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 개정판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기철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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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밑그림, 과연 올바른가?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하여)를 믿는 이들은 왜 예수를 그리스도, 주로 모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하나님과 우리를 매개해 주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기적 때문인가?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성서가 그것을 증언하고 또 예수의 나타남과 그 행위들로서 그의 선포(케리그마)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 믿는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 말하면서 그 '주'를 믿지 않으면, 지옥불로 떨어질까봐 겁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태어남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그리 고귀한 신분에서 태어났으리라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어느날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여러가지 이적을 선보이고 또, 삶의 자세에 대해서 강변하며,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메시아라 칭하기도 하며, 왕이라 말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정통적인 기독교 인들의 해석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고 '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존 도미닉 크로산은 그런 입장을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고 이것에 도전한다. 도대체 크로산이 이야기하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역사적 예수, 그를 찾아보기

저자는 역사에 나타난 예수의 기록들을 찾아봄으로써 예수의 밑그림을 그린다.
 
그는 철저히 기록을 찾는데, 여기서 몇가지 선행적으로 알아야할 사실 들이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순서대로 마태-마가-누가-요한의 순서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 성서의 자료의 출처를 토대로 생각을 해본다면, 기록의 순서는 Q 복음(Q 문서)가 제일 먼저가 되고, 마가복음이 먼저 출현하며, Q 복음과 마가복음을 가지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서들은 각자의 공동체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마가복음에서는 그대로 쓰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자'로 변모하는 것은, 당시의 마태의 공동체(교회)에 적실한 표현을 찾다가 그러한 표현을 완성했다는 것이 옳다.
 
이책은 철저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기록들을 점검한다.
 
1. 예수에 대해서 우리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십자가 못박혀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것들은 구약성서의 알리바이에 의해서 다시금 연속선상의 것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중 몇가지는 당시 영웅의 설화, 즉 세례 요한, 모세의 이야기 같은 설화들과 연속선상에서 같은 플롯에 맞춰졌다고 봐야 하는 측면들이 있으며(예를 들면, 출생에 대한 이야기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온 이야기들을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순박한 것이 된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다면, 복음서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분석적 자세로, 문헌 비평적 자세로 다가가야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2. 예수가 살던 시절의 시대적 상황을 점검해 봐야한다. 당시엔, 예수가 아니고도, 무장봉기 세력(자칭 메시아들)도 있었고, '묵시종말론'에 근거한 세력(세례요한을 비롯)도 있었다. 예수도 한 때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입장에 다가가기도 했으나, 세례 요한의 죽음의 시점을 즈음하여 '종말론'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묵시종말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통한 세계의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즉 모세, 다윗,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유대적 전통이다), '종말론'은 문화와 문명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며, 세상의 가치와 소망들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뜻한다(p.101). '자칭 메시아들'과 '묵시종말론자'들이 정치적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면, 예수는 오히려 더 깊은 층위에서 '사회적 변혁'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것은 바야흐로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만일 하나님이 즉시로 직접 다스리게 된다면,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p.105).
 
   

먼저, 예수는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가정 마저 공격한다.

   
 
 가정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과 미워하고 미움을 받는 법,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법, 학대하고 학대당하는 법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배우는 장소이다. 가정에도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되고 나아가 권력이 남용되기 때문에, 가정은 결코 안락한 평온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가 가정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집단은, ...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진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는 권력 남용, 곧 권력을 좇아 나는 검은 망령이요 죽음의 그림자인 저 끔찍한 권력 남용을 부정한다(pp.112-113).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의 '가족경영'을 떠올린다면 이런 의미는 곧바로 사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 거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었던 것 만큼, 지금에 와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는 말이되며 급진적인 실천의 명제가 된다.

또한,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마태는 그것을 '마음'이라는 말로 환원하기까지 하나, 기실 예수가 지칭한 것은 '상대적 가난'이 아닌 '극빈'이 되며, 그것은 구조적인 '불의'에 대한 발언이었다. 당대의 식민지 치하의 죽어가는 농민들을 생각해 볼 때, 혁명론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 계급이 그를 좋아했을리가 만무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항상 떡과 생선, 혹은 떡과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잔치'같이 치뤄냈던 예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이땅에 나타나,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박힌" 이야기 따위의 '비장한' 예수가 아니라, 현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다가오는 부분은, 그가 그의 제자됨을 청하는 이들에게 말하는 운동, 혹은 선교의 자세이다. 예수는 전대나 지팡이 없이, 다니면서 '치유와 식사'를 행하고 다니라 말했다. 언제나 공동체적 의존을 하고, 어떤 곳에 터를 잡고 정주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무한회귀'를 하면서 유목하는 것이었다. 노마디즘의 주장처럼 유목의 목적은 그가 발닿는 곳의 파괴가 아니라 그곳에 '치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외에도 이 책은, 기존까지 내가 기억하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지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라는 고민을 준다.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더이상 내게 예수는 공허한 '하늘나라'의 초상에 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내게 현재적인 실천과 내가 발딛고 사는 사회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구축하기를, 그리고 그를 따라 낮은 자와 연대하기를, 함께 유목하기를 원하는 분이 되는 것이다.


민중과 밀접한 예수, 그를 따라가기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인 '이윤의 축적'이 그나마 남아있던 '가식'조차 다 드러내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 88만원 세대가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난 자꾸만 존재론 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인식론으로, 사회과학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기실 존재론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기에 언제나 찜찜함이 있었다.

기독교는 언제나 내게 도그마로 찍어누르는 '권력장치'였으나, 그것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고민은 했으되, '탈주로'를 찾아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겁냈던 것이다.

이제 그런 고민을 극한까지 밀어붙여보기로 결심했다. 경동교회에서 만났던 공동체는 나에게 그런 고민을 '실천'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주었고, 이제 그 도정에 있다.

난 어디로 갈것인가? 난 무엇을 할 것인가? 다만, 그 자세에 대해서, 출발점에 대해서 확신을 내리게는 한다. 난 낮은 자, 구조적으로 억압된 자들에게 '치유'를 선사했던 그 예수를 믿는다고.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예수를 따라하는 것에 지쳐 쉬어가더라도, 그 길 가기를 접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비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쾌한 발걸음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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