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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윤지관 외 엮음 / 당대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는 과연 영어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영어를 넘어설 수 있는가?
아니다. 문제를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영어와 밀접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매일 아침 일어나 naver에 접속하고 naver이라는 영어 스펠링을 쳐서 들어갔다 해서 우리는 영어와 뗄레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매순간 거리를 걷다 지나치는 영어 간판과 조우한다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해보자. 이 땅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가?
한 100만쯤 있어서, 평범한 다수의 영어문맹자들 때문에 이들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영어를 써야하는가?
아니면, 지나가는 외국인이, "excuse but don't you mind if I ask where the bus stop is" 따위를 물어 볼 때 대답 못하는 한심한 이들이 걱정되어서 영어를 써야하는가?
어쩌면 문제설정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영어 자체에 식민지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벌써 10년쯤 되는 이야기지만, 영어 공용화론을 복거일이 떠들고 다니던 시점을 즈음해서, IMF와 맞물려 살기 빡세진 이들에게는 '영어'가 또하나의 살기위한 지상과업으로 부과되었다.
이나영, 장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기" 같은 영화의 단상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건(주체를 분명히 하자면, 20~50대의 white color 노동자들), 우리가 이미 그 수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토익, 토플은 한국인들의 극성맞은 학습법 탓에 계속 개량되고 있고, 덕분에 ETS는 돈방석에 앉아있고, 어떤 횡포를 부려도 모두가 참아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토익, 토플점수의 수직상승에 걸맞지 않게 영어 잘하는 이들의 역설적인 부재는, 한국인들에게 더 강한 영어에 대한 압박을 넣고 있고, 이미 조기유학은 있는 자들의 특권만은 아닌 듯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뒤죽박죽 엉켜있고, 답은 특히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그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문제제기와 나름의 답변들의 묶음이다.
어떤 이는 영어 학습법의 문제를 꼬집는가 하며, 어떤 이는 영어공용화론의 문제를 반박하며, 또 어떤이는 영어제국주의 혹은 영어 제국의 현실의 식민지적 상태에 대해서 논박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영어 학습법에 대한 담론을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어 공용화론이 되도 안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또 마지막으로 탈 식민주의와 관련된 문예비평하는 학자들의 문제의식이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맥락지어진 영어의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학술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명이 학진 프로젝트에 제출하기 위해, 혹은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짧게 짧게 "잽"만 날리는 글들은 별로 깊지도 않고, 잠깐 몰입할 만하면, 바로 불을 꺼버리곤 만다. 이 책의 단점도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의 들에 대해서 한번 훑고 지나가기에 기가막힌 책이고, 그러면서 그냥 자기가 신문을 보면서 요즘 같은 때 토플 대란.. 이런 문제가 나오는 구나 하면서 그냥 그것들에 대해서 탐색하기에는 괜찮은 책이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나름의 모색을 하기에는 너무나 호흡이 짧은 '단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난 강내희 선생의 영어 식민지론에 대한 한권의 책을. 그리고 윤지관 선생의 책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이 책을 그냥 폄하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이 책이 도입부의 논쟁이라 생각하고, 이제 이 토대 안에서 뭔가 하나라도 싹을 움트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실용영어와 교양영어의 차이도 몰랐던 나에게 그 차이를 알려준 점에서 고맙고, 몰입교육법(immersion education)이라는 걸 알려주어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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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천상 공부할 팔자임을 부정하지 않고 살고 있다. 어떤 직업을 잠시나마 '영토화'할 수야 있겠지만, 또 도바리치고 결국 안착할 곳은 책상다리라는 것 정도는 점차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언제나 논쟁할 거고, 필요하다면 논쟁에 필요한 말들을 위해 외국어를 기꺼이 배울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어는, 같잖게 "how are you" "i'm fine , thanks, and you" "how is the weather" 따위의 반복이 아니라 Shakespeare의 시 같은 어투로 2pac 같은 리듬감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테고, Eric Hobsbawm 과 같은 글을 쓰기 위한 연장이 될 거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영어와 맞닿아 있다고 단정을 하기에 그 건 너무 선별적인 집단에게만 해당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 영어가 생존의 도구임을 인지하지만 그들의 일상과 영어는 분리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영어를 강요하는 사회는 영어 실력을 숫자로 계량하여 판단할 수 있다는 수량화의 믿음과, 어떤 영어가 좋은 영어인지에 대한 판단 마저 모호함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압박을 하고 있는거다. 명확하지 않은 구분에서 영어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조차도 실제로는 뚜렷한 근거보다는 '당위'적 명제로만 제기되기에 이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의 '전사회적인' 현실적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언제 제대로 붙기나 했을까?
다른 한편으로 수용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영어는 생존의 도구가 될 따름이며, 이는 영어의 습득이 유용했던 '문화자본'을 점유한 집단에게는 '기회'로 작용하고, 반대로 그것이 어려웠던 집단에게는 차별로 작용한다. 문제는 이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구조와 맞물려있냐는 여부일 텐데, 나로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영어 조기유학이라는 것의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 아닌가?
본토에서 몰입학습법에 의해서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운이와(물론 말하기 듣기 뿐만이 아닌, 쓰기와 읽기가 포함된) 조악한 공교육 하에서의 영어학습자의 차이가 크다는 걸 우리는 이미 학원가의 열풍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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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커다란 틀을 다 봐야한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은 또한 구체적 대안을 위해서 필요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의 끊을 놓는 순간, 이미 공상가가 되어버릴 거다...
영어 공화국 한국에 대한 책. 다시금 이 순간에 내 영어를 접하는 마음과 그것에 대한 내 '공명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