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마호로 역 시리즈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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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면 종종 소설 속 장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명한 작품 속 장소가 여행지 목록의 순위에 드는 이유일 것이다. 주인공이 거주했던 공간, 거닐었던 거리를 걸어보며 작품을 다시 음미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아마 역사적 장소보다 더 사랑받으리라.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다와 교텐의 심부름집에 맡길 일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도쿄와 인접해있는 마호로 시. 마호로 역 골목에 다다 심부름집이 있다. 거창한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에서부터 헤어진 남자 친구 떼어내기, 어린아이 학원에서 집까지 데려다 주기, 집 비우는 동안 개 돌봐주기, 버스 운행시간 적기 등 누군가에게 필요한 일을 거절하지 않는다.

 



 

 

외부의 다른 공기를 받아들이면서도 굳게 문을 닫아건 낙원. 유행이 지난 문화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맨 마지막에 찾아드는 곳. 그 질척한 자기장에 이끌리면 두 번 다시 벗어나지 못하는 곳. (58페이지)

 


새해를 앞둔 추운 날 저녁, 버스정류장에서 고등학교 동창 교텐을 만난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심부름집의 소파에 재워준다. 시니컬하고 타인을 신경쓰지 않는 다다가 교텐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던 건 오래전 자기 때문에 교텐의 손가락이 잘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후 교텐과 함께 심부름집을 운영해가는 일은 그나마 작은 위로가 되었다.

 


다다 심부름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을 맡긴다. 마호로 역 시리즈를 이어갈 중요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다 심부름집에서 나가달라고 해도 전혀 나갈 생각이 없는 교텐을 비롯해 콜롬비아 아가씨 루루와 하이시, 친부모의 삶이 궁금한 기타무라 등의 사연은 다음 이야기에서도 나타나지 않을까.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 (101페이지)

 


다다와 교텐은 기타무라로부터 한가지 의뢰를 받는데, 다다가 감춰둔 감정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매사에 관심이 없는 듯 아무래도 좋다는 듯 행동하는 교텐의 마음을 느끼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혼자가 더 좋은 듯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감정을 갖게 되는 거다.

 


행복은 모양을 바꾸어가며 다양한 모습으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살며시 찾아온다고. (338페이지)


 

교텐이 집을 나간 후, 그를 찾아다니며 다다가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행복이라는 것이 잃어버리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곁에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은 먹지 않고 술이나 담배만 피워대는 듯 보여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난 교텐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다다 또한 교텐과 시작된 불편한 동거가 어느새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었다.


 

흔히 말하길,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갑자기,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이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도 이럴 때 해당하는 것이리라. 한번 불행이 찾아왔다고 해서 계속 불행하지는 않으며, 순간적으로, 찰나에 스며들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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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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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에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이 세상을 바꾸려는 존재가 있다. 그 하나가 아니라 바퀴벌레 군단이 인간의 몸을 취하였다. 영국 정치인들이 되어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매달린다.


 

영국 총리 짐 샘스로 변신한 바퀴벌레는 익숙하지 않은 몸을 움직여 곧 짐이 가진 기억들을 불러모았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과는 달리 짐 샘스는 자랑스러운 대의명분이 있었다. 짐 샘스 뿐 아니라 외무장관 베네딕트 세인트존을 제외하고 모두 그의 동료들이었다. 베네딕트의 몸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바퀴벌레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그의 몸을 훔치지 못했다. 베네딕트를 제거하고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브렉시트를 역방향주의 경제로 보았다. 브렉시트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한다. 그것을 비꼬는데 어쩐지 통쾌하기까지 하다.


 

풍자소설이 가진 장점이 유머러스하다는 거지만, 이 소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정치인들의 행보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가령 자기가 추구하는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성 정치인을 설득하여 성추문에 휩싸이게 하는 건 아주 쉽다. 본래 정치인들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현재 뉴스에서 오르내리는 것들과 비슷해 불편한 부분이 없잖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일한다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날치기로 통과하는 건 기본이다. 국민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바로 이런 게 작가들의 역할과 역량이 아닐까 싶다. 영국의 브렉시트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작품으로써 대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언 매큐언이 이 소설을 쓰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는 점 또한 동감하는 바다.

 


짧은 소설임에도 말하고자 한 내용은 무거웠다. 정치인들인 자신들의 행보가 최선이라고 말하겠지만 국민이 보기에는 올바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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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인사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8
김서령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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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민원 부서에 근무할 때 자주 찾아오던 젊은 남자가 있었다. 찾아오기도 했고, 음반을 선물한다며 들고 온 적도 있었다.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직원들이 너를 좋아하나 보다. 잘해봐라이런 소리를 할 때 불편했었다. 특별한 일 없어 다행이었지, 만약 수정처럼 자꾸만 고백하고 찾아왔다면 굉장히 힘들었으리라.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 한수정 대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수정이 연정시장지점으로 오게 된 이유는 박은영 과장 때문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때 박 과장의 강연을 듣고 자신의 커리어를 향해 나아가는 과장님처럼 되고 싶었다. 수정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매일 오후 3시면 짝퉁 루이뷔통 가방에 현금을 가득 담고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번쩍이며 사랑 고백을 해왔다. 자주 오던 고객이어서 수정은 제대로 된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소가 화근이었을까. 제대로 된 거절이 잘못이었을까. 사람들은 왜 상대방의 감정에 무딘 것인지, 자기만의 감정이 다인 줄 아는 건지 모를 일이다. 좋은 이별이란 게 있을 수 없겠지만 딸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별을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보복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편으로 불안한 까닭이다.

 


혼잣말하듯 미친 새끼라고 했을 뿐인데 그걸 듣고 날개떡볶이집 사장 철규는 수정에게 망치를 휘둘러 죽였다. ‘한 대리님을 사랑한 거 말고 제가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요?’라고 한 철규의 말에서 우리는 고백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직업과 관련된 고객에게 제대로 거절의 말을 하기 어려워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남자는 자기를 좋아한다는 거로 받아들였나. 시장 사람들과 은행 직원들은 수정에게 그만 떡볶이집 사장의 마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해왔다. 그저 농담을 던지듯 하는 말이었다. 수정이 죽고 난 뒤 그 말들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를테면 수정이 미소를 지었던 건 좋아서 그런 거였고, 먼저 꼬리를 쳤다는 식으로 변질됐다.

 



 

 

사람을 죽였는데 살인죄가 아니고 상해치사로 징역 6년이었다. 피해자 측에서는 가해자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해자 측에서는 청년의 순정이었다고 우긴다. 나는 수정 엄마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금쪽같은 새끼가 죽었는데 엄마에게는 남은 딸들이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다시 나와서 해코지하면 그게 더 무섭지 않겠나. 더 두려운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엄마는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자다가 일어나서 누군가를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가야 한다. 동감하지 못하는 말이면서도 또한 동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수정의 인사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난 자의 슬픔 혹은 울분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두렵고 고통스러운 기억일 테지만 묵묵히 지켜보는 수정을 느끼게 한다.

 


어느 것이 맞다 단언할 수는 없겠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므로. 그런데도 어떤 것이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더 옳은 일로 나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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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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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아버지마저 죽자 신에게 반항하기 위해 뒤로 걷는 자가 있다. 죽음이 주는 슬픔과 상실감, 신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은 사랑이며, 사랑은 곧 집이다. 퇴근 후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집을 잃은 것과 같다.


 

집을 잃은 세 남자가 있다. 1904년의 포르투갈 리스본의 고미술 박물관 학예사 토마스, 1938년의 부검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1981년의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가 그들이다. 세 남자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각자의 방법으로 견디는 중이다. 토마스는 율리시스의 일기장에서 읽은 십자고상의 본질을 확인하고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에우제비우는 새해로 넘어가려는 순간 아내 마리아가 찾아와 함께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 속에 숨은 복음에 관한 대화를 한다. 같은 이름의 다른 마리아가 찾아와 남편을 부검해 달라고 한다. 남편이 왜 죽었는지가 아닌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필립은 아내를 잃고, 아들마저 이혼하자 큰 슬픔을 느낀다. 우연히 방문한 유인원 연구소에서 침팬지를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교감을 한다. 거금을 치른 후 침팬지와 함께 살기 위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슬픔을 견디는 각자의 이야기면서 하나의 이야기다.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은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커다란 슬픔을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려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죽음을 거부하고 싶어 뒤로 걷는 자와 사랑하는 남편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부인, 남편의 몸이 자신의 집임을 깨닫는 과정과 그걸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다른 사람은 유인원에 의지해 안식을 얻게 된다. 토마스가 간절히 찾았던 십자고상에서 율리시스 신부가 느꼈던 신에 대한 사랑과 감동은 다시 신의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253페이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토마스가 찾고자 했던 십자고상의 본질을 알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다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신의 사랑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다. 거부했던 신의 존재와 사랑,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마주하게 되는 감정은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그 본질을 깨닫는 과정과 같다. 구원의 길도 다르지 않다. 낮은 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자들,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 속한 것이 구원의 길이며 안식이었다.

 


믿음과 신의 존재,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의 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길에 서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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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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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을 소설로 아는 경우가 많다. 글 쓰는 작가들의 책임이 무거운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 소설 등 다른 형식으로 독자들이 읽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이가 작가라고 본다. 작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한강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여 그걸 문학으로 풀어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말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다. 4.3사건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이 찾는 그 무엇은 상실과 애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지키지 못했던 거에 대한 애달픔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가면서 겨우 버틴다. 고통을 알기에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길에 서기도 한다.


 


 

 

소설에서 눈은 여러 감정의 매개체다. 눈 속에 파묻혀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며 녹아 없어지는 눈은 우리의 생과 사를 보는 듯하다. 슬픔으로 가득한 시간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눈이 내려 쌓이고, 녹는 시간이 오래 걸리듯 우리의 마음도 비슷하다. 내리는 눈은 역사가 남긴 얼룩이다. 눈 속에 파묻혀 길을 잃고 교착상태에 빠진 것도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44~45페이지)

 


시간은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경하의 시선 속에서 진행되었던 꿈으로부터, 사진을 찍고 영상물을 만드는 인선에게로, 인선의 엄마가 애타게 찾았던 외삼촌의 생사와 기억으로 향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직접 겪지 않아도 전염되어 나타난다. 엄마가 이모와 함께 가족의 시체를 확인하러 다녔던 그 광경은 인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그가 영상을 제작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이유와 같다. 눈물로 얼룩진 엄마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했고, 알리고 싶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87페이지)

 


전체적으로 슬픔이 내재해 있다. 인선의 가족을 고통으로 몰고 갔다. 일하다 전기톱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고 서울의 병원에서 접합수술을 한 것도, 신경을 죽이지 않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바늘로 찔러주는 장면은 마치 내 손가락이 찔린 듯 아프고 아팠다. 인선의 엄마와 아버지의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을 보며 자라는 것 또한 슬픔을 넘어 격통에 가깝다.


 


 

 

제주4.3의 역사의 한 장소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외에 남은 자들의 고통이 크게 느껴졌다. 등신대를 세워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크지만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를 그 시간에 있게 한다. 내가 인선이었다면, 내가 정심이었다면 어땠을까. 제주4.3사건을 일깨워 준 작가를 통해 우리나라가 가진 역사와 아픔을 생각해 보게 된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기억 속으로 향하는 장소는 작별의 시간을 거치는 것과 같다. 눈이 쌓인 곳에서 길을 잃고, 촛불이 꺼져가는 그곳에서 함께 걷는 길은 어둠뿐인 우리의 삶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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