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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교회 - 젊은 세대를 위한 신학 강의 2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10월
평점 :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 두 번째 권이다. 첫권에서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기점으로, 이제 기독교인과 사회에 대한 문제를 건드린다. 항상 말이 많은 부분일 수 있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에서 병리 현상으로 인지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무도 '예수'의 신성에 대한 비판만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독교가 욕을 먹게 되는 이유는, 교회가 사회에 비추어지는 측면에 있다.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들은, 그러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현주 목사의 '지식'에 대한 그리고 '신학'에 대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에 대한 인식이 있다. 중요한 건 인식(episteme)가 아니라, 실천(praxi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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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르쳐줘서 그런가보다 하고 알게 되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자기가 몸소 경험하여 이게 이런 거로구나, 하고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아는 것은 많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깨달음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뿐이야. (p.13)
어디까지나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다만 우리 인간 쪽의 응답(믿음)이 없이는 그 권이 효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뜻이니까(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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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수의 구원을 믿고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실천을 담보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괜시리 도올 김용옥의 '쿵푸'(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의 단련(실천)과의 공부와의 관계.
그럼 우리는 어떤 것들을 실천해야하는가? 교회에 갖가지의 헌금을 내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일?
사실 '교회'에 대한 규정자체가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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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장 1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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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특정한 '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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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이 '교회 = 교회당'으로 착각하고 있더구나. 교회당은 교회의 집회 장소일 뿐이야. 교회란 그리스 말로 에클레시아(ekklesia)인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란다. 한문으로도 회(會)는 '모임'이란 말 아니냐? 그러니 사실 '교회'는 어떤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 한, 종이에 그림으로 나타낼 수 가 없는 것이지.(p.130)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살아 계시는 거야. 아니, '그리스도는'이 아니라 '그리스도가'라고 해야겠구나. 목사, 장로, 집사, 권사, 평신도, 주일 학생 ..... 이 모두를 통해 '그리스도'가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큰일을 한다 해도 미안하지만 그건 '교회'가 아니란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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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가? 여기에 이현주 목사의 지론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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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생명의 부드러움과 약함이 지닌 무서운 힘을 세상에 발휘하여 강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살아 있는 공동체라는 그런 뜻 아니겠니?(p.155)
이유 없이 오른뺨을 치는 로마제국의 그 단단하고 강함을, 십자가에 못 박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기도하는 예수의 부드러움과 약함이 마침내 이겼다는 말 아니겠니? ... 그러니 이 말씀은 무슨 뜬구름 잡자는 말이 아니라 당장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현실 문제를 정면에서 풀어나가려는 무서운 의지가 숨어 있는 말씀인 게야.(pp.15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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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과 약함을 통한 기존 강인한 질서의 전복 혹은 변화. 그것이 요체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희생에 대한 강요,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들며, 그러한 '엄숙함'이 기실 모든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멍에가 되고 억압기제가 되지 않았냐는 생각역시 든다. 그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의 문제를 난 지적하고 싶은 거다.
우리는 엄숙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신학에 대해서 꿈꿔야 하지 않는가?? 해방자라는 것 역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근본적 문제(교회와 사회의 관계, 교인이 사회에서 취해야 할 입장)을 도그마가 아닌 아젠다로 던져준다는 점에서 굉장한 성과를 나는 얻는다. 좀 더 생각과, 실천을 통해서 정리할 것이지만 사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 책에서 얻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