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9쪽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2쪽

   책 좀 읽어본 사람들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처음'이면서도 '다시'라는 말을 붙여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든 책이긴 하지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다시 읽습니다. 이전에는 끝까지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읽어냈습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가 아니지만, 결말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스킵해 주세요.
책의 목차를 살펴보는 것도 삼가해 주세요. 책의 목차만 봐도 결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아버지 표도르는 첫번째 아내와의 결혼에서 큰아들 드미뜨리와 상당한 재산을 얻습니다. 그녀가 죽자 두번째 아내와 재혼해 이반과 알료샤를 얻지만, 그녀 역시 죽어버립니다. 표도르는 부성애가 전혀 없는 인물로 세 아들들을 방치하다시피 하며,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키워져 다른 길을 갑니다. 드미뜨리는 군사 학교를 졸업 후 군인이 되고, 이반은 대학을 졸업한 후 논문을 쓰며 지식인으로 거듭납니다. 셋째 알료샤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시마 장로의 제자가 됩니다.
   죽은 어머니의 유산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던 드미뜨리가 아버지로부터 그 몫을 받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온가족이 오랜만에 달갑지 않은 회합을 하게 됩니다. 그 회합은 알료샤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에서 조시마 장로를 모시고, 이반이 아버지와 큰형의 중재 역할을 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지만 아버지의 치사한 광대짓으로 그 회합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아버지 표도르와 드미뜨리는 금전적인 문제뿐 아니라 한 여자 때문에 서로 얽혀 있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만 하고 있고 진짜 마음은 5년전에 자신을 버리고 간 폴란드 신사에게 가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난폭하고 욕정이 넘쳤던 드미뜨리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싸우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기도 합니다. 또, 그루셴까와 아버지가 자신 몰래 만날까봐 두 사람을 감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표도르가 죽습니다. 누군가 집안으로 침입해 흉기를 휘둘렀고, 심지어 돈까지 훔쳐갔다고 합니다. 어린 드미뜨리를 키웠던 하인 그리고리는 도망치는 드미뜨리에게 맞아 머리를 다치기도 합니다. 모든 정황과 증인들이 드미뜨리가 '친부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눈물 덕분인지,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기도드린 덕분인지, 아니면 그 순간 성령이 내게 입을 맞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악마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창문에서 물러나 담장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때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창문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장면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담장으로 향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갔습니다…….그런데 내가 담장을 넘으려는 순간 그리고리가 뒤쫓아와서……." 825쪽

   "나는……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창문 아래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826쪽

   "나는 죽이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죽일 수도 있었고,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으며, 내 수호 천사의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비열한 것입니다, 비열하단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죽이지 않았다고요!" 830쪽

   정말 드미뜨리는 친부 살인범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모든 정황과 증인들이 일관되게 한 사람을 지목할 때는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범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평소 드미뜨리의 행동과 말을 고려했을 때, 약간의 트릭만 준비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드미뜨리의 변호사 페쮸꼬비치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적어도 단순한 선입관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파멸시키는 일은 주저했을 겁니다. 물론 우리의 피고가 그런 선입견을 갖도록 만들었더라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286쪽

   "여러분들은 러시아의 재판이 단순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멸된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는 법률과 형벌이 존재할 뿐이라면, 우리들에게는 영혼과 사상이, 파멸한 인간의 구원과 부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 우리 피고이 운명은 오직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러시아의 운명도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구해 내실 것입니다." 1298쪽

   변호사가 검사 측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는 20년형을 받아 시베리아로 떠나야 합니다. (←※)

   『죄와 벌』처럼 재판 이후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야기가 더 나올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사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미완성 작품입니다. 애초에 도스또예프스끼는 2부작으로 기획했지만, 첫 번째 이야기를 완성한 지 3개월 후에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름나름으로 상상해 볼 수 밖에요.

   결말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줄거리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친부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누는 수많은 지적 대화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재판이 끝난 이후 도스또예프스끼는 일류샤의 장례식을 한 에피소드로 보여줍니다. 한때 드미뜨리는 술을 마신 후 일류샤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행패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이를 본 일류샤는 우연히 만난 알료샤의 손가락을 깨물어 버립니다. 일류샤의 이런 사연을 알게 된 알료샤는 그때부터 줄곧 일류샤를 후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일류샤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일류샤의 장례식에 참석한 알료샤는 이런 조사를 남깁니다.

   "어린 시절에 간직했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겁니다.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1345쪽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드미뜨리를 구원해 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결국 구원받지 못한거죠. 하지만 알류샤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의 세대는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들은 구원 받을 수 있길 바라며 조사를 남깁니다.

   이렇게 에피소드들은 태형, 학대, 종교, 심리분석, 교육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로 거론되며, 우리는 이 에피소드들을 통해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과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버려져야 할 논제들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 많습니다. 시대가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은걸까요?
   그러므로 이 책은 쉽게 읽히거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며, 단 한번만 읽어서도 안되는 '고전'입니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12쪽


   너도 까라마조프에 불과해, 너도 완전히 까라마조프라고. 144쪽

   저는 형님 이야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게 아니에요. 형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형님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은 하나의 똑같은 사다리예요. 저는 가장 낮은 계단에, 형님은 열세 번째 계단의 어느 높은 곳에 있을 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똑같은 부류일 뿐이죠. 맨 아래 계단에 발을 디딘 사람은 어쨌든 반드시 위의 계단으로 올라가게 마련이죠. 194쪽

   그런데 요즘 정신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도,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정신병을 앓고 있고, 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1002쪽

   내가 지금 심리 분석을 해본 것은 인간의 심리란 마음대로 자유로이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심리라는 것은 가장 성실한 사람마저도 부지불식간에 소설가로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나는 심리 분석의 악용과 남용을 감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1264쪽

   만일 어떤 사람이 자다가 별안간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잠이 깬 그는 수면을 방해받은 것이 얄밉지만, 다시 금세 잠이 들겠지요, 두 시간쯤 지난 후 다시 신음소리가 나면 잠이 깼다가 또 잠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신음소리를 듣고 깨어났다가 잠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은 하루 저녁에 세 번 잠을 깼습니다. 아침이 되면 그는 누가 밤새도록 신음하는 바람에 한 잠도 못 잤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 시간씩 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일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잠이 깬 몇 분만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밤새도록 수면을 방해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284쪽

   왜 우리는 이 '불행'을 좀더 가까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12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의 온도 그날의 빛 그날의 분위기 - 스탠딩에그 여행산문집
에그2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읽은 여행에세이. 지난여름, 로마로 여행을 떠나기 전 그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여행 팁을 얻었다. 덕분에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곳들을 한적하게 둘러볼 수 있었는데, 이 책 또한 새벽 5시에 걸었던 로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음악하는 아티스트 특유의 감성이 가득한 에세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남자가 있다. 자신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꽃처럼 사랑에 사로잡힌 남자, 반면 사랑도 이성적으로 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끌어 낼 줄 아는
남자.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아침드라마에 라틴문학 특유의 환상성이 버무려진 것 같은 소설.
부디 ‘달콤‘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헬렌 한프는 뉴욕에서 평생 글을 썼지만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154쪽)라고 자평할 정도로 그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는 한 평론지에 실린 '희귀 고서점' 광고를 보고 런던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에 있는 마크스 서점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이 있는데, 만약 5달러가 넘지 않는다면 보내달라고 말이죠. 얼마 후 서점 담당자 프랭크 도엘로부터 그녀가 원하는 책과 함께 편지가 날라옵니다. 그렇게 그들의 편지는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5일에 시작된 그들의 편지는, 1969년 1월 8일 도엘이 죽었다는 편지가 날아올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것은 단순히 주문서와 청구서뿐만이 아닙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호황을 맞이한 뉴욕은 물자가 풍부했지만, 런던은 한달에 달걀 하나를 배급받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헬렌은 뉴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달걀이나 햄 같은 것들을 편지와 함께 보내주고, 서점 사람들도 사진이나 직접 짠 테이블보 등을 선물로 보내줍니다. 그들의 우정 어린 편지들은 가슴 설레게 했고, 도엘의 소식을 전하는 마지막 편지는 눈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편지들을 읽고 있는 독자가 이렇게 애틋하게 느낄 정도이니, 당연히 헬렌 한프는 런던 17번가를 뉴욕 17번가보다 더 가깝게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뉴욕 이스트 가와 런던 채링크로스 가가 지리적으로 5,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여기 이 자리에서는 런던이 17번가보다 훨씬 가깝답니다. 31쪽

   그녀는 항상 런던 채링크로스 가로 휴가를 떠나길 고대하지만, 서점 사람들이 잠자리를 얼마든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지만, 가난한 작가였던 그녀가 비행기 티켓 값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미루다보니 결국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서점을 떠나게 됩니다.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154쪽

   프랭크 도엘이 죽은 후, 헬렌 한프는 그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챙겨 출판사로 향합니다. 이 편지들 덕분에 그녀는 작가로서는 누려보지 못한 인기를 얻게 되지만, 전세계에서 날아오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느라 인세로 받은 돈이 모두 우표 값으로 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큰 신세를 졌답니다. 145쪽

   그녀는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은 기념 동판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당신도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18쪽

   여러분이 좀 덜 조심하여 카드를 쓰는 대신 속표지에다 글을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행여나 책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서적상의 본분이 거기서 발휘된 거겠죠? 현재의 소유자에게는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 답니다). 50쪽

   나도 영국행을 감행하여 나의 친애하는 서점을 직접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한테 그럴 배짱만 있다면 말이야. 5,000킬로미터라는 안전한 거리가 있기에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편지들을 써보낸 건데,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십중팔구는 내가 누군지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버릴 것 같아. 71쪽

   가장 애교 넘치는 부분에서 자꾸만 펼쳐지는 것이 마치 전 주인의 유령이 내가 읽어본 적 없는 것을 짚어주는 듯하답니다. 90쪽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138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01-18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책 이야기에 공감이^^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단편소설 「서른」, 김애란   

   '서른'이라는 단어만 봐도 감정에 기복이 격하게 생기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아마도 서른의 날들을 앞둔 분들이거나 이제 막 지나고 있는 분들일텐데, 「서른」의 화자 '수인' 또한 서른의 날들을 불안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2011년 겨울, 그러니까 김애란 작가가 만으로 서른 하나의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발표한 단편소설 「서른」은 어느 날 불쑥 날아온 한 통의 엽서에 답장을 하는 형식의 이야기입니다.

   서른의 날들을 관통하고 있는 '수인' 앞으로 한 통의 엽서가 도착합니다. 이 엽서는 10년 전 독서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인 보다 5살 많았던 언니로부터 온 것인데 당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언니는 시험도 합격하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인'도 지난 10년 동안의 일들을 써내려 갑니다. 언니처럼 엽서에 짧게 안부를 전해도 됐을텐데, 수인은 지난 10년 동안의 일들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편지를 씁니다. 10년동안 '수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로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요?

 

   어느 날 눈뜨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이전에도 채무자, 지금도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가요. (p.298)

 

   '수인'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채무자이긴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학창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천만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이 된 지금도 '수인'의 대출금은 늘어갈 뿐입니다. 열심히 살았던 '수인'의 채무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데는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 등장했던 준이 선배 보다 더 나쁜 선배가 한 몫 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소녀들은 선배 판타지를 버려야 한다니까요. ( *「너의 여름은 어떠니」 참고.)
   헤어지고 난 뒤 정말 오랜만에 말쑥한 차림으로 '수인' 앞에 나타난 선배가 "살아보니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이라며 '수인'을 데려간 곳은 인간관계의 막장을 경험할 수 있는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 즉 다단계 회사였습니다. 초기 투자금이 필요했던 '수인'은 그곳에서 엄청난 금액의 대출을 받게 되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수인'의 인간관계는 점점 막장을 향해 가고 더이상 연락할 사람이 없을 때 학생 시절 잠시 강사로 일했던 학원에서 만난 제자 혜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옵니다. '수인'은 선배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헤미를 불러내고 자신은 가까스로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 혜미로부터 걸려오던 전화를 피하기만 했던 '수인'에게 들려온 것은 혜미가 자살을 시도하고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더이상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데다가 상황이 이 정도이니 편지에라도 써야했겠죠.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p.316)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좀 더 달라지고, 나아질거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수인'은 나아지기는 커녕 전혀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전보다 더 나쁜 채무자만 되었죠. 그래서 좌절합니다. 지금의 상황에만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도요.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p.317)

 

   '수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을 오가며 얼굴이 하얗게 되도록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열심히 살았지만 꿈 조차 가져볼 수 없었던 '수인'의 좌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요.

 

   김애란 작가는 그녀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세대들의 상황을 대변해 줍니다. 그녀 자신은 어린 나이에 등단해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녀 주변에는 소설 속 '수인'이나 '언니' 같은 친구들이 많을 것입니다. 동세대의 고달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걱정하려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공감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100번쯤 눌러주고 싶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01-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님 리뷰에 공감 100번 누르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