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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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던 게 타 인터넷 서점 서평단으로 활동했을 때이다. 문학 분야의 서평단에게 주었던 세계문학 엽서가 있었는데, 책갈피로 사용하던 중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책의 표지를 보고 언젠가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이 작품이 에밀 졸라의 책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각인시켰고. 그러다 리커버 특별판을 알게 되었고, 이처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권을 합본해 두께가 상당하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제목이 다른 것도 아닌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지 않는가.

 

세일 할 때의 백화점을 가본 적이 있는가. 지하의 식당 매장에서부터 1층의 화장품이나 명품 매장 등 아주 넓은 공간인데도 발디딜 틈새가 없다. 모든 사람이 백화점으로 몰려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치이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실라치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향수나 립스틱이라도 고르려면 판매직원이 나에게 오는 시간 또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들은 물건에 집착한다. 쇼핑이라는 병에 중독되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쇼핑은 습관이다. 습관처럼 구매하다보면 그 욕망을 자제할 수가 없다. 백화점을 비롯해 쇼핑몰은 우리의 소비의 욕망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욕망에 굴복하고 만다. 소설 속 여자들의 소비 행태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100여년 전의 소설임에도 현재와 같다는 것이다. 백화점에 가서 예쁜 물건을 보고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해 한두 개 사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핸드백에서 조용히 꺼내 들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가 구매한 제품을 자랑하고 싶어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마음 먹어도 막상 물건이 있는 장소에 가면 그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

 

 

특히 마르티 부인의 행동이 안타까우면서도 마치 우리를 보는 듯 했다. 남편의 수입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자꾸만 물건을 사들이는 그녀 때문에 남편은 가욋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다. 실크 스카프를 만지는 그녀의 탄식, 그 물건을 부러움에 쳐다보는 다른 여인들의 탄식어린 눈빛들. 백화점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곳이었다. 여성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화려한 쇼윈도로 여성을 현혹시키고, 바겐세일의 덫으로 유혹했다. 여성들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욕망을 자꾸 주입시켜 거대한 유혹의 덫을 놓았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 있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거대한 백화점의 장소를 이용해 인간들의 소비 행태를 말하는 한편 거대한 자본 속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에밀 졸라는 시골에서 올라온 드니즈라는 인물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니즈가 동생들과 함께 처음 파리에 도착후 큰아버지의 가게를 찾아 가던중 맞닥뜨린 백화점의 위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백화점 건물의 한쪽에 어둡게 자리한 큰아버지의 가게는 사람들의 소비와 욕망이 어디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자본앞에 소상인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거대한 자본이 투자된 백화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후 더 많은 물건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실크 스카프 하나만 사겠다던 여성들은 모자며 장갑들을 사기를 주저하지 않고 실크며 기성복을 사들인다. 여기에는 여성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판매원들이 한 몫을 하게 된다. 기본급 외에 판매 수당을 주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팔려고 하기 때문이다. 출근 순서대로 판매 순서가 정해지지만 제대로 지키기가 힘들 정도다.

 

 

 

무레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야심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이 이룩한 백화점의 왕국에서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을 위한 신전을 지어 바친 다음, 그곳에서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정중하고 세심한 배려로 여성을 취하게 한 다음, 그녀의 욕구를 부추겨 달아오른 욕망을 충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393페이지)

 

소설이 그렇듯 에밀 졸라의 주인공 드니즈는 이곳,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성장해 나간다. 시골뜨기에서 백화점 사장 무레의 인정을 받고, 판매직원들의 신임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펼쳐진다. 더군다나 무레의 사랑을 받지만 현명한 여인답게 그의 식사 초대를 거절한다. 그를 사랑하되 하룻밤의 연인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소설에서 드니즈와 무레의 사랑의 전개는 아주 미미하다. 여성들이 소비의 욕망에 어떻게 굴복하는지,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주로 보여준다.

 

드니즈는 백화점의 거대한 상권의 변화, 이것들에 관한 새로운 시대를 예감했다. 백화점 주변 소상인들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다는 이야기다. 여성들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는 욕망의 본질을 파는 행위와도 같다. 그 사람의 욕망을 자극해 유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거울'로서의 소설이 요구되던 시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소설에 심취했던 에밀 졸라. 스무 권으로 이루어진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한 번째 작품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놀라운 작품이다. 현재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담아 100여 년전의 소설이라 믿지 못할 정도였다. 고전문학이 왜 오랫동안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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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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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것은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같은 소설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까지는 조금쯤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소녀들의 첫사랑과는 거리가 먼 서른일곱 살 차이나는 남자에게 유린당한 이야기였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학원 강사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공부를 봐준답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하고 그들의 마음을 훔쳤다. 소설을 읽는내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부모는 뭐하고 있었나, 가장 가까이에서 소녀와 함께 했던 친구는 왜 몰랐을까. 물론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선망했던 선생님과 좋아하는 사이라고 질투했던 친구 이팅, 자신의 아픔이 너무 커 쓰치의 마음을 살필 줄 몰랐던 이원이었. 쓰치의 친구인 이팅과 이원 언니 또한 자신의 감정이 더 컸던 이유다. 세상에 둘도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질투하느라 쓰치가 보내는 사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다. 자신의 마음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열세 살의 한 소녀 팡쓰치, 작문을 가르쳐주겠다는 학원 강사에게 5년간 진행된 강간이었다. 아무도 몰랐다. 수준높은 고전문학을 읽어주던 이웃집의 이원 언니도 몰랐다. 자신에게 호감있는 여학생을 집으로 불러 작문을 봐준다는 핑계로 강간했으며 그 기간이 5 년이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열세 살의 소녀는 그게 사랑의 방식인줄 알았다. 자신과 리궈화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이라 여겼다.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94페이지)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을 때 사실 나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인생은 옷처럼 그렇게 쉽게 벗겨지는 것이다. (268페이지)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이 쓰여졌다고 했다. 2017년 이 소설이 발표되었고 작가는 소설이 발표된지 2달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의 부모는 작가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고, 지목된 학원 강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쓰치의 부모였다. 쓰치보다 서른일곱 살이 차이난다고 해도 딸아이를 단 둘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는 거였다.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97페이지) 라고 말했던 엄마였다. 물론 쓰치의 친구 이팅이 있어 가능했다고 보지만 부모가 방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쓰치가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도 창피하다며 다른 데로 이사를 가지 않았나. 아무 일 없는 듯 동네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리궈화와 이웃들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리궈화 가족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인가.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321페이지)

 

한동안 미투 운동으로 시끄럽더니 지금은 조금 주춤한 상태인 것 같다. 성폭행은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안다는 이유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성폭행 할 권리는 없다. 이제 막 소녀에 접어들기 시작한 아이를 공부를 가르쳐준다며 꾀어 강간을 하고 성폭행 했던 파렴치한 인간들이 지금도 버젓이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수많은 가정(假定)으로 가득찼던 지난 날의 언어들. 자기의 마음을 조금씩 내비쳤지만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른척했던 우리들의 무관심한 자세를 다시한번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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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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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게 안대회 선생의 『세한도』였다. 물론 다른 동양미술 관련 책에서도 자주 봐왔지만, 그 책에서 이상적과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그림을 좀더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근에 유홍준의 『안목』를 읽으며 다시금 추사에 대한 글과 그림이 궁금했던 터에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는 그런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듯 했다. 더군다나 그의 생애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래전에 펴냈던 『완당평전』을 새롭게 펴낸 책이라고 봐도 옳다. 오류를 수정하고 독자들이 읽기 쉽게 전기 문학 형식으로 펴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된 사실이 추사 김정희가 노론의 골수 집안이었으며 영조의 정순왕후가 추사의 12촌 대고모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영특함을 미리 알아보았던 박제가는 추사를 제자로 삼았고, 아버지와 함께 청나라 연경으로 가 그곳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아호를 완당이라고 했고,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 학계의 원로인 옹방강과도 교류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자인 후지쓰카 지카시는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들이 청나라와 교류한 실상과 추사가 연경에서 벌인 활약상을 치밀한 고증으로 밝혀낸 사람이다. 그는 고서점가를 뒤지며 자료를 찾았고 추사 사후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후지쓰카는 추사의 주변 인물들이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한 구체적인 내용을 소상히 규명한 논문을 계속 발표했고, 추사가 청조 고증학과 경학의 업적을 집대성해놓았고도 말했다.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 (45페이지) 라고 했다.

 

우리가 추사 김정희하면, 그의 글씨인 추사체만 기억하고 있기 쉽다. 하지만 그는 금석학, 역사지리학, 고증학, 언어학, 차와 불교학, 금강안, 미술사가에도 뛰어났다. 저자는 추사의 많은 작품을 추려내어 수록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또한 한문으로 된 추사의 글을 한글로 풀이해 그 맛을 더한다.

 

 

추사에게는 많은 벗과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우봉 조희룡, 황산 김유근, 초의 스님, 소치, 붓을 잘 만드는 박혜백, 전각을 잘하는 오귀일, 먹동이라고 불린 달준이, 장황장 유명훈 까지. 이들은 추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를 무척 아꼈다.

 

언젠가 TV 채널에서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소 좋아하는 유홍준 교수가 출연해 추사 김정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유배 당시 부인과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읽어주는데 무척 애틋했다. 무릇 사소한 사이에서 편지로 쓰는 글씨가 그 사람의 평소 글씨체라고 한다. 이렇듯 추사 또한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종이나 먹, 붓에 대한 타박 아닌 타박,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 들을 하는 과정에서 추사의 글씨와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이기에 무얼 보내달라고 했을 테고 푸념도 했을 터다.

 

한 서예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편지 글씨와 해서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 편지란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서예가의 필법이 거짓 없이 드러나며, 해서 작품에는 그렇게 변화된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214페이지)

 

 

추사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고, 성격도 대단히 까다로웠다고 한다. 추사의 철저한 완벽주의 때문에 김우명이나 윤상도에 의해 탄핵 상소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연유로 제주로 9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했던 터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에술적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고도 한다. 제주 귀양살이 이후 추사체가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라고도 한다.

 

죽는 순간까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추사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추사의 만년을 건강하게 지켜준 것은 공부하는 행복,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 예술에 전념하는 열정이었다. 그 중 공부하는 행복이 제일 컸다고 한다. (485페이지)

 

 

 

 

유홍준은 이 책을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인간적 삶에 부쳐 문학적 형식으로 썼다고 했다. 독자들이 가깝게 여겨지는 추사 김정희. 우리는 이 책으로 추사의 삶과 그의 학문적, 예술적 경지를 엿보게 된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자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주 나중에야 자신이 함부로 뱉었던 평가를 뒤집어 용서를 구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유홍준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하게 된다. 그가 바라본 문화 예술과 작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과 역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에서도 말했지만 안목이 있는 수장가들이 있어 세한도도 지켜냈지 않은가. 유홍준이 바라보는 시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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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6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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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어오면서 미출간된 시리즈 때문에 비어 있는 부분이 있어 안타까웠다. 드디어 해리 홀레 시리즈 완전체가 출간되었다. 바로 『리디머』다. 『데빌스 스타』의 다음 이야기 이자 『스노우맨』의 직전 이야기. 물론 시리즈와 상관없이 읽어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순서에 맞게 읽어 보는게 독자의 큰 즐거움 아니겠는가. 책들이 거의 벽돌 두께라 처음부터 정주행 해보겠다고 자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날때마다 정주행하고 싶은 책이 해리 홀레 시리즈인 건 분명하다.

 

그동안 출간되었던 해리 홀레 시리즈 중에서 왜 이 책이 맨 나중에 출간되었는지, 추리소설 속에서 구원을 말한 소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구세주나 구원을 말하는 소설이 추리 소설 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호기심과 짜릿함을 자극할까, 아무래도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전에는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구세군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는 곳엔 마치 하나의 정적인 장면처럼 빨간 구세군 남비와 그 옆의 구세군을 볼 수 있었다. 구세군과 구세군의 구제사업, 구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게 소설의 내용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대로에서 구세군이 죽었다.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았다.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 해리는 자신의 상관 묄레르가 물러나고 새로운 후임 군나르 하겐 경정과 부딪히는 한편 프린스라 불렸던 톰 볼레르의 우두머리가 있지 않을까 나름의 방식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오슬로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마약을 합법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지정 장소에서만 팔고 있는데,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 중 『팬텀』에서 사랑했던 라켈의 아들 올레그가 마약에 중독되어 살인사건에 연류되기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약에 중독되면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 또한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소설의 첫 부분 마약 중독자의 자살로 그 부모에게 죽음의 사자 역할을 했던 해리의 고뇌만 보아도 그렇다. 물론 자살이 아닌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한 살인 사건이었다는 걸 밝혀내지만 말이다.

 

 

소설은 한 구세군에 소속된 한 소녀를 강간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성년자의 강간. 마치 습관처럼 하게 되는데, 어린 소녀를 강간하며 구원을 얻는다는 것부터가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닐까. 억압된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기 마련인데 어린 소녀를 강간하는 일이었다는 게 마음아프게 다가온다.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습관처럼 계속된다는게 문제다.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나를 구원하는 게 어떤 것인가를 묻는 작품이다.

 

해리는 사건의 첫인상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뇌에서 걸러지지 않은 첫 장면의 느낌을 강조했던 해리. 형사들에게 주로 묻는 질문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느꼈던 첫 장면을 그들의 말로 듣기를 바랐다. 그 장면들에서 번뜩이는 재치, 사건에 대한 감각, 해리 홀레만의 수사 방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해리의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살인범을 잡아야 하는 그가 살인범을 잡아야 할 것인가, 구세주 앞에서 맹세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아들을 살려줄 것인가. 구세군을 통해 구원받은 자로서 타인을 구제하고 구원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채웠던 그를 벌할 것인가. 해리는 누구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건네는 소설이었다. 라켈에 대한 마음을 다잡는 한편 해리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는 장면이 좋았다. 그가 알코올에 중독되지 않고 맨정신으로 수사하는 장면 또한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해리 홀레를 응원하는 팬이므로. 부디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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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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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주 얇은 책이 좋은 경우가 있다.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잠깐의 시간 동안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같은 경우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에게 이렇게 얇은 책은 좀 서운한 감이 있지만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다면 이것 또한 굿이다. 그림과 글의 조합이 좋기 때문이다. 글이 없이 그림만 있는 책을 볼 경우가 있다. 글이 더 좋다고 여겼으나 그림을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글이 있지 않아도 그림만으로도 우리는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건 어른들 보다는 아이들이 더 잘할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이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게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버스데이 걸』은 아주 짧은 소설이다. 카트 멘시크의 그림이 수록된 단편으로 스무 살 생일에 무얼 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각자 스무 살 생일에 무얼 했더라 열심히 생각한다. 스무 살이었던 시절이 너무 오래되어 한참을 생각해보지만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때라 친구들에게 장미를 받았을테고, 남자 친구가 없었으니 친구들과 어울려 생일파티를 했을 것이다. 바람이 부는 밤바다,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겠지.

 

스무 살 생일이 맞이하는 여성이 있다. 이탈리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생일날 근무를 바꾸지 못했다. 생일 날 근무중 한 번도 아프지 않던 플로어 매니저가 복통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갔다. 플로어 매니저에게는 고유의 업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식당 사장에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 일을 그녀가 하게 되었다. 식당 6층에 있는 사장의 방으로 웨건을 밀고 갔다. 생일이라는 그녀에게 사장은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 소원은 단 한 가지여야 했다.

 

 

 

아가씨,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거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34페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 단지 그것 뿐이야. (57페이지)

 

그 소원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는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스무 살 생일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주인공 또한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이 걸리는 소원을 빌었을 것이라는 것뿐.

 

담백한 문장의 담백한 단편이었다. 우리의 스무 살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어떠한 소원을 빌었든 우리의 삶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 다른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나의 삶은 나의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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