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니!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탈레반의 박해를 보면서 떠오른 책이다. '환상문학'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시녀 이야기』 속 '길리어드 공화국'은 여성의 지위를 '임신 가능 여부에 따라' 철저하게 계급으로 나눈 사회다. '길리어드' 속 여성들은 '출산 기계'이기 때문에 따로 직업을 가질 수도 없고 옷도 취향대로 입을 수가 없으며, 남성과 함께가 아니라면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없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은 '사령관의 아내'다. 그녀들은 파란색 옷을 입을 수 있으며, 정원을 가꾸거나 뜨개질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녀들 밑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하녀' 계급이 있는데, 그들은 둔탁한 녹색 옷을 입고 있다. 이들 밑에는 가임기를 지났거나 불임인 여성들을 부르는 '비(非)여성' 계급이 있다. 여기에 좀 더 특별한 계급인 '시녀'들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온통 빨간색으로 몸을 가리고 있다.

발을 감싼 빨간 구두는 굽이 낮지만 그건 춤을 추기 위한 게 아니라 척추를 보호하기 위한 거다. 빨간 장갑은 침대 위에 놓여 있다. 장갑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하나씩 밀어 넣어 손에 낀다. 얼굴을 감싼 가리개를 제외하면 옷은 전부 붉은 색이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이다.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풍성한 주름 스커트이고, 드레스엔 가슴까지 이어지는 판판한 앞판과 손목을 덮는 긴 소매가 달려 있다. 하얀 가리개도 규정에 따라 지급된 보급품으로서 시야를 제한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는 목적도 있다. 나는 한 번도 빨간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7쪽

나는 국가적 자원이다. 100쪽

우리는 아기를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145쪽

'시녀' 계급은 출산을 위해 특별히 관리되는 계급이다. 만약 사령관의 아내들이 정상적으로 출산을 하지 못하면, 이 시녀들이 배정된다. 일종의 대리모 개념인데, 그녀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배정된 사령관의 이름을 따 '오브OOO' 이런 식으로 불린다. 만약 임신에 실패하거나 정상적으로 출산하지 못하면 다른 시녀가 배정되고, 그 시녀에게 그 이름이 주어진다. 시녀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모두 실패하면 비여성으로 강등되어 방사선 등으로 오염된 곳으로 추방된다. 사령관이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제 불임의 남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오직 애를 낳을 수 있는 여자와 낳을 수 없는 여자가 있을 뿐. 그게 법이다.(94쪽)

그들에게도 자유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그 시절을 '구시대'라고 부른다. 20세기 중반, 환경파괴와 인구 감소(그들은 '대재앙'이라 불렀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에서 극단적인 종교 해석과 가부장제를 내세운 세력들이 대통령을 죽이고 계엄령을 선언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인 '전체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새로운 신분증이 생겨났고, 여성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재산을 가질 수 없었으며 카드조차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낙태 수술과 재혼도 허용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직장에 다녔다는 게 이상하다. '일(Job)'. 웃기는 단어다. '일(Job)'이란 남자들을 위한 것이다. 아이들 배변 훈련시킬 때, '어디 큰일 한번 치러볼까'라고 말한다. 개한테도 쓴다. 카펫에다 일을 치렀다고. 그러면 신문지를 말아서 때려주는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다 직장에 다녔다니,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옛날엔 수천 수백만에 달하는 여자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땐 그게 정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과거의 종이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255쪽

필기도구도 없고, 글쓰기도 금지된 시기에 한때 '오브프레드'로 불렸던 시녀가 이 이야기들을 테이프에 녹음해 기록으로 남겼다. 2195년에 이 녹음테이프를 발견한 사람들은 '오브프레드'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 기록을 남기게 됐을지를 추측할 뿐이다.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기밀법 위반'이라며 밴을 탄 남자들에게 잡혀간 '오브프레드', 당시 임신한 상태로 추측되는 '오브프레드'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시녀 이야기』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마거릿 애트우드가 34년 만에 발표한 『증언들』로 이어진다. 후속작을 함께 준비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312~313쪽

나는 과거에서 온 망명자다. 다른 망명자들이 다 그러하듯 내가 두고 떠나온,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풍속과 관습을 자꾸만 그리워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면, 그런 것들이 하나같이 기괴하게만 느껴지고, 나 역시 그런 풍속들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거다. 20세기의 파리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백러시아 인처럼, 나는 하릴없이 과거를 부유하며 그 아득한 행로들을 되찾으려 한다. 나는 요즘 툭하면 눈물을 찔찔 짜고,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흐느낌. 그래, 이건 우는 게 아니라 흐느끼는 거다. 나는 이 의자에 앉아 스펀지처럼 눈물을 짠다.

그리하여. 더욱더 기다린다. 기다리는 숙녀. 옛날에는 임신복을 파는 가게들에 그런 이름을 붙였는데. 기다리는 여자라니, 기차역에 있는 사람한테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기다림이란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기다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다림'이 될 수 있다. 내게는 이 방이 '기다림'의 장소다. 여기 있는 나는, 괄호 사이의 백지다. 다른 사람들 사이의 여백이다. 227~33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