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개정판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기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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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밑그림, 과연 올바른가?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여)를 믿는 이들은 왜 예수를 그리스도, 주로 모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하나님과 우리를 매개해 주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기적 때문인가?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서가 그것을 증언하고 또 예수의 나타남과 그 행위들로서 그의 선포(케리그마)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믿는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서 그 '주'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로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그리 고귀한 신분에서 태어났으리라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어느날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여러가지 이적을 선보이고 또,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강변하며,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아라 칭하기도 하며, 왕이라 말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정통적인 기독교 인들의 해석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고 '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존 도미닉 크로산은 그런 입장을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고 이것에 도전한다. 도대체 크로산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역사적 예수, 그를 찾아보기

저자는 역사에 나타난 예수의 기록들을 찾아봄으로써 예수의 밑그림을 그린다.
 
그는 철저히 기록을 찾는데, 여기서 몇가지 선행적으로 알아야할 사실 들이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순서대로 마태-마가-누가-요한의 순서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성서의 자료의 출처를 토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기록의 순서는 Q 복음(Q 문서)가 제일 먼저가 되고, 마가복음이 먼저 출현하며, Q 복음과 마가복음을 가지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각자의 공동체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마가복음에서는 그대로 쓰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자'로 변모하는 것은, 당시의 마태의 공동체(교회)에 적실한 표현을 찾다가 그러한 표현을 완성했다는 것이 옳다.
 
이책은 철저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기록들을 점검한다.
 
1. 예수에 대해서 우리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십자가 못박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것들은 구약성서의 알리바이에 의해서 다시금 연속선상의 것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중 몇가지는 당시 영웅의 설화, 즉 세례 요한, 모세의 이야기 같은 설화들과 연속선상에서 같은 플롯에 맞춰졌다고 봐야 하는 측면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출생에 대한 이야기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순박한 것이 된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다면, 복음서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분석적 자세로, 문헌 비평적 자세로 다가가야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2. 예수가 살던 시절의 시대적 상황을 점검해 봐야한다. 당시엔, 예수가 아니고도, 무장봉기 세력(자칭 메시아들)도 있었고, '묵시종말론'에 근거한 세력(세례요한을 비롯)도 있었다. 예수도 한 때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입장에 다가가기도 했으나, 세례 요한의 죽음의 시점을 즈음하여 '종말론'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묵시종말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한 세계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즉 모세, 다윗,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유대적 전통이다), '종말론'은 문화와 문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며, 세상의 가치와 소망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뜻한다(p.101). '자칭 메시아들'과 '묵시종말론자'들이 정치적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면, 예수는 오히려 더 깊은 층위에서 '사회적 변혁'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것은 바야흐로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만일 하나님이 즉시로 직접 다스리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p.105).
 
   

먼저, 예수는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가정 마저 공격한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법,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법, 학대하고 학대당하는 법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배우는 장소이다. 가정에도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되고 나아가 권력이 남용되기 때문에, 가정은 결코 안락한 평온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집단은, ...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진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는 권력 남용, 곧 권력을 좇아 나는 검은 망령이요 죽음의 그림자인 저 끔찍한 권력 남용을 부정한다(pp.112-113).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의 '가족경영'을 떠올린다면 이런 의미는 곧바로 사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 거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었던 것 만큼, 지금에 와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는 말이되며 급진적인 실천의 명제가 된다.

또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마태는 그것을 '마음'이라는 말로 환원하기까지 하나, 기실 예수가 지칭한 것은 '상대적 가난'이 아닌 '극빈'이 되며, 그것은 구조적인 '불의'에 대한 발언이었다. 당대의 식민지 치하의 죽어가는 농민들을 생각해 볼 때, 혁명론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 계급이 그를 좋아했을리가 만무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항상 떡과 생선, 혹은 떡과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잔치'같이 치뤄냈던 예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이땅에 나타나,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박힌" 이야기 따위의 '비장한' 예수가 아니라, 현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그가 그의 제자됨을 청하는 이들에게 말하는 운동, 혹은 선교의 자세이다. 예수는 전대나 지팡이 없이, 다니면서 '치유와 식사'를 행하고 다니라 말했다. 언제나 공동체적 의존을 하고, 어떤 곳에 터를 잡고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한회귀'를 하면서 유목하는 것이었다. 노마디즘의 주장처럼 유목의 목적은 그가 발닿는 곳의 파괴가 아니라 그곳에 '치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외에도 이 책은, 기존까지 내가 기억하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라는 고민을 준다.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더이상 내게 예수는 공허한 '하늘나라'의 초상에 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내게 현재적인 실천과 내가 발딛고 사는 사회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기를, 그리고 그를 따라 낮은 자와 연대하기를, 함께 유목하기를 원하는 분이 되는 것이다.


민중과 밀접한 예수, 그를 따라가기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인 '이윤의 축적'이 그나마 남아있던 '가식'조차 다 드러내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88만원 세대가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난 자꾸만 존재론 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인식론으로, 사회과학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기실 존재론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기에 언제나 찜찜함이 있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내게 도그마로 찍어누르는 '권력장치'였으나, 그것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고민은 했으되, '탈주로'를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겁냈던 것이다.

이제 그런 고민을 극한까지 밀어붙여보기로 결심했다. 경동교회에서 만났던 공동체는 나에게 그런 고민을 '실천'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주었고, 이제 그 도정에 있다.

난 어디로 갈것인가? 난 무엇을 할 것인가? 다만, 그 자세에 대해서, 출발점에 대해서 확신을 내리게는 한다. 난 낮은 자, 구조적으로 억압된 자들에게 '치유'를 선사했던 그 예수를 믿는다고.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예수를 따라하는 것에 지쳐 쉬어가더라도, 그 길 가기를 접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비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쾌한 발걸음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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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니 예뻐요~~ ^^;; 선물 잘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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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의 하나님 -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 3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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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Exodus?

마지막 권이다. 탈출의 이야기. Exodus에 대한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성경 뿐만이 아니라 많은 영화와 미디어를 통해서 대충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유대민족의 애굽(이집트)에서의 탈출 이야기임을. 하지만 저자는 조금 더 나아간다.

   
 

 처음에 말했듯이 '출애굽'의 의미를 단순한 민족 공간 이동이 아니라 부자유에서 자유로, 구속에서 해방으로 인간과 세계가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그보다 더 큰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따라서 출애굽 이전의 모든 역사가 바로 출애굽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게다. 서양 속담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마침내 전 인류의 거대한 '출애굽'으로 이어진다는 게 아버지 생각이야.(p.34)

 
   

결국 출애굽은 단순한 애굽에서 탈출한 유대민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의 해방의 역사이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질 역사가 되는 것이다.

1권 <예수의 삶과 길>, 그리고 2권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통해서 주었던 메시지를 생각해 보건데, 3권의 결론은, 다시 어느 정도 주관적인 관점으로 회귀하는 인상이다. 예수가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낮은 자(신분, 계급상으로 비천한자)였고, 그런 메시지들이 어느 정도 전복적 의미를 나에게 주었다면, 2권의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왔던 '존재'에 대한 명제(하나님의 명을 받은 자로서의 인간)들에서 부터 사실 아리송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내가 유물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고, 또 한편으로 무신론자(사실은 범신론자)에 가깝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는 결론 인지는 몰라도, 3권의 출애굽->탈출이 주창하는 '결단'에 대해서 난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 '결단'들이 말하는 바가, 자기 희생을 언제나 이야기 하고, 죽음으로 산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여전히 난 어떤 '감화'를 이야기하기 아직 이른 것 같다.

   
 

언제나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뜻(명령)을 앞에 모시고 그대로 따를 것!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기본자세야. 중요한 얘기니까 한 번 더 되풀이하마. 하나님 앞에, 사람 뒤에! 알겠지? 따라서 만사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조심 삼가면서 걷게 되는 거야. 그래서 어떨 때는 한없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거란다. 앞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는 떠날 수 없으니까.(p.249)

 
   

이런 말들에 대해서 난 크게 agree/disagree를 할 수가 없다. 아직 내가 망설이고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메시지들이 어떤 설득이나 감화로 다가올 수 있는 지에 대해서 21세기에 살고 있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자 좌파인 나는 여전히 어렵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의 품성에 감화되지만, 여전히 그 메시지에 대한 그런 경건한 말씀 그 자체로는 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내 주위의 제 조건들과 관계들에 대한 고찰을 더 하게 되는 게 내가 주로 갖게 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건데, 예수의 맑은 눈, 하나님의 명을 그대로 이행하는 맑은 영혼은 여전히 나에게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지행합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기실 그런 이유에 있을 것이다. 알기만 하는 지식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 무언가 실천지(praxis)로 전환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기실 실존적인 의지,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는 거다. 그게 출애굽의 메시지일테다. 그렇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정안에 인간은 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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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교회 -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 2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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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 두 번째 권이다. 첫권에서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기점으로, 이제 기독교인과 사회에 대한 문제를 건드린다. 항상 말이 많은 부분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에서 병리 현상으로 인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무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비판만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독교가 욕을 먹게 되는 이유는, 교회가 사회에 비추어지는 측면에 있다.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들은, 그러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현주 목사의 '지식'에 대한 그리고 '신학'에 대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인식이 있다. 중요한 건 인식(episteme)가 아니라, 실천(praxis)이다.

   
 

 누가 가르쳐줘서 그런가보다 하고 알게 되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자기가 몸소 경험하여 이게 이런 거로구나, 하고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아는 것은 많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깨달음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뿐이야. (p.13)

 어디까지나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다만 우리 인간 쪽의 응답(믿음)이 없이는 그 권이 효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뜻이니까(p.233)

 
   

따라서 예수의 구원을 믿고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실천을 담보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괜시리 도올 김용옥의 '쿵푸'(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의 단련(실천)과의 공부와의 관계.

그럼 우리는 어떤 것들을 실천해야하는가? 교회에 갖가지의 헌금을 내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일?

사실 '교회'에 대한 규정자체가 틀린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장 11~16절)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특정한 '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교회 = 교회당'으로 착각하고 있더구나. 교회당은 교회의 집회 장소일 뿐이야. 교회란 그리스 말로 에클레시아(ekklesia)인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도 회(會)는 '모임'이란 말 아니냐? 그러니 사실 '교회'는 어떤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 한, 종이에 그림으로 나타낼 수 가 없는 것이지.(p.130)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살아 계시는 거야. 아니, '그리스도는'이 아니라 '그리스도가'라고 해야겠구나. 목사, 장로, 집사, 권사, 평신도, 주일 학생 ..... 이 모두를 통해 '그리스도'가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큰일을 한다 해도 미안하지만 그건 '교회'가 아니란다.(p.130)

 
   

이런 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가? 여기에 이현주 목사의 지론이 있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생명의 부드러움과 약함이 지닌 무서운 힘을 세상에 발휘하여 강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살아 있는 공동체라는 그런 뜻 아니겠니?(p.155)

 이유 없이 오른뺨을 치는 로마제국의 그 단단하고 강함을, 십자가에 못 박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기도하는 예수의 부드러움과 약함이 마침내 이겼다는 말 아니겠니? ...    그러니 이 말씀은 무슨 뜬구름 잡자는 말이 아니라 당장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현실 문제를 정면에서 풀어나가려는 무서운 의지가 숨어 있는 말씀인 게야.(pp.156~157)

 
   

부드러움과 약함을 통한 기존 강인한 질서의 전복 혹은 변화. 그것이 요체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생에 대한 강요,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들며, 그러한 '엄숙함'이 기실 모든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멍에가 되고 억압기제가 되지 않았냐는 생각역시 든다. 그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의 문제를 난 지적하고 싶은 거다.

우리는 엄숙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신학에 대해서 꿈꿔야 하지 않는가?? 해방자라는 것 역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근본적 문제(교회와 사회의 관계, 교인이 사회에서 취해야 할 입장)을 도그마가 아닌 아젠다로 던져준다는 점에서 굉장한 성과를 나는 얻는다. 좀 더 생각과, 실천을 통해서 정리할 것이지만 사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책에서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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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평전 -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음 / 삼인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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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교회 그리고 장공

난 경동교회에 다닌다. 경동교회에 다니게 된 이유는 몇 차례 밝힌 적이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hendrix/1801079) 사회에서 유리되지 않은, 그리고 복음주의에서 가장 멀게 떨어져 있는 그런 교회를 찾고 싶어서였다. 난 하나님(하느님)에 관심이 있었지, 성서의 말과 혼합된 보수적 인식을 강요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싶지 않았고, 경동교회는 그나마 나에게 해답을 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강원용 목사님의 설교가 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곤 했다.

점차 교회 안의 모임들에 참여하게 되면서, 교회 안에 '장공 채플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난 '장공'이라는 말이, 무슨 장로회의 공동체 공간 뭐 이쯤 되는 말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 알게 된 사실로는 '장공 김재준'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창립한 사람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또 지나고 나서, 교회 도서실에서 <김재준 평전>을 발견하게 되었고, 2부 예배에 지각하여 들어가기 애매한, 좀 시간이 뜨는 그 때에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기엔 힘에 부쳤고, 그냥 다시 서가에 꽂아두고 나중을 기약했다.

최근 신학에, 내 신앙에, 또 성서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이현주 목사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민중신학에, 다른 접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경동교회, 내가 다니는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적 뿌리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되었고, 다시금 <김재준 평전>을 집게 되었다.

이 책을 쓴 김경재 목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김재준을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장공 김재준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거나, 다소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다소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김재준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면서 일생을 살았는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집필했다.(p.4)  
   

 

장공 김재준 그의 삶과 신학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나 한학을 공부하고, 민족의 독립이라는 것에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김재준에게 하나님이 영접한다.

   
 

 청년 김재준이 겪은 거듭남의 체험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도 아니었고, 단순히 전통 권위에 대한 수용도 아니었다.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과잉 흥분도 아니었으며, 도덕적 양심의 지상 명령에 대한 윤리적 숙명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들 이상의 사건이었다. 진리의 영이시요 사랑의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으로 청년 김재준의 마음을 직접 방문해 주신 사건이었다.(pp.27-28)

 
   


평생 벗이었던 송창근과의 만남과 김익두 목사 설교의 감화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p.26).

나같은 모태 신앙을 갖고 있는 이에게 기독교는 일상이었지만,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며 하루 하루가 고되었던 청년에게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특별한 것이었으리라.

20대에 교회에 빠지게 되는 대다수의 젊은이가 그렇듯, 그에게도 '감상적이요, 낭만적이며 타계적 신앙의 흔적마저도'(p.31) 보였겠지만, 김재준은 이를 실존적 문제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고민을 김재준은 흔히 보이는 뜨거운 '성령의 감화감동 충만'만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학문 탐구를 통해서 해결하기로 결심했고 유학을 가게 된다.

그의 공부과정이 특이한 것은, 그가 처음 접했던 신학이 마침 유럽에서 불어오던 '신(新)신학'의 조류였다는 것일 테고, 그 다음에 접한 신학이 극단적인 보수신학이었던 프린스턴 신학원의 그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접한 것이 그 것의 중간지점의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여서,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 식민통치가 강행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일본 지성인 사회에 자유주의 사상 기풍이 팽배하기도 하던 때였다.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교수들 중에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나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학문적으로는 자유로운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p.33)

청년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의 학문적 자유 풍토를 감사히 여겼다. 인간의 창조적인 작업은 자유로운 정신 풍토에서만 창출되는 것이요, 그러므로 모든 학원, 특히 대학의 학풍은 '자유'여야 한다는 것을 그의 평생 신조로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p.33)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요즘의 신학 학풍과는 전혀 다른 보수 신학의 총 본산으로, 전투적 근본주의신학의 총사 그레샴 매첸 박사가 가르치고 있었다.(p.39)

 
   

이런 양자의 극단적 학풍의 신학을 통해서 장공 김재준이 갖게 된 입장이라는 것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것은 크게 한국기독교의 상황에서 실천으로 펼쳐지게 된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을 때, 한국 기독교는 현재도 갖고 있는 문제의 근본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교권주의, 율법주의, 사이비 신비주의라 칭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1)관료화된 교회사회는 평안함을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고, 2)율법주의는 도덕적 도그마들로 민중의 일상에 더 강한 억압을 가하고 있었고, 그 근본에 '문자적 무오영감설'(성서의 문자하나 하나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감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것)가 있었다. 그것은 지성과의 절단을 유발했다. 3)사이비 신비주의는 복음의 예언자적 사명과 정의와 사랑을 핵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자아 망실의 황홀감과 신접 현상을 능사로 하여 몰역사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기독교를 변질시켜 버린거다.(p.48)

지금의 교회가 "성령부흥회"를 통해서 계속 뜨겁게 교인들을 불러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가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고, 교회 안에서의 계파 싸움과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씨앗이 이미 1930년대 장공이 다녀올 때부터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맞서서 여러가지 대안들 또한 탄생했다. 감리교의 이용도의 '교회부흥운동', 김교신과 함석헌의 '성서조선' 발행, 최태용의 '주체적 민족 기독교복음교회운동' 등의 종교자정운동이 시작되었다.(p.49)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를 보던 시각도, 기존의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근본주의적 교리적 이해' 뿐만 아니라, 김재준을 필두로 하는 '진보주의적 역사 이해', 정경옥의 '자유주의적 실존적 이해' 또한 가능해 지기 시작했다(p.49).

지금을 돌아보건데, 오히려 이 때가 더 탄력적인 기독교의 이해가 발달했다고 느껴질 정도다. 근본주의가 더 판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과거로의 퇴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김재준의 이러한 이해는 한신대학의 모태인 조선신학교를 통해서 발흥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장로회도 탄생되었고, 여러가지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진보적 신학이 펼쳐질 수 있는 배경으로 힘을 제공하였다. 또 '실천적 신앙' 즉 야고보적 전통의 경동교회의 초석도 김재준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또한 김재준은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써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서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재준의 삶을 만들어 낸 것은 앞서 언급한 그의 신학적 이해에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건 김경재의 말을 빌면 크게 '성육신신앙'과 '대승적 기독교론'이라고 구분할 수 있겠다.

우선 성육신신앙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적 분별력, 진선미를 증대시키고 추구하려는 선한 의지, 사랑과 정의와 자유가 숨쉬는 대동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한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품성 속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본성은 단순한 동물적 충동만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타인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면서 쾌감을 느끼려는 오만과 죄성이 동시에 공존한다(pp.140~141).

그러나 집단과 집단관계, 예를 들면 노사관계, 정당 관계, 사회계층 관계, 국가 관계, 이익단체들간의 관계는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도덕적, 종교적 설교로 그 갈등이나 대립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141)

 
   

그리고 이러한 집단 이기심은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라인홀트 니버의 영향을 크게 받은 생각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가지고 "크리스찬은 한국 역사를 그리스도 역사로 변질시켜 진정한 자유와 정의와 화평으로 성격화한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가 아니라 성육신으로 부활한 예수가 말했던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선포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 역사를 하나님 나라 역사로 변질시키는 운동"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세속'에서 '하나님 나라'에의 전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p.143)

둘째, 대승적 기독교라 할 수 있다.

   
 

 대승적 기독교는 몸으로서의 전인적 구원이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본다. 소승적 기독교는 구원을 '역사로부터의 구원' 개념으로 이해하지만 대승적 기독교는 '역사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추구한다.(p.204)

 
   

이는 기본적으로 타 종교에 대한 포용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인데, 적대적 바탕에서 '전인적' 구원은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포용'의 인식은 '역사'에 대한 이해 그 섭리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교회의 지평이 그런 축에 있으리라.

마치 이는 '똘레랑스'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은 강고히 지키되, 인정해야 할 부분은 이해할 수 있는 것. 다만 참을 수 없는 것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참여도 이러한 토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니버의 생각과 같은 사회윤리적 견해가 더해졌을 때, 그에게 독재체제와 '반민주적' 해악은 도전해야 할 실천적 문제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난해한 숙제같은 지점들이 좀 있는데, 예를 들면 장공은 적극적으로 '억압받는 자' 혹은 '눌린자' 민중의 이야기를 뽑아내지 않고, 윤리적 차원의 문제에서 접근을 멈추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민중신학에 있어서 안병무의 작업들이 한발 더 나아간 전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더 살펴봐야 겠다는 생각이다.

기실 이러한 김재준의 생각을 정리는 해봤으되, 사실 정확히 이해했다 말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것들을 생활에서 어떻게 펼쳐낼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 나에게는 더 많은 성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에서 최소한의 실천을 지금보다는 많이 만들어 내야한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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