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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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라는 청춘들은 이 시대적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지난해 봄, 『엄마를 부탁해』 100만부 돌파를 기념해 신경숙 작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그때 준비 중인 연재소설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연재소설을 쓰기 위해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9시까지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고 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려면 그 전날 9시쯤에는 잠이 들어야 하는데, 강연 전날엔 밤늦도록 지인들과 함께 하느라 조금 피곤하다는 말까지 전했다. 그렇게 쓴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2009년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알라딘에서 연재됐던 작품을 단행본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초여름까지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p.374)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언제나 그것이 불만이었다. 성장소설, 역사소설, 어떤 사상이나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은 많지만 순수하게 청춘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소설 속 청춘남녀들은 질펀하게 연애를 하거나 자신의 청춘을 다바쳐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20대 청춘들을 바라보고, 또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은 매일 시위가 벌어졌던 시대에 대학생이 된 윤, 명서, 미루, 단, 이 네 청춘남녀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그 시대를 살아내는 방법이 조금씩 달랐고, 저마다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질감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함께일 때 가장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한 광고 카피처럼 그냥 서로 사랑하게 놔두면 안되었을까? 사랑하는 누군가의 실종과 연이은 자살, 그리고 자연사. 작가는 네 청춘들을 끊임없는 상실과 고통 속으로 떠민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한 미루와 단은 자살을 선택했고, 그것을 지켜봤던 윤과 명서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했지만 또다시 뒤따라올 상실의 두려움 때문에 더이상 다가가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 뒤, 자신보다 더 어린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 윤은 지금의 이십대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함꼐 있을 때면 매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p,365)

 
   

   주인공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그들은 즐겁거나 행복한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오늘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자신을 찾는 전화벨이 울리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물론이고,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쭉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괜히 마음 한 켠이 씁쓸해졌다. 난 그 수많은 이십대의 나날들을 무얼하며 지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그녀의 말처럼 누군가 그렇게 다가와주길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하는건데, 다가오는 사람마저 밀쳐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었다.

   작가의 말처럼 난 그저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을 읽길 원했는데, 그들에게 이런 아픔을 심어준 작가가 조금 밉다. 결국 '우리'라는 청춘들은 이 시대가 가져다 준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청춘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조금은 답답했고, 조금은 속상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의 문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품격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문장은 나지막하면서도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엄마를 부탁해』처럼 가슴 한켠이 떨어져 나갈듯한 울컥함은 없었지만,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 때문에 호수 위에 서서히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랬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소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아마 나였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속상했었나보다. 그게 바로 나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이니까.

10-095.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2010/08/18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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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ㅣ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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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와 종교의 역할에 대한 명쾌한 과학적 탐구! 

   과학자 칼 세이건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과학을 이용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길 원했다. 그래서 『코스모스』와 같은 책을 쓰고 대중들 앞에서 강연도 자주 하며, 대중들이 과학과 친해질 수 있도록 했다.
   『과학적 다양성』은 1985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린 칼 세이건의 기퍼드 강연을 정리한 책으로, 그는 아홉 차례의 강연을 통해 종교와 신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종교의 역할 혹은 기능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종교의 장점이나 기능을 인정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측면에서 종교가 활약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다만, 종교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는 영역에서 월권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다. 그는 종교의 영역을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증거와 논리로 반박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종교의 월권 행위는, 흔히 우리들이 종교에 대해서 가지는 의구심과 관련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서양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이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조설, 이 세계를 심판하거나 구원할 하느님이 재한다거나 어떤 종교적인 현상을 목격하거나 체험했다는 주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혹자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게 아니라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부정도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 세이건은 종교가 혹은 유신론자들이 하느님이 해왔다고 주장하는 업적(!)들을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며 반박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런 것들은 과학의 영역이니,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들을 들먹이며 대중들을 유혹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스터 섬의 거석상이나 버뮤다 삼각지 등에서 발견되는 미스테리한 사건들과 외계생명체에 대한 언급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외계생명체를 목격하거나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어떤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한다. 또 그런 것들의 대부분은 조작이거나 이미 과학적으로 밟혀진 것들도 많다. 
   이미 수 십 년 전에 한 사람이 이스터 섬에 가서 소규모 팀과 가장 간단한 도구만을 이용해 완성되지 않고 누워있던 거석상들 가운데 하나를 직접 운반하고 세워 보기도 했으며, 버뮤다 삼각지에서 발생하는 실종이 비슷한 날씨와 환경에 있는 다른 장소에서의 실종보다 결코 많지 않다는 것도 통계적으로 밟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물며 매체들도 여전히 그런 사건들을 미스테리한 것으로 여기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인간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고 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보다는 미스테리한 것이 더 흥미로운 일이니까. 

   한편, 강연 곳곳에서 대량 살상 무기와 핵전쟁에 대한 칼 세이건의 우려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십 억 혹은 수백 억년에 걸쳐 진화해 온 우리 인간이 한 순간에 스스로를 파괴하려 한다고 하면서, 느긋하게 해결책을 찾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휘될 수 있는 종교의 역할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굳이 하느님의 존재가 없더라도 충분히 경건해지고 겸손해 질 수 있다. 그것은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우주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알게 되고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면 스스로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는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면, 스스로를 지금보다 더 잘 이애할 수 있을거라 말한다.  

   꽤 오랫동안 내게도 종교가 있었지만, 과학 교육을 받으면서 더이상 종교를 믿지 않게 됐고 무수한 의구심만 품게 됐다. 이 책은 그런 의구심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대부분 어렵고 골치 아프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의 과학은 쉽다. 게다가 강연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 쉽게 읽히기도 하면서 곳곳에서 그의 재치를 확인할 수 있다. 
   나처럼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각 강연 때마다 주고 받았던 질문과 그의 답이 함께 실려 있다. 혹시 그의 강연을 읽으면서 그에게 반박하고 싶거나 '그래도 신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꼭 찾아보길.

10-077.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2010/08/04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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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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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로빈슨 크루소』 

1703년 봄, 런던을 떠난 셀커크는 항해 도중 해적들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들소 사냥꾼에게 팔려 3년간 들소를 잡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이 한 뱃사람 셀커크는 선장과의 불화 때문에 항해 도중 기착한 태평양의 마스아티에라 섬에 홀로 남게 된다. 그는 4년 4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1711년 10월 14일 영국 선박 '듀크호'를 만나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섬에 최초로 머물렀던 사람은 셀커크가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1680년, 어떤 배가 깜빡 잊고 떠나는 바람에 홀로 남게 된 모스키토라는 이름의 인디언이 3년 2개월 11일 만에 구출된 적이 있었다. 

다니엘 디포는 셀커크의 경험담을 토대로 『로빈슨 크루소』를 탄생시켰다. 다니엘 디포는 보다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로빈슨 크루소를 암초에 부딪혀 난파한 배의 유일한 생존자로 만들었으며, 태평양이 아닌 카리브 해의 어느 섬으로 무대를 옮겼다. 또 섬에서의 많은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체류기간을 28년 2개월 10일로 설정했으며, '프라이데이'라는 아주 순종적인 주변 인물을 등장시켰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미 고전으로 자리잡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두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뒤집어서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내가 볼 때 1719년에 나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는 극도로 충격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소설에는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어 있어요. 그는 단순히 빈 그릇일 뿐이지요. 진리는 오로지 로빈슨의 입에서만 나옵니다. 그가 백인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는 방드르디가 중요한 역할을, 아니 심지어 끝에 가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소설을 써보자는 데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의 제목을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디포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문제점은 모든 것이 회고적인 시각에서 처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과거의 영국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난파한 배의 표류물을 주워 모아 섬 안에 작은 영국 식민지를 또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빈슨은 오직 과거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죠. 나는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로빈슨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소설,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느낌 때문에 그의 건설 사업이, 이를테면 내부로부터 잠식되어 붕괴해 버리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는 방드르디가 불쑥 나타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소설을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지 상태 위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예술, 새로운 유희, 새로운 에로티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소설 속에서 방드르디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까닭입니다. 그는 미래를 열고 기획하며 로빈슨으로 하여금 과거의 재구성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Tournier, "Tournier face aux lyceens", Magazine litteraire, No. 226, 20~21쪽)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방드르디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이야기가 나누어진다. 

난파를 당해 태평양의 끝에 있는 섬에 홀로 머물게 된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힘들게 '탈출호'를 만들지만 혼자서는 '탈출호'를 바다로 끌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절망한 로빈슨은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죽은 누이동생의 환영을 보게 되고,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을 차린 그는 섬을 '스페란차(희망)'라 부르며 원시 상태의 섬을 문명이 깃든 섬으로 재건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총독이라 칭하며 헌장을 만들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섬을 다스린다. 완전히 세계로부터 고립된 그는 '스페란차'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스페란차'와 결합해 '만드라고라'라고 하는 딸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타자'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이 고독한 섬에 드디어 '방드르디'라는 타자가 출현한다. '방드르디'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로빈슨 크루소를 주인으로 모시며,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금요일에 만났다는 이유로 '방드르디(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와 함께 탈출호를 타고 스페란차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이미 탈출호는 다 망가져 있었다.  

처음 얼마동안 방드르디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프라이데이처럼 로빈슨 크루소를 주인처럼 잘 모셨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처럼 문명에 길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 방드르디는 그동안 로빈슨 크루소가 일궈 놓은 문명의 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개를 구하기 위해 논에 물을 빼는가 하면, 염소들을 모두 풀어주고 로빈슨 크루소가 아껴둔 담배를 몰래 피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문명의 섬을 가꾸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이 방드르디의 원시적인 생활을 배워간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자른 로빈슨 크루소는 점점 방드르디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로빈슨 크루소에서 방드르디로 넘어가게 된다.

어느날 '화이트버드호'가 스페란차에 출현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동안의 섬 생활을 정리하고 귀환하고자 한다. '화이트버드호'의 선장을 통해 자신이 섬에 표류한 지 28년 2개월 19일이 지났으며, 그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이미 문명과 멀어져버린 로빈슨 크루소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냥 스페란차에 남기로 결심을 한다. 하지만 방드르디는 몰래 섬을 떠났고, 화이트버드호의 어린 소년이 스페란차에 남는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 소년에게 '죄디(목요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배워왔듯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타자'를 원했다. 어느날 방드르디가 왔을 때 그는 방드르디를 세상의 모든 타자로 대하며,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로빈슨 크루소는 스스로가 문명인이라 생각하며 원시인을 길들이려 했지만, 새롭게 출현한 '화이트버드호'에게는 그 또한 방드르디와 마찬가지로 원시인이었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디포가 살았던 18세기에는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그리 큰 문명의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가 살았던 20세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문명이 변화하고 있었다. 28년 2개월 만에 섬을 벗어난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새로운 문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페란차에 머물기로 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결말은 투르니에의 '뒤집어 쓰기'가 아니라 변화를 정확하게 감지한 '바로 쓰기'가 아닐까.

<밑줄긋기>

존재하지(ex-siste) 않는 것이 고집한다(in-siste). 존재하려고 고집한다. (···) 나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나 자신의 확신은 그 확신에 반대하는 만인의 생각과 맞서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로빈슨의 시체의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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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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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가 연출가가 되어 읽어라!
   과연 희곡 작품을 책으로 읽고 그 울림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그런 이유로 제목을 볼 때마다 '고도'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쉽게 펼쳐들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사뮈엘 베케트를 꼽은 가수 이적은 "본인 스스로가 연출가가 되어서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며 추천했다. 또, 그 자신이 베케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글쓰기가 시작됐다고도 했다.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궁금증을 이제는 풀 때가 된 것 같다. 

막연한 기다림, 그들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달랑 한 그루의 나무만 있는 황량한 언덕의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의미없는 대화들을 주고 받으며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 온다고 했던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 그저 심부름꾼을 보내 내일 온다고 할 뿐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렇게 매일을 이 언덕에서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고도는 언제 온다는 말인가? 차라리 내일 온다는 말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서 그만 기다리고 돌아가자고 하지만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할 뿐인 그들처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들을 보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올지 모르는 고도는 그들에게 '희망 고문'이다. 우석훈은 『88만원 세대』를 통해 현재의 시대가 20대들에게는 희망 고문이라고 했다. 물론 희망 고문을 받고 있는 사람은 20대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는 나아질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안고 달려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고. 

당신이 기다리는 '고도'는 누구인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경주와 같은 옛 수도 古都도, 높이를 의미하는 高度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고도의 정체는 밝히지 않고 있다. 고도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어떤 이들은, 고도(Godot)가 영어의 'God'와 프랑스어의 'Dieu'의 합성어라고 하며 "고도=신"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뮈엘 베케트 조차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며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뒀다.

   '고도'의 의미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기다리는 고도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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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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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어머니를 향한 애도 작업!
   우리에게는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으로 잘 알려진 페터 한트케는 베케트 이후 가장 전위적인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소망 없는 불행』은 그가 서른살 되던 해 부인과 헤어진 후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을 때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무감각해졌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그전처럼 고통 없이 잘 지내게 된다는 것이 끔찍했다고 한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첫번째 이유는 종교적이니 심리학적이니 사회학적인 꿈 해석 운운하며 이 흥미로운 자살 사건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도 있을 어떤 낯선 인터뷰 기자보다는, 내가 그녀에 대해서, 또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다. 가령 무언가 할 일이 있으면 나는 기운을 얻는다. 마지막 이유는, 방식은 좀 다르겠지만 마치 인터뷰 기자처럼 이 자살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p.12) 

   이렇듯 한트케는 어머니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김형경 작가는 심리에세이 『좋은 이별』에서 이것은 죽은 어머니를 떠나보내기 위한 일종의 애도 작업이라 언급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한트케는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였지만,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는 객관적인 글쓰기를 유지하려 한다.  

   만약 <이야기는 ……로 시작되었다>라고 서술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것이 꾸민 것처럼 보일 것이며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사사로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낼 이야기를 전하게 될 것이다. (p.13) 

   『소망 없는 불행』과 함께 실려 있는 『아이 이야기』는 연극 배우였던 첫째 부인과 헤어지면서 혼자 딸 아이를 기르며 겪었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원래 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피붙이조차. 게다가 작가였던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대작을 쓸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딸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피붙이는 물론이고 아이라면 누구든 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남자는 전에는 아이들을 모두 다른 종류의 종족으로 보았다. 때로는 <절대 사로잡히지 않는> 잔인하고 자비심 없는 적대적인 종족으로, 심지어는 식인종처럼 야만적인 종족으로 보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인간의 적은 아닐지라도 불성실하고 무익하며 전혀 상식이라고는 없는, 흥에 들뜬 군중이며 무리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지내지 않고 오래 함께 지내면 정신을 빼앗아가, 자신을 멍청하게 만드는 종족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상기되는 이와 같은 가치 평가에서 자기 피붙이도 제외시키지 않았다. (p.168)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자인 그는 아이들이란 누구든 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또한 기대되는 어떤 존재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 이 새로운 의식과 함께 언제나 똑같은 가능성들이 시작되었고 혼잡한 가운데 아이들의 두 눈은 ─ 그 눈을 보아라! ─ 영원한 정신을 전해 주었다. 만일 그런 시선을 못 본다면 그대는 정말 안됐다! (p.170~171) 

   페터 한트케는 '자기 자신'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자신의 이야기들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써낸 『소망 없는 불행』과 『아이 이야기』는 그의 관심과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관객모독』은 더이상 팔지 않는다. 최근 몇몇 출판사에서 그의 저작들을 새롭게 출간하고 있는 것에 힘입어 그의 대표작 『관객모독』도 재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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