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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내가 살았던 집을 떠올린다는 건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을 떠올린다. 창호지를 바른 문, 그 문을 열고 증조할머니와 함께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다. 또한 동생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 시간이 흘러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88세이던 증조할머니가 곰방대를 들고 잘게 썬 담배를 피우던 모습과 치매에 걸려 엄마에게 밥을 달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엄마는 그 시절 얼마나 힘 드셨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 한 생각이다. 지금의 나 같으면 도망가 버리고 말았을 그런 일들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감내하셨다.
대구의 북성로 적산가옥촌에서 저자가 살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유일한 며느리였던 엄마가 병수발을 들기 위해서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과 저자와 여동생이 살던 집에서 엄마의 공간은 없었다. 엄마의 나이 고작 서른 살이었다. 작가가 엄마와 할머니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지금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아내인 할머니가 계신데 왜 할머니가 병수발을 하지 않고 엄마에게 하도록 했을까, 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큰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할머니가 안방을 차지했다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시절에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는 게 문제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중략) ‘집처럼 편하다’는 관용구대로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 한다면 엄마에게 집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 (26페이지)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집에 대한 시절을 추억하는 동시에 페미니즘적인 에세이로 읽었다. 여성의 입장,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한 법인데, 모두에게 있었던 자기만의 공간이 엄마에게만 없었다. 집에서 머물 시간이 많지 않은 아빠에게 서재라는 공간이 있었지만 엄마에게 허락된 공간은 겨우 부엌이었다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작가가 느꼈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집은 한 가족이 머무는 장소임과 동시에 그 가족의 경제적 지표도 나타내는 법이다. 대구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성구의 고급 빌라로 이사했을 때 집이 가진 계급과 재산적 가치, 즉 자본의 속성을 알아버린 유년시절. 성년이 되어 대구를 떠나 서울로 와 머물렀던 집은 집이라 할 수 없었고 방에 살았다고 표현했다. 동생과 함께 살다가 따로 살기로 하면서, 자기만의 집에서 비로소 안온함을 느꼈다.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135페이지)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커졌다. 물론 거실의 한 벽과 부엌의 한 벽을 책으로 쌓아두고 나의 공간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퇴근 후 TV를 보는 남편을 피해 안방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빈 방을 나만의 방으로 꾸미고 싶어졌다. 그 전부터 했던 생각이지만 게으름에 아직까지 손대지 못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생각이 굳어졌다.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198페이지)
집을 추억한다는 것은 그리움의 시절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작가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을 생각하며 꾸민 사진이 실려 있다. 안방에는 꽃무늬로 된 짙은 색의 벽지, 남편의 방과 주로 집에서 작업하는 작가에 맞게 거실을 자기만의 공간으로 꾸몄다. 거실 창문에 책상을 배치하여 햇볕과 바깥의 풍경을 음미하며 작업에 임할 수 있게 했던 게 특별했다.
하재영 작가의 글은 처음이다. 비록 한 편의 에세이를 읽었을 뿐이지만 그 담담한 문체의 글에서 작가가 못다 한 말들이 많을 거로 생각되었다. 앞으로도 많은 글들이 작가만의 언어로 탄생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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