에게는 삶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p149, 5장 도토리 커피를 마시며


마리카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엄지장갑이 함께 했기 때문일까. 첫사랑에게 떠서 선물하고, 청혼을 수락하고, 소중한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랬던 순간마다 함께 했던 장갑들. 마리카의 삶 속에서 변화하는 장갑의 의미들이 파란 많지만 따뜻하고 행복했던 그녀의 삶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엄지장갑은 털실로 쓴 편지 같은 것' - p63


'마리카의 엄지장갑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 - p119


'직접 손을 잡아 줄 수 없어 엄지장갑을 떠서 선물하는 것입니다. 엄지장갑은 손의 온기를 대신 전해주는 마리카의 분신입니다. ' - p149


'마리카는 울퉁불퉁한 마음결을 가지런히 한다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엄지장갑을 떴습니다.' - p175


루프마이제 공화국이 얼음제국에 점령되면서 연행되어버린 남편 대신 돌아온 진흙투성이의 엄지장갑 한짝. 마리카는 희망을 잃지않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날. 


마리카는 자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입니다.

야니스도 그렇습니다.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람과 빛과 비와 무지개와 흙과 나무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 p193, 마지막 장 엄지장갑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엄지장갑을 떴던 마리카는 이제 자신을 위한 장갑을 뜬다. 연회색과 분홍색, 초록색의 털실을 골라 꽃무늬 엄지장갑을 뜨기 시작한다. 항상 전통적인 문양의 엄지장갑만 뜨다가 이제는 사과꽃을 모티브로 하여 아르누보 느낌의 귀여운 엄지장갑을 만든다. 항상 스스로보다는 다른 이들을 먼저 챙기게 되다보니 살짝 지쳐있는 지금의 '엄마, 아내, 며느리' 로서의 내게 훅 와닿는 장면. 그리고 '자기를 마주하면서..' 라는 책 속의 글귀와 더불어 작가의 인터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장갑은 자신과 마주하면서 털실로 써내려가는 편지



별책부록으로 끼워져있던 작가의 인터뷰와 더불어 책 뒷면의 '일러스트 에세이' 는 이 책의 여러 등장 요소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했다. 마음을 가득 채운 여행에서 이런 멋진 소설로 탄생되는 과정을 알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흑백의 삽화가 색을 입고 나타난 마지막 페이지에서 문득 생각했다. 내 삶에 있어서 소설 속의 '장갑' 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책' 과 '글' 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을 챙긴다고 투덜대고 있지만, 

나를 위한 장갑을 뜨고 있었다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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