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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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꼭두각시 #윌리엄트레버 #한겨레출판

 

학교의 역사 시간에 배웠던 세계 역사를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역사가 이루어진 연도를 외우느라 정작 세부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는 아릿하다. 작가의 기억과 조국의 역사를 작품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조금씩 알리는 작업이 계속되는 이유와 같다. 우리나라의 저항의 역사도 작가들의 고군분투가 있었기에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윌리엄 트레버가 전하는 굴곡의 역사는 아일랜드의 독립 전쟁과 그에 맞서는 군인들, 한 가문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으로 안내한다.



 

소설의 시작은 1983년의 잉글랜드의 우드컴 파크 저택과 아일랜드의 킬네이 주택을 배경으로 하여 먼 과거로 흘러간다. 아일랜드의 독립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 '블랙 앤드 탠즈'의 스파이가 목이 매달려 죽은 후 퀸턴 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와 여동생들, 가족이 죽었다. 엄마는 술에 의지해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며 슬픔과 고통에 빠져있다. 어쩌면 거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윌리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작가는 자세한 내용을 삼가고, 독자는 윌리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윌리에게 대하는 말과 몸짓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가족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달리 윌리는 영국에서 사촌 메리앤이 찾아오자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비극이 일어나도 감정은 숨길 수 없는 법. 서로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아일랜드 코크로 윌리를 찾아온 메리앤을 향하여 사람들은 마치 비밀을 감추듯 윌리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과거 킬네이 저택은 영국 여성과 아일랜드 남성의 결합이 대를 이어왔다. 윌리와 메리앤도 당연하게 결혼으로 이어질 거로 짐작했다. 하지만 삶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법이다. 윌리의 아버지의 말, 마치 운명의 꼭두각시라니.’처럼.



 

윌리엄 트레버를 가리켜 왜 '작가들의 작가'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작품을 다 읽고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윌리와 메리앤 그리고 이멜다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들 마음대로, 혹은 독자의 바람대로 끌고 가지 않는 찬란한 삶에 그만 아찔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떠도는 여행자의 삶을 사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함께 그를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할 틈 없이 훌쩍 시간은 행복한 고통이었을까. 이제는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는 별개로, 통찰이 이끄는 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이의 마음도 쉽지 않았을 거 같다.

 



운명이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거라고 여겼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이 다가와도 일어설 준비가 되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힘을 가진 존재로 생각했다. 하지만 삶의 고통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흐르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뒤로 하고 떠돌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한 소년의 삶을 마치 운명처럼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거다.

 



윌리가 당신에게, 메리앤이 당신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당신의 자취를 더듬는 거에 가깝다.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는 마음이 애틋하다. 사랑이야말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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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정에 결혼했다 Endless 2
한지수 지음 / &(앤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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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자정에결혼했다 #한지수 #넥서스

 

한지수 작가의 책을 받아들고 처음 만나는 작가라 설렘을 안고 책장을 폈다. 책을 다 읽고 혹시나 하고 내 블로그에 검색해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40일의 발칙한 아내라는 작품으로 가상의 공간과 현실이 교묘히 섞인 다분히 영화적인 스토리였다는 것이다. 어쩐지 익숙한 문체라고 여겼던 듯하다.

 


새로운 한국 작가의 작품 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소위 문학 마니아라고 우기면서 한국 작가를 몰라서 되겠느냐는 나름의 방어적 기제랄까. 7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소설집으로 작가가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경험, 작가만의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마감 날짜를 지키지 못한 작가가 편집자에게서 5일간의 시간을 얻은 후 모텔방에 틀어박혀 34일 동안 썼던 작품 이불 개는 남자가 있다.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낮에만 방에 틀어박혀 지냈던 여자가 밤에만 사용하는 남자에게 남기는 쪽지 한 장이 이 소설의 제목이다. 시간이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만남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사용한 공간에서 나의 공간으로 전이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 상대방과 내가 모두 좋을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상황이 인상적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천사들의 도시는 한국에서 완구를 수입하다 부도가 나 필리핀의 앙겔레스 시티 즉 천사들의 도시에 터를 잡은 제임스가 겪은 이야기다. 그는 필리핀의 이민국으로부터 워킹비자를 아직 얻지 못한 상태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돈으로 비자를 받기 위해 애쓰지만, 필리핀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제임스가 밝혔다시피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말이지만, 이 땅은 안 되는 게 없고 또 되는 것도 없다.’(103페이지)라는 거다. 워킹비자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 같지만, 이민국에 아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며 추궁하면 뒤꽁무니를 빼는 식이다. 밟거나 밤이면 오므라드는 보라색 잎을 가진 미모사와 제임스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치과의사가 나오는 페르마타는 최근 이사 준비로 사랑니에 염증이 생겨 치과에 누워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치과의사가 공황장애가 생기면 충치나 신경치료에 필요한 작업을 할 때 실수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겁이 났다. 본래 박자보다 길게 연주하라는 음표, 페르마타. 죽어가던 고혈압 환자의 눈과 비유했던 장면은 두려움을 유발했다. 치과에서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거. 그러한 염려가 두려움의 형태로 나타나는가 싶었다.

 


한지수의 소설은 뭐랄까. 꽤 섬세하면서도 최근 젊은 작가들과는 다른 작품을 쓰는 것 같다. 자기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부터가 달랐던 듯하다. 모호하고 몽환적인 혹은 불투명한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보는 게 아니다. 현실에 맞서 싸우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을, 담담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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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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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강물처럼 #셸리리드 #다산책방

 

삶은 알 수 없다.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하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수많은 가정을 질문으로 건네보지만, 가지 않은 길은 알 수 없다. 그저 상상에 맡길 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빅토리아는 왜 집에 머물지 않았느냐다. 물론 1948년의 여성의 지위는 바닥을 치고 있었지만, 빅토리아의 엄마도 죽기 전에는 집안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었나. 사실을 말하고 아이를 낳고 키웠다면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이를 잃고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 모든 게 작가의 계획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십 대 소녀 빅토리아는 수줍어하고 말이 없다. 지금은 호수가 된 아이올라의 내시 복숭아 농장의 딸인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오빠, 이모를 사고로 잃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폭력적인 남동생 세스, 이모부는 전쟁에 나갔다가 다쳐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축낼 뿐이다. 남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새벽이면 복숭아를 따는 게 빅토리아의 일상이었다. 어느 날 세스를 찾으러 갔다가 이방인 윌 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윌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구릿빛 피부에 왜소한 몸매를 가졌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인전이라고 하며 차별하며 경시한다. 역사는 이긴 자의 거라고 하던가. 아메리카를 지키던 인디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놓고 오히려 자기들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던 윌에게 마음을 빼앗긴 빅토리아는 그를 찾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빅토리아의 곁에 머물렀다.

 


윌이 피부가 벗겨진 채 시체로 발견되었던 날, 빅토리아는 누군가에게 슬픔을 표현하지 못했다.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복대로도 더 이상 감출 수 없자 윌와 함께 보냈던 산막으로 향했다. 혼자 아이를 낳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산에서 내려왔다가 젖을 먹이며 소풍을 즐기는 가족의 차 안에 아이를 넣어두고 도망쳤다. 빅토리아가 배고픔에 집으로 돌아갔다면 아버지는 그녀와 아이를 환영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댐 건설로 아이올라 마을이 수몰될 거라고 공무원이 찾아오자 빅토리아는 가장 먼저 땅을 판 사람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대지의 여신에 가깝다. 집과 농장을 판 뒤에 멀리 떠날 줄 알았다. 달콤한 복숭아를 살리기 위해 대학교수를 찾아가 복숭아나무 모두를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던 건 의외였다. 오래된 나무는 토양이 다르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대학 교수와 연구팀은 토양에 적응시키는 작업을 하고 일이 년 사이에 핀 꽃은 모두 따 주어야 뿌리가 땅속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내시 복숭아가 다시 달콤해졌을 때 빅토리아는 아들이 그리워졌다. 소풍 나온 가족을 발견했던 골짜기의 바위 위에 아들의 나이만큼 돌을 올려두기 시작했다. 아마 이 시점부터 간절하게 바랐던 거 같다. 빅토리아와 아들이 만날 수 있기를, 빅토리아에게 선물처럼 찾아오기를 바랐다. 어쩌면 빅토리아 가까이에 있지 않을까 상상했던 거 같다.


 

쫓기던 윌을 품어주고, 산막에서 돌아온 빅토리아를 품어준 루비엘리스 할머니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사람 모두가 기피하는 대상이었으나 윌에게 누비이불을 건네주고 집에서 머물게 했을뿐더러 말없이 둘을 이어주었다. 루비엘리스가 쓰러졌을 때 집으로 데려와 가까이에서 그녀를 돌봐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루비엘리스나 빅토리아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터전에서 기적의 복숭아를 탄생시켰던 장면에 감탄했다. 기온을 정확히 지키고 때에 맞춰 복숭아를 수확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10년 넘게 복숭아나무를 키웠지만 한 번도 그 맛을 보지 못했다. 그 비법이 궁금했다.


 

빅토리아 혼자서 아이를 낳는 장면과 슬픔을 속으로 삭이는 장면에 펑펑 울었다. 빅토리아에게 왜 이렇게 가혹한가. 그녀를 돌봐줄 어른이 없다는 게 슬펐다. 그녀가 추스를 수 있었을 때 비로소 친구가 생기는 장면은 이 모든 관계는 내가 마음을 열어야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143페이지)

 


윌의 말은 소설 전반에 걸쳐 흐른다. 빅토리아의 삶의 모토였다. 잃어버린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거라는 거.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도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갈 거로 생각했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 같았다. 수몰된 마을, 저수지 밑바닥에 있을 마을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장면 또한 기억할만하다.

 

 

#흐르는강물처럼 #셸리리드 #다산책방 #다산북스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영미문학 #영미소설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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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라디오 - 우리는 내내 외로울 것이나 아무튼 시리즈 71
이애월 지음 / 제철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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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라디오 #이애월 #제철소

 

하루를 마치는 퇴근 시간, 6시가 되면 알람이 울린다. 습관처럼 듣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익숙한 아저씨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흥얼거리며 메모한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기본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기분으로 라디오를 들으며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서는 좀 더 볼륨을 높인다. 오래전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디제이가 읽어 주는 내 사연에 뭉클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라디오는 마치 친구처럼 친숙한 매체다. 모르는 사람들의 사연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며 친구처럼 여겨지는 게 어디 나 하나뿐일까.


 

라디오 작가인 이애월은 과거 라디오 키즈였던 시절부터 라디오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라디오 작가로서 느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특히 이문세를 좋아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는 폭소를 터트릴 만했다. 그 시절 나였다면 그럴 만한 배짱이 없었을 텐데. 작가는 라디오 작가가 되려고 그랬었나 보다. 가수 이문세와 전화 데이트가 있었던 때 라디오 앞에서 좋아하는 가수와 통화하려고 새로운 이름을 짓는 어린 소녀를 상상해보라. 너무 귀엽잖은가.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녹음해두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집에서 몰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숨겨와 재래식 화장실에서 몰래 듣는 중학생 소녀는 또 얼마나 귀여운가.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그걸 빠트렸다. 냄새나는 걸 주울 수도 없어 고민하는 소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를 어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갇힌 소녀는 진퇴양난이었을 거다. 그러나 엄마는 슬림한 사이즈의 워크맨을 사주셨으니 이 또한 전화위복이었다. 워크맨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테이프로 녹음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귀벌레 증후군이라는 말을 새롭게 알았다. 귀벌레 증후군이란, ‘마치 귀에 음악 소리를 내는 벌레라도 들어온 것처럼 특정한 노래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현상’(71페이지)을 가리킨다. 아침에 들었던 음악을 하루종일 흥얼거리게 된다. 또한 라디오에서 들었던 광고 음악은 귓가에 벌레라도 있는 양 머문다. 책 속의 광고 음악 가사가 나한테도 익숙해서 재미있었다.


 

책 속에서 언급했지만, ‘라디오 로맨스하면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지 않을까. 건 피디와 진솔 작가의 사랑은 사랑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염원 같은 거였다. 피디와의 사랑은 어떤지 궁금해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바람과 닮아있다. 라디오 로맨스는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온갖 판타지를 품고 있는 독자로서 조금은 아쉬웠다.

 


대부분 비정규직인 방송 작가의 직업에 관해서는 어떤 책에서 읽었다. 작가 또한 방송 작가라는 직업에 대하여 설명한다. 하루아침에 다른 작가랑 일하게 되었다며 해고 통보하는 상황은 지금도 그런지 궁금하다. 전과 달리 방송 작가 표준계약서가 의무화되지 않았나.

 


비상 상황에서 라디오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은 기억해야겠다. 통신회사에 불이 나 휴대폰이나 가게의 결제 시스템이 마비되었을 때 소통할 수 있는 매체는 라디오였다. 전쟁 상황에서도 라디오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던 것처럼. 라디오는 무심하게 우리 곁에서 머물고 있다.


 

라디오 작가는 오프닝 멘트와 클로징 멘트를 쓰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탐독한다. 그날의 느낌에 따라 멘트도 달라지는 법. 유달리 멘트가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방송을 듣는 청취자의 감정에 따라 느낌도 달라지는 것 같다. 디제이의 목소리로 다양한 사람의 사연을 듣고, 상상하고, 공감한다. 마치 내 친구의 이야기처럼 미소 짓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처럼 라디오라는 공간에서 친구가 된다. 라디오가 건네는 작은 위로에 우리는 오늘도 라디오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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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그의 빛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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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그의빛 #심윤경 #문학동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세계문학에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가 셔츠를 끌어안고 있었던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아 있다. 평생 데이지에게 보이기 위한 부를 쌓았던 개츠비의 마음과 달리 이질적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고전문학은 다양하게 변주되기 마련이다. 심윤경 작가는 1920년대 뉴욕을 2020년대 서울로 옮겨 와 한국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썼다. 데이지와 톰이 사는 이스트에그를 압구정동으로,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에그를 성수동으로 나타냈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가 남자 닉이었다면 위대한 그의 빛은 이규아로 여성인 입장에서 사촌 유연지와 제이 강을 지켜본다. 이규아는 부모님의 사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뉴욕을 떠돌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제이 강과 사촌 유연지를 만나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림과 동시에 현재를 이어간다.





 

규아는 성수동 T타워 옆 단독주택을 임대해 와인바 킹스포인트를 열었다. 주변에서 에클바이오 대표 제이 강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T타워의 펜트하우스의 소유자라는 것과 미국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거둔 인물로 소문이 무성했다. 에클바이오에서 파티를 계획한다는 전화가 걸려온 뒤 킹스포인트에 들어온 제이 강은 규아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마당패 동아리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강재웅임을 알게 된다.

 


부를 위한 욕망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게 제이 강이 만든 계획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그의 계획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다. 드디어 시작이다. 이 모든 게 유연지를 만나기 위한 거였다. 개츠비처럼 수상하거나 위험한 사건에 휘말려있지는 않는다. 오로지 유연지를 바라볼 뿐이다. 문득 사업도 내팽개칠 만큼 감정이라는 것이 영원하던가 의문이 든다. 사업체를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규아의 시선은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는 연지를 향한다. 세상 사람들이 연지를 향해 손가락질해도 비통해하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다르다. 피츠제럴드가 데이지를 부를 향한 욕망에 가두었다면 작가는 연지에 대하여 연민의 감정을 담았다. 시대에 따라 작품의 평가나 감정이 다르듯 우리는 변화된 새로운 개츠비(제이 강)을 만날 수 있다. 고전문학의 다양한 변주와 그에 따른 즐거움이 커진다.


 

신은 그런 식으로 못된 장난을 친다. 가장 진실한 표현력을 가진 얼굴 뒤에 결코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을 숨겨놓는다. 아주 간단한 트릭인데 인간은 거의 틀림없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258페이지)


 

이 문장이 와닿는다. 소설의 모든 인물이 혼란에 빠진 거 같았다. 무작정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사랑했던 감정의 잔재가 삼십 년 동안 유지되는가. 삶이 그토록 간단했던가. 의문이다. 삶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지는 법.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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