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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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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비움과 여백의 미학이 아닐까 싶다. 꽤 짧은 소설임에도 마음속 다양한 감정이 벅차오른다. 과도한 설명보다 간결한 문장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소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작품의 주인공에게 이입되어 그저 가만히 있게 된다.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부유하고 주인공이 느꼈을 감정을 음미하게 된다. 그렇기에 클레어 키건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작품은 표제작 2022년에 발표된 「너무 늦은 시간」을 비롯해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2007), 「남극」(1999년) 등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은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나온 작품이다. 아일랜드의 역사, 문화와 더불어 여자와 남자들의 관계를 말한 작품으로 과거의 우리나라와 비슷해 한편으로 공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차별과 폭력에 대한 단상이 이 소설의 주제다.

첫 번째 「너무 늦은 시간」은 한 남자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그는 차라리 점심을 먹은 후 산책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직원들은 그에게 괜찮냐는 질문을 한다. 괜찮은가를 묻는 직원들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저 직원을 향한 일반적인 배려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비로소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쓴 작품이지만, 결코 바뀌지 않는 가족과 여성을 향한 성차별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 아빠와 남동생과 카헐은 식탁에 앉아 있고, 어머니 혼자 요리할 뿐 아니라 어머니가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발을 거는 남동생과 킥킥거리며 웃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만약 아버지가 그때 웃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자문하는 장면을 보며 안타까웠다. 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남자들의 행태가 나오는 작품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배운 남자는 연인에게도 같은 행동을 한다. 여성 혐오와 차별이 이 작품의 핵심 요소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하인리히 뵐의 하우스에서 머물며 글을 쓸 수 있는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가 주인공이다. 글을 쓰려는 작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오고, 독문학 교수라는 남자가 집을 둘러보고 싶다며 집 앞에 와 있다고 말한다. 저녁에 다시 오라고 말한 작가는 방문할 손님을 위해 케이크를 굽는다. 차와 케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은 남자는 ‘작가라면서 글은 쓰지 않고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굽고 있다’고 질책한다. 감시 차원에서 나온 방문자의 행태,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언어가 과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만약 남성 작가였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실린 「남극」은 추리소설처럼 위협적이며 공포스럽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라는 문장도 다분히 역설적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가 일탈을 꿈꾼다는 것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여자는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도시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남편과 아들, 딸의 선물을 고르고 난 뒤 짧은 원피스를 차려입고 술집으로 향했다. 바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함께 술을 마신 뒤 요리를 해주겠다며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씻는 것부터 요리, 모든 것을 다 해주는 남자가 좋아 그가 원하는 대로 짜릿한 밤을 보냈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보살펴야 했던 여자가 타인에게 보살핌을 받고, 여자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남자가 유혹한다면 쉽게 넘어갈 것 같다. 「남극」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정리되지 않은 집, 식사를 스스로 하는 법이 없는 가족만 보다가 다정한 남자를 만나면 반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법.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 있는 여자가 상상하는 모든 죽은 것, 혹은 남극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울 뿐이다.
가부장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문화에서 점점 변화를 이끌어 왔다. 누군가의 희생과 강력한 주장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차별과 여성 혐오의 불협화음. 그 속에서 미래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문학 작품 속에서 찾는다. 공감과 감동,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발걸음이 짙게 배어 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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