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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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구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서구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편견(오리엔탈리즘)외 에도 우리가 서구인들에 대한 편견(사실 이러한 편견을 버릴 수는 없다해도, 그 편견이 우리의 어떠한 사회적 환경에서 주어졌는 지는 이야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은 없는가?

서구 = 합리성, 이성, 진보, ......

우리는 사실 서양이 우리를 보는 것 만큼 이상이나 서양, 특히 유럽에 대한 색안경을 덧씌우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실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책임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200여년간 동양의 사유에 대해서 제국의 시선을 강요해온 열강의 사유의 책임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 관점을 우리가 내면화 한것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폰타나는, 스페인의 맑스주의 역사학자이다. 경제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유럽에서 '정통'을 입증하기 위해 구축해온 관점들을 한데 모아서 그는 '유럽'을 상상하는 '거울'이라고 보며, 사실 '유럽'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유를 '유령의 집'인냥 보여준다.(후기 中)

그는 야만의 거울, 기독교의 거울, 봉건제의 거울, 악마의 거울, 촌뜨기의 거울, 궁정의 거울, 미개의 거울, 진보의 거울, 대중의 거울 등을 통해서 그들이 상정하는 기준들 9가지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실상을 보여준다. 사실상 그들이 상정하는 기준들은 그들이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외부는 그들의 약점을 덮기 위한 기제일 따름이다. 푸코의 계보학적인 접근 처럼, '복수성과, 적자가 아닌 서자'인 유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눈여겨 보았던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사유였는 데, 초기 기독교가 다양성을 담보하고, 꼬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임에 반해 그것이 권력화 되면서 일원화 되고, 다양성에서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단 사냥'과 '반공 열풍'에 휩싸이는 것도(현재 2004년 10월의 시점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하나의 권력화 되었다는 징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수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시각은 우리의 눈에서 '색안경'을 벗겨주고, 우리의 사유에서 갖고 있는 '도그마들'에 대한 '수정'을 가한다.

이 책의 시리즈들을 읽고 싶은 욕망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멋진 저작이다. 그리고 번역도 이 정도 수준이면 매우 명쾌하게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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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세미나리움 총서 12
에릭 홉스봄 지음, 김정한.정철수.김동택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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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Uncommon people"(1998)이다. 평범하지 않은 민중 혹은 인민이 되겠다. 위로부터의 역사 기술에 익숙해져온 한국 사회의 역사관에 있어서, 이러한 시도는 흔히 아래로부터의 역사 기술에 해당하는 역사관에 입각해있다. 영국의 위대한 맑스주의 역사가인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기술되었던 능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영국 노동계급의 생활상을 이해 한다면, 이 책도 그러한 입장에 서서 기술되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E. 홉스봄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자본주의 전체의 역사'를 써온 역사가이다. 좌파 역사관의(사실상은 근대적 관점의 좌파 역사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가로서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를 써오면서 엄청난 사료들을 토대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써왔다. 지금 그의 나이가 2004년 우리나이로 현재 88세라는 것을 감안할 때, 아직도 왕성한 강의와 저술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학자로서의 성실함과 또 한편으로는 자기 관리에 투철함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그에 대한 탈 근대적 맑스주의자들의 '너무 완고하다'라는 비판도 그러한 그의 생활상에 비추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의 거시적인 '~시대 시리즈'의 정치, 경제에 입각한 저술과는 조금 다르게, 기존의 영국 노동계급과, 미주 대륙의 농민 운동, 정치적 사건들, 재즈라는 독특한 관심사에 대해서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다. 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공포가 늘상 어렵거나 쉽게 읽을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증폭시키지만, 이 책에 있는 다양한 주제들(나는 이책을 통해서 재즈 아티스트들을 재 발견했고, 그것들이 흑민들의 애환에서 출발한 '아래로 부터의 문화'라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재즈를 단순한 상층 계급의 엘리트 문화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은 머리 맡에 두고 읽어도 될만한 책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가 견지해온 뚜렷한 입장은 여기서도 일관되게 주장되는 데, 그것은 거칠게 이야기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민중의 역동성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석해온, 수동적이고 mob이라고 폄하될만큼 단순무지한 사람들로 느껴온 하층민들의 역사는 이 글의 서두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훨씬 더 역동적이며 다양하며 나름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에 돌출된 문화의 양상에도 상층계급의 엘리트 문화가 아닌 Uncommon people에 의해서 나타난 Jazz 같은 것을 볼 때 지금까지의 선입견은 정말로 오해였음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또한 농민들의 운동에 대해서 단순하게 봉기와 '여촌야도'식의 이미지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나름의 대응방식으로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농민운동'을 보여줌으로 반박한다.

2. 사회운동 혹은 정당의 몫이다.

그가 숱하게 비판하는 것들을 돌아본다면, 영국 노동당, 그리고 영국 좌파 정당의 나름의 능동적 대응 부재에 대한 것들이다. 항상 어떠한 도그마에 빠지고 그것을 확인하는 수준의 실천만을 강조해왔던 좌파 정당과 사회운동의 역사에 대해 홉스봄은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더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은 어떠한 관계에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 가를 조금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68혁명에 대한 평가는(그가 후에 평가가 온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단순하게 공산당의 무능만을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고, 그 폭발력을 간과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정당과 사회운동의 나름의 몫의 중요성은 어떤 조직에 도입하여도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덮을 때, 한국의 좌파 역사학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최근의 역동적인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들(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비는 대표적인 저작일 것이다.)이 어느 정도의 만회를 하고 있지만, 기실 입장을 제외한다면 실상 생활의 측면에서 보여지는 평범하지 않은 다양성을 가진 우리나라의 아래의 역사는 아직도 시작 단계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단순히 대중을 '변혁 주체'의 단일성에 엮거나, 전위에 의해서 이끌려 와야 하는 '대상'으로만 설정해왔던 것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는 단순히 좌파들의 책임이 아니라, 그 근저에 깔려있는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잔재가 아닐런지?

[인상깊은구절]
이로부터 나의 마지막 논점, 즉 계급의식에 이르게 된다. 나는-우리가 아는 한에서-노동자 대중의 감성과 견해를 활동가 및 투사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해 왔다. 왜냐하면 양자는 분명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 활동가들은..... 새로운 노동계급의 삶의 방식-특히 축구 문화-대부분을 극히 싫어했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의 우둔함과 나태함에 대한 증오, 조롱, 멸시를 표하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수많은 저서들도 있다. 투사들이 지닌 계급의식의 함의가 무엇이든, 대중들은 그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단순히 비정치적이고 금욕적인 하층민이나 국민 대부분을 이루는 빈민 혹은 기껏해야 자신들의 협소한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동원될 수 있는 잠재적 혹은 실제적 노동조합주의자들로 보는 것 또한 분명 잘못이다. 그들 역시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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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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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과의 유쾌한 대화?

"저항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책을 읽었을 때 홉스봄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사랑방에서 손주를 머리맡에 앉혀두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이야기들의 역사였다면, 이 책 "역사론"은 그동안 그가 기술해온 '역사 방법론'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조금 더 난해한 감이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의 문체에 젖어서 익숙하게 될 때 쯤에는, 동네 어귀에서 앉아있는 현인인 한 어르신과의 대화로 이 책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홉스봄에 의해서 비판받는 역사가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부류이다.

먼저 속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다. 맑스의 인식을 단순한 '토대-상부구조'론으로 환원하고, 단선적인 역사관 (원시 공산제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제 -> 사회주의 사회구성체)로 역사를 환원하려는,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근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홉스봄은 먼저 수행한다.

두번째는 주류의 계량사가들이다. 모든 역사현상을 수치로 환원하고, 칸트주의자들의 '의심할 수 없는 전제'에 입각한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그들은, 실제 역사가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홉스봄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세번째가 상당히 논쟁적인 부류인데, 그들은 바로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다. 그들은 중심에 대한 해체, 니체적인 상대주의를 통해서 역사를 파악하고, 생생한 구술사와 그들 나름의 계열화를 통해서 역사를 파악하려 하는데, 홉스봄은 그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사실관계의 측면을 그들이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홉스봄이 지나치게 완고한 나머지, 이 부류의 사람들의 장점을 간과한 것일 수있다. 중심과 결정론에 대한 부정이 의미하는 것이, 새로운 진리작용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역사의 움직이는 동적 측면을 강조하는 홉스봄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상당부분에서 홉스봄은 아직 이론적 입장이 완성되지 않은 '약한 고리'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는 측면도 나에게는 반비판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시기와 그의 지적사유의 풍토를 살펴보건데, 그의 저작은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으며, 고집스럽게 자신의 학문에 천착하고 다른 사유와의 접속을 지금까지 끊어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다시한번 그의 저작들의 위대한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역시 이 책을 다 덮고나서 느끼기도, '어르신 한 수 잘 배웠습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단단하고 고집스럽지만 상당히 많은 '지혜'가 들어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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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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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당히 논쟁적인 책이다.

정통 맑스주의 진영에서는 이 책을 '초제국주의적 경향'의 절정이라고 비난하고, 반대로 탈근대적인 맑스주의자들의 진영에서는 이 책이 '지나치게 구성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맑스에 대한 비판이 실제로 맑스식 쓰기의 방법을 몰이해한데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네그리에 대한 비판도 실제로는 그 나름의 방법에 대한 몰이해에서 출발할 확률이 높다.

이 책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적 권력으로 이행하는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맑스, 들뢰즈, 니체, 푸코의 개념이 낯선 이들에게는 상당히 어렵게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면 '탈영토화되고 탈중심화되다'라는 말 조차도 들뢰즈의 '천의 고원'(혹은 천개의 고원)의 개념 설정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단순한 영토에서 벗어남과 중심이 분절되는 경향으로만 포착하기 쉬우나,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은 이와는 약간 상이하다.(예를 들면 특정한 사회적 '배치'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를 포착해야 한다.) 철학자가 점차 '내공'이 쌓일 수록 말이 쉬워지고, 빨래하는 아낙도 이해하기 쉽게 글을 써야 한다는 공리가 우리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네그리는 '어려운 프랑스 철학을 더더욱 어렵게 갈겨놓은' 사상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생각들은 나름의 목적의식에 충실하기 위한 개념만 최소한의 선에서 포착하며, 그나마도 사실은 1부에서 최대한 설명하려 애 쓴다.

맑스의 "자본"을 읽을 때, 접하는 첫째의 어려움이 첫장의 '가치론'의 영역이고 가장 논쟁의 여지를 많이 주는 부분도 그 부분인 것 처럼, 네그리의 1부의 영역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의 오케스트라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이진경이 지적했듯이, 사실상 네그리는 맑스와 같이 장난질을 치고 있다.

맑스가 정치경제학의 척도로서 노동과 상품의 관계를 측정하려는 '노동가치설'의 공리를 해체하기 위해서 헤겔의 '난해한' 문투로 휘갈기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노동가치설을 신봉하는 '정치경제학'을 해체하면서 그 장을 마감하듯이(그에 관한 논의는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참고하라),

네그리 역시 맑스의 방법을 차용해서 세계질서를 고전적인 사법적 척도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로크적 전통 홉스적 전통으로 나누어 설명하다가, 결국 이를 "국내법의 유비로서만" 전지구적 법제를 파악하는 것이라며 해체시킨다. 그러한 척도는 사실상 "국제질서의 경향성을 포착하는 데" 오히려 난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난점을 제거하고 읽는 다면 네그리의 책은 노동/자본의 계급투쟁, 그리고 그를 통해서 등장하는 "제국"과 그에서 구성되는 "다중"에 대한 놀라운 설명이며, 동시에 즐거운 혁명의 '개념상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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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윤지관 외 엮음 / 당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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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영어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영어를 넘어설 수 있는가?

아니다.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영어와 밀접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매일 아침 일어나 naver에 접속하고 naver이라는 영어 스펠링을 쳐서 들어갔다 해서 우리는 영어와 뗄레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매순간 거리를 걷다 지나치는 영어 간판과 조우한다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해보자. 이 땅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가?

한 100만쯤 있어서, 평범한 다수의 영어문맹자들 때문에 이들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영어를 써야하는가?

아니면, 지나가는 외국인이, "excuse but don't you mind if I ask where the bus stop is" 따위를 물어 볼 때 대답 못하는 한심한 이들이 걱정되어서 영어를 써야하는가?

어쩌면 문제설정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영어 자체에 식민지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벌써 10년쯤 되는 이야기지만, 영어 공용화론을 복거일이 떠들고 다니던 시점을 즈음해서, IMF와 맞물려 살기 빡세진 이들에게는 '영어'가 또하나의 살기위한 지상과업으로 부과되었다.

이나영, 장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기" 같은 영화의 단상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건(주체를 분명히 하자면, 20~50대의 white color 노동자들), 우리가 이미 그 수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토익, 토플은 한국인들의 극성맞은 학습법 탓에 계속 개량되고 있고, 덕분에 ETS는 돈방석에 앉아있고, 어떤 횡포를 부려도 모두가 참아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토익, 토플점수의 수직상승에 걸맞지 않게 영어 잘하는 이들의 역설적인 부재는, 한국인들에게 더 강한 영어에 대한 압박을 넣고 있고, 이미 조기유학은 있는 자들의 특권만은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뒤죽박죽 엉켜있고, 답은 특히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그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문제제기와 나름의 답변들의 묶음이다.

어떤 이는 영어 학습법의 문제를 꼬집는가 하며, 어떤 이는 영어공용화론의 문제를 반박하며, 또 어떤이는 영어제국주의 혹은 영어 제국의 현실의 식민지적 상태에 대해서 논박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영어 학습법에 대한 담론을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 공용화론이 되도 안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탈 식민주의와 관련된 문예비평하는 학자들의 문제의식이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맥락지어진 영어의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학술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명이 학진 프로젝트에 제출하기 위해, 혹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짧게 짧게 "잽"만 날리는 글들은 별로 깊지도 않고, 잠깐 몰입할 만하면, 바로 불을 꺼버리곤 만다. 이 책의 단점도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의 들에 대해서 한번 훑고 지나가기에 기가막힌 책이고, 그러면서 그냥 자기가 신문을 보면서 요즘 같은 때 토플 대란.. 이런 문제가 나오는 구나 하면서 그냥 그것들에 대해서 탐색하기에는 괜찮은 책이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름의 모색을 하기에는 너무나 호흡이 짧은 '단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난 강내희 선생의 영어 식민지론에 대한 한권의 책을. 그리고 윤지관 선생의 책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이 책을 그냥 폄하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이 책이 도입부의 논쟁이라 생각하고, 이제 이 토대 안에서 뭔가 하나라도 싹을 움트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실용영어와 교양영어의 차이도 몰랐던 나에게 그 차이를 알려준 점에서 고맙고,  몰입교육법(immersion education)이라는 걸 알려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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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천상 공부할 팔자임을 부정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떤 직업을 잠시나마 '영토화'할 수야 있겠지만, 또 도바리치고 결국 안착할 곳은 책상다리라는 것 정도는 점차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언제나 논쟁할 거고, 필요하다면 논쟁에 필요한 말들을 위해 외국어를 기꺼이 배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어는, 같잖게 "how are you" "i'm fine , thanks, and you" "how is the weather" 따위의 반복이 아니라 Shakespeare의 시 같은 어투로 2pac 같은 리듬감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테고, Eric Hobsbawm 과 같은 글을 쓰기 위한 연장이 될 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영어와 맞닿아 있다고 단정을 하기에 그 건 너무 선별적인 집단에게만 해당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 영어가 생존의 도구임을 인지하지만 그들의 일상과 영어는 분리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영어를 강요하는 사회는 영어 실력을 숫자로 계량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수량화의 믿음과, 어떤 영어가 좋은 영어인지에 대한 판단 마저 모호함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압박을 하고 있는거다. 명확하지 않은 구분에서 영어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조차도 실제로는 뚜렷한 근거보다는 '당위'적 명제로만 제기되기에 이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의 '전사회적인' 현실적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언제 제대로 붙기나 했을까?

다른 한편으로 수용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영어는 생존의 도구가 될 따름이며, 이는 영어의 습득이 유용했던 '문화자본'을 점유한 집단에게는 '기회'로 작용하고, 반대로 그것이 어려웠던 집단에게는 차별로 작용한다. 문제는 이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구조와 맞물려있냐는 여부일 텐데, 나로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영어 조기유학이라는 것의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아닌가?

본토에서 몰입학습법에 의해서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이와(물론 말하기 듣기 뿐만이 아닌, 쓰기와 읽기가 포함된) 조악한 공교육 하에서의 영어학습자의 차이가 크다는 걸 우리는 이미 학원가의 열풍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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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커다란 틀을 다 봐야한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은 또한 구체적 대안을 위해서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의 끊을 놓는 순간, 이미 공상가가 되어버릴 거다...
 

영어 공화국 한국에 대한 책. 다시금 이 순간에 내 영어를 접하는 마음과 그것에 대한 내 '공명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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