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비판총서 4
차문석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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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인간의 해방인가? 아니면 맑스의 '고타 강령'에 나오는 이행의 법칙을 지키기 위한 교조적 해석이었는가?

아니 차라리 이러한 물음들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데에서 오는 편향(서구의 우파 지식인들의 '전체주의 국가' 규정), 혹은 스탈린 주의가 다 망쳐 놓았다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국가자본주의' 규정등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게 하는 데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자, 현실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어떤 연유인가?

차문석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반노동의 유토피아'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이다.

기존의 연구가 현실사회주의국가 들에 대한 대외관계 혹은 정치체제에 고착된 연구들이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오히려 맑스의 그것 처럼, '노동' 그리고 '생산체제'에 집중한다.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라는 부제에서 잘 보여지듯이, 그는 '생산관계'의 모순과 그것을 규정하는 '생산체제'(상부구조)의 양상을 통해서 현실사회주의를 파고 들어간다.

이진경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의 논의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주체생산양식'에 주안점을 두고 '근대인' 양산의 '사회학적 분석'을 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차분하게 '자본'에 나왔던 맑스의 담담하고 뚝심있는 분석을 다시 보여준다.

20세기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한 소련, 그리고 중국, 북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사회주의'체제를 확립하지만 결국에는 몇가지의 차이를 빼고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구 자본주의 팽창 단계에 1차 상품 수출국, 농업국,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산업화의 이니셔티브를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국가/외국자본의 후원 하에 수행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혁명 후 '맑스의 꿈' (자유로운 인간들의 발전이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는...)을 이루려 할 때의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이들은 맑스의 '고타강령'의 고답적인 논의를 따라 생산수준을 창출하려 했다.

하지만 명제의 모순은 있다. PT독재가 사회주의 '국가'의 독재는 아니며, 생산의 사회화가 생산의 국유화는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하였고,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따라잡겠다는 근대적인 신념이 작용하였을 때, '사회주의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산업화를 위하여 사회주의 노동의 '신화'(J. Calvin 류의 금욕적이고 노동숭배론적인)는 도입될 수밖에 없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노동자국가'를 위한 '노동'이 다시 강요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국가에서 "레닌과 뜨로츠끼 등 볼셰비끼들이 추진한 산업주의 국가화에 대대적으로 저항했던 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p.43) 즉, 노동자 국가에서 그 국가에 칼을 꽂은 것은 노동자 국가였던 것이다.

이는 생산성의 마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사회주의의 이상을 전유하려 계급(노동자 계급)에게 다시 억압기제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생산력주의, 산업주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그것들은 과연 성공적으로 '사회주의 강성대국'으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었을 까?

모두다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노동자 통제 => 기술자 => 당으로 전이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노동체제를 구축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했지만, 실제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의 유동은 극심하였고, 노동 규율은 작동하지 않았다. 매년 초과 달성을 위해서 낮은 목표를 할당받으려 애쓰는 공장장들, 그들과 흥정하는 간부들,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브로커들.....

또한 노동자들은 억압적으로 다가오는 국가의 원자화 전략에 의해서 조직되지 못했지만(노동조합의 국가화의 영향), 개개인의 태만 등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 노동'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원했던 것은 '프로메테우스 적'인 강고한 의지(스따하노프 운동이 보여주듯)를 가진 생산력 향상의 전사들이 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적은 거의 없고, 늘쌍 '형식주의 비판이 '형식주의'' 식의 만성적인 타성에 찌들었고, 이는 결국 그들 체제의 한계와,, 다시 자본으로의 투항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노동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시베리아 탄광의 강제 노동'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는 '태만'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지도 않고, 결의 없이 무기력한 모습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 까? 계획이 문제였을까?

차문석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열정, '사회주의적 인간'-적어도 연대성에 적합한 심성들을 표출시킬 수 있는-을 형성시키기 위한 계몽주의적 과제, 미래 사회를 열 수 있는 개방적 제도들 등 모든 가능태들은 생산성 중심주의의 깃발을 든 산업주의의 파시즘적 운동 에너지 속에서 사라졌다. 이 사회들의 해방적인 근대성은 모두 생산성에 종속되어 설명되었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오히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결계를 다시 '현실사회주의'를 통해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또한 이 책은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능동적인 자발성'을 다시한번 역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인상깊은구절]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의 삶과 노동을 일치시키는 것, 더 이상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로부터 나온 선물이다.
물론 이러한 선물은 기존의 노동 신화를 찢어버리고 그것의 해방의 메시지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 때야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속성들 중 긍정적인 부분들-시장과 경쟁이 아니라 연대와 공존-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차원의 고민도 병행되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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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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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수능 논술과,, 언어영역을 위해서,, 짧은 지문으로 본적이 있었다.. 그 교재에서는 판에 박힌 "절대자"라는 정답을 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23살이 되어서,, 읽어본 "고도를 기다리며" "뭐 하지?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라는 말들로 계속 이어지는... 근대인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려고 했으나 , 나에게는 난해했다. 나는.. 시공간 관념없고, 계속 망각하는 고고인가,, 아니면,, 이지적이나,, 결국엔 고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디디인가?

계속 차분하게 전개되나,, 그 이면에 감춰진 단조로움의 '비극'... 삶을 포기하고 싶으나,, 밤마다 찾아오는 소년.. 내일은 고도가 온다고... 분명 만났었는 데,, 만난적 없다고 하는 소년... 희망을 주는 것 같으면서,, 너무나 덤덤하게 희망을 말하는 소년... 럭키와 포조... 노예의 삶을 살면서,, 계속 장광설을 늘어대는... 순응된 인간형의 럭키.. 장광설을 하지만,, 결국엔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는 럭키를 보면서.. 왠지 모를 비애감을 느꼈다면,, 나도 럭키에 가까운 걸까?

결국 오지 않을,,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고도... 우리가 어딘가,, 갖고 있는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하지만 결국 좌절해야 함에도 좌절조차 못하게 하는 비극...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비극을 멈추게 하는 '단절'이 아닐까? 희망은 다시 이 곳에서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야 하는게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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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대담 시리즈 2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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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큼 도발적인 책으로 보기는 어려운 책이다.

요즘 한참 잘나가는,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서양철학(맑스주의, 문화철학)을 공부한 김용석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성으로 동양철학을 사유하는 이승환이 만난다.

시종일관, 이승환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감을 앞세워서 선입견을 먼저보여주지만,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그의 '문제설정'에 의한 사유에서 오는 것이었으리라..

상당히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서 몇가지는 공감하고(자본주의 근대의 폐혜 =>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 몇가지는 계속 부딪히면서(옥시덴탈리즘:서양에 대한 편견,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편견) 합의라기 보다는 김용석이 져주는 분위기로 논의를 한다.

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세상에 적용될 수 있는 지를 볼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기실. 우리에게 주어진 서구적(게다가 자유주의 - 칸트, 데카르트, 로크, 베이컨, 논리실증주의 편향) 사유의 근거없음을 우리는 너무 믿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다만,, 김용석의 '형식 논리'에 대한 강조는 맥락을 이해하더라고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그들의 전제 없는 논리의 강조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맥락적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사실,,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조차도 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새로운 사유의 질료로 쓸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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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논술.토론.교양의 심화를 위한 43개의 주제와 43명의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8
김용석.이재민.표정훈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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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학회에서 뭔가의 책을 '연구'하면서 본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책은 부실한 책이다.

여러가지 서평들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 책에 들어간 필진의 능력은 정말 천차만별이다. 특히 그러한 문제는 6장 인생에 나온 필진이나, 2장 과학기술의 나온 필진중 몇은,, 아무런 근거 없는 사유 따위에 근거하고 있다.(유전자 결정론의 근거를 결정론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하거나, 종교의 절대적 사유를 보여주기 위해 매슬로우 식의 천박한 미국제 사유에서 빌려오기도 하며,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어떠한 전제도 없이-현대 철학의 논점을 파악하지도 못한채- 보여주기도 한다.)

프랑스 바칼루레아 철학시험 답안지인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의 대쌍이 되기에(속된 말로 "고삐리"들의 사유수준)에도 턱없이 모자란 대학 교수, 각계 전문가 일부의 글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기 그지 없다.

다만 이 책의 강점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서 아젠다를 던진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학회 소모임에서 읽기에는 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읽어볼만한 책들을 제시했다면,, 한철연의 "삶과 철학" 보다 오히려 높은 교양서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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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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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서구에 대한 관점은 어떠한가? 서구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편견(오리엔탈리즘)외 에도 우리가 서구인들에 대한 편견(사실 이러한 편견을 버릴 수는 없다해도, 그 편견이 우리의 어떠한 사회적 환경에서 주어졌는 지는 이야기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은 없는가?

서구 = 합리성, 이성, 진보, ......

우리는 사실 서양이 우리를 보는 것 만큼 이상이나 서양, 특히 유럽에 대한 색안경을 덧씌우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실 그것이 반드시 우리의 책임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200여년간 동양의 사유에 대해서 제국의 시선을 강요해온 열강의 사유의 책임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 관점을 우리가 내면화 한것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폰타나는, 스페인의 맑스주의 역사학자이다. 경제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유럽에서 '정통'을 입증하기 위해 구축해온 관점들을 한데 모아서 그는 '유럽'을 상상하는 '거울'이라고 보며, 사실 '유럽'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유를 '유령의 집'인냥 보여준다.(후기 中)

그는 야만의 거울, 기독교의 거울, 봉건제의 거울, 악마의 거울, 촌뜨기의 거울, 궁정의 거울, 미개의 거울, 진보의 거울, 대중의 거울 등을 통해서 그들이 상정하는 기준들 9가지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실상을 보여준다. 사실상 그들이 상정하는 기준들은 그들이 그들을 옹호하기 위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외부는 그들의 약점을 덮기 위한 기제일 따름이다. 푸코의 계보학적인 접근 처럼, '복수성과, 적자가 아닌 서자'인 유럽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눈여겨 보았던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사유였는 데, 초기 기독교가 다양성을 담보하고, 꼬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임에 반해 그것이 권력화 되면서 일원화 되고, 다양성에서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기제로 작용했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단 사냥'과 '반공 열풍'에 휩싸이는 것도(현재 2004년 10월의 시점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하나의 권력화 되었다는 징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수정주의'라 불리는 그의 시각은 우리의 눈에서 '색안경'을 벗겨주고, 우리의 사유에서 갖고 있는 '도그마들'에 대한 '수정'을 가한다.

이 책의 시리즈들을 읽고 싶은 욕망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멋진 저작이다. 그리고 번역도 이 정도 수준이면 매우 명쾌하게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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