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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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단편소설 「서른」, 김애란   

   '서른'이라는 단어만 봐도 감정에 기복이 격하게 생기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아마도 서른의 날들을 앞둔 분들이거나 이제 막 지나고 있는 분들일텐데, 「서른」의 화자 '수인' 또한 서른의 날들을 불안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2011년 겨울, 그러니까 김애란 작가가 만으로 서른 하나의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발표한 단편소설 「서른」은 어느 날 불쑥 날아온 한 통의 엽서에 답장을 하는 형식의 이야기입니다.

   서른의 날들을 관통하고 있는 '수인' 앞으로 한 통의 엽서가 도착합니다. 이 엽서는 10년 전 독서실에서 함께 생활했던, 수인 보다 5살 많았던 언니로부터 온 것인데 당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언니는 시험도 합격하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인'도 지난 10년 동안의 일들을 써내려 갑니다. 언니처럼 엽서에 짧게 안부를 전해도 됐을텐데, 수인은 지난 10년 동안의 일들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편지를 씁니다. 10년동안 '수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로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요?

 

   어느 날 눈뜨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이전에도 채무자, 지금도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가요. (p.298)

 

   '수인'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채무자이긴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학창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천만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학교를 졸업하고 서른이 된 지금도 '수인'의 대출금은 늘어갈 뿐입니다. 열심히 살았던 '수인'의 채무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데는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 등장했던 준이 선배 보다 더 나쁜 선배가 한 몫 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소녀들은 선배 판타지를 버려야 한다니까요. ( *「너의 여름은 어떠니」 참고.)
   헤어지고 난 뒤 정말 오랜만에 말쑥한 차림으로 '수인' 앞에 나타난 선배가 "살아보니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이라며 '수인'을 데려간 곳은 인간관계의 막장을 경험할 수 있는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 즉 다단계 회사였습니다. 초기 투자금이 필요했던 '수인'은 그곳에서 엄청난 금액의 대출을 받게 되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수인'의 인간관계는 점점 막장을 향해 가고 더이상 연락할 사람이 없을 때 학생 시절 잠시 강사로 일했던 학원에서 만난 제자 혜미로부터 전화가 걸려 옵니다. '수인'은 선배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헤미를 불러내고 자신은 가까스로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 혜미로부터 걸려오던 전화를 피하기만 했던 '수인'에게 들려온 것은 혜미가 자살을 시도하고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더이상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데다가 상황이 이 정도이니 편지에라도 써야했겠죠.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p.316)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좀 더 달라지고, 나아질거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수인'은 나아지기는 커녕 전혀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전보다 더 나쁜 채무자만 되었죠. 그래서 좌절합니다. 지금의 상황에만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도요.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바뀌는 건 상황이 아니라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바꿀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 언니는 엽서 끝자락에 그렇게 적었죠?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거 같다고. 조만간 다시 옛날이 될 오늘이, 이렇게 지금 제 앞에 우두커니 있네요. (p.317)

 

   '수인'은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을 오가며 얼굴이 하얗게 되도록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열심히 살았지만 꿈 조차 가져볼 수 없었던 '수인'의 좌절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있을까요.

 

   김애란 작가는 그녀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세대들의 상황을 대변해 줍니다. 그녀 자신은 어린 나이에 등단해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녀 주변에는 소설 속 '수인'이나 '언니' 같은 친구들이 많을 것입니다. 동세대의 고달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걱정하려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공감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100번쯤 눌러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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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1-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님 리뷰에 공감 100번 누르고 싶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