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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폭력이란 대물림되는 것일까. 자라면서 보고 배우는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날 때부터 폭력적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예를 들면, 남들 다 있는 부모가 없거나, 재산이 없거나, 부모가 있어도 사랑받지 못하거나 할 때 드러나는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이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제 마음을 대변하듯 혹은 그런 마음을 들키기 싫어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주변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했던 것 같다. 매 맞는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제 아이를 매로 때리는 부모가 되듯. 어쩌면 폭력은 대물림되는 것 같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자라서 부모가 된후 자식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때리는 사람들.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리는 것 같다.
여기, 한 사람의 폭력의 역사를 만났다.
그가 경험했을 처음의 폭력은 아마 열일곱 살의 엄마로부터가 아니었을까. 열일곱 살의 나이에 화장실에서 난 아이. 어린 엄마는 미혼모들이 기거하는 센터에 있었을 것이며, 새로 태어난 아이는 어느 누군가에게 입양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시점. 어린 엄마가 정신을 차렸는지, 자신의 아이를 키우겠다며 데려가던 그 시점부터 아이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집도 직장도 없었던 엄마가 곧 자신을 버릴 것은 당연했으므로. 그런 그가 고아원에서 자랐고, 고아원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반 구성이란. 고아원 아이들이 몇명, 한 부모 아이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로 구성된 반이라니. 처음엔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 느껴지는 차별 또한 그들의 피부에 금방 와닿았다.
수많은 차별 중에서 고아원 아이들만큼 차별받는 아이들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반 아이 중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있었는데, 애들이 고아원에 있는 아이라고 수군수군댔던 것처럼, 주인공 장태주의 반 아이들도 그렇게 수군댔다. 소심한 아이였던 장태주는 말없이 조용히 앉아 책 읽는 아이였다. 그가 어느 순간에 폭력성이 드러났던 건, 자기를 놀리는, 그러니까 태주가 기르는 새에게 해꼬지를 하는 아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알수 없었던 폭력이 내재되어있었다는 것. 그에게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어느 순간 폭력의 한가운데, 아니 정점에 있었던 태주에게 중학교 입학은 또다른 폭력의 장에 빠지는 것과도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학교의 짱이니 하는 것처럼. 그를 자기의 발 아래에 두고 싶었던 아이도 결국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판박이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 상납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보니 그가 배운 것 또한 그런 것 뿐이었다. 내 발 아래에서 기어라, 뒤를 봐줄테니, 같은.
고아원과 폭력의 한가운데서 살아갈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에게도 인생의 단 한 사람, 그를 챙겨주는 사람을 만났다. 소년원에서 만난 담임 공민수가 그였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생겼던 것이다. 그가 담임을 따라나섰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담임은 그에게 권투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으로부터 권투를 배우게 했다. 담임의 아내와 할아버지와 담임과 함께 네 사람이 밥상의 네 면에 앉아 식사하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서로 자기 말만 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와 의견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누군가와 싸우며 즉 권투를 하며 돈을 버는 것도 가족과 함께 있으니 가능했고,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가족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담임, 누나, 할아버지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승승장구할 때의 불안함이란.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 대부분의 사람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게 힘들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가 꼭대기의 정점을 향해 달려갈 때부터 불안했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소위 막장 같은. 우리가 수많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많이 봐온 것 같은 불안감.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소설이 좋다. 우리의 예상과 너무도 딱 맞아버리면 허무할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너무 신파같잖아. 요즘엔 어디서 봄직한 신파같은 소설 그다지 별로라고 말하지만,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그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걸, 그곳이 혹은 지옥의 불길이라도,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만 있었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까. 불구덩이를 향해 나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잠시 쉬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면서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던 건 장태주라는 인간의 어떤 모습까지 보게 될까라는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부러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가 폭력을 다시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도 결국엔 가지지 못한 것,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가 빛의 한가운데서도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맸던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그것,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