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촌과 프라이드의 사정에 대한 이야기!

단편소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이기호, 《문학동네》 2010년 봄호  

   단편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이기호 작가의 세번째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실려 있습니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 마음일까요? 아니면 갚아도 갚아도 다시 불어나는 사채 빚 같은 것일까요?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20년 가까이 프라이드를 타고 다닌 삼촌과 프라이드의 사정에 대한 이야기(p.48)입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하나 남은 막내를 장가 보내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모아 할머니가 삼촌에게 사 준 1987년식 프라이드.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랬나 봅니다. 차만 있으면 여자들에게 점수 좀 딸거라는 것 말이지요. 하지만 삼촌은 하라는 연애는 안하고 프라이드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할머니가 삼촌에게 프라이드를 사준지 두 달 정도 지난 후에 삼촌은 잘 다니던 피혁 공장을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아 다니기 시작합니다. 방 하나 마련하지 않고 숙식도 프라이드 안에서 해결하고, 어쩌다가 차례나 제사 때문에 집에 들러도 이내 프라이드를 타고 떠나버립니다. 이런 삼촌에게 프라이드를 사 준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래도 할머니는 애써 이렇게 위안합니다. 몇 년 동안 정성껏 키운 누렁이를 팔아서 산 차라서 삼촌이 그토록 애지중지 한다고요.

   20년 가까이 프라이드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삼촌이 어느날 갑자기 열쇠와 자동차 관련 서류들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제 막 운전면허증을 따서 근질근질하던 '나'는 삼촌의 프라이드를 끌고나갔다가 알게 됩니다. 삼촌의 프라이드는 후진이 되지 않았고, 수리를 하려면 중고차값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오며, 삼촌이 남긴 서류들은 모두 폐차에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삼촌은 20년 가까이 애지중지 타고 다녔던 프라이드를 차마 폐차할 수 없어서, 혹은 이 프라이드를 사준 할머니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추측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렁크 속에서 삼촌이 20년동안 꼼꼼히 정리해 둔 차계부를 발견한 '나'는 삼촌과 프라이드의 자세한 사정을 다시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삼촌이 남긴 주행기록을 바탕으로, 어쩌면 하동에 있는 옛 연인을 찾아 떠난게 아닐까 해서 하동까지 내려가지만 집 근처만 배회할 뿐입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처럼 이 소설 또한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답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삼촌이 20년 가까이 프라이드를 타고 전국을 떠돌아 다닌 건 첫사랑 그녀를 찾기 위함이었으며, 마침내 그녀를 찾아서 삼촌의 발이자 애인이기도 했던 프라이드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아서 할머니에게 돌려준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결론내어 봅니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서 또 하나의 재미는 프라이드를 통해 한국의 자동차 역사를 살짝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적, 우리 집안에도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는 삼촌 나이만큼의 사촌오빠가 한 명 있었습니다. 소설 속 삼촌이 타고 다니던 하얀색 프라이드는 아니었지만, 엉덩이가 뭉툭한 프라이드는 차종을 전혀 몰랐던 어린 제가 보기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차였습니다.

   오토미션이 나가서 후진이 안되는 프라이드로 후진을 할려면 핸들을 잡고 직접 차를 밀 수 밖에 없습니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진 것은 '나'와 삼촌 사이의 거리가 아니었을까요?

 

   프라이드는 87년 3월부터 기아자동차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치백 스타일의 자동차였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139시시 70마력짜리와, 1323시시 78마력 가솔린 엔진 두가지 모델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트렁크가 뒤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세단 모델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해치백 스타일의 자동차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뒤에서 차가 받으면 운전자가 즉사한다는 둥, 트렁크엔 도시락 하나 실을 수 없을 거라는 둥, 기름통이 너무 작아 오토바이랑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둥, 앞에 손잡이만 하나 달면 딱 리어카라는 둥, 대부분 무시와 비하의 말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해 3월 5일 서울 영동 무공종합전시장에서 열린 신차 발표회장엔 나흘 동안 무려 18만 명의 시민들이 한꺼버에 몰려, 그런 말들을 모두 무색하게 만들었다. 신차 발표회 후 한 달 만에 가계약 건수가 9천 대를 넘어섰고, 87년이 다 지나가기 전까지 그해 계획했던  총 3만 대의 판매실적을 모두 달성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프라이드가 그토록 단기간 안에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비결은 저렴한 차량 가격과 다른 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연비가 톡톡히 한몫했지만, 그해 3월부터 집중적으로 방영된 텔레비전 CF의 공 또한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하얀색 캐주얼 차림의 젊은 두 남녀가 한강변을 걸어가다가 프라이드를 타고 석양이 지는 도시 저쪽으로 사라지는 광고는, '도시의 젊은 생활, 나의 삶 나의 꿈, 프라이드'라는 카피와 함께 매시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유치하기까지 한 그 광고는, 남자 모델의 특이한 승차 자세 대문에 더 큰 화제를 몰고 왔다. 남자 모델은 한쪽 다리를 미리 쭉 펴서, 그러니까 마치 태권도의 뒷발차기 비슷한 자세로 몸을 낮춰 운전서겡 올라탔는데(아마도 차체가 낮아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낯설고 또 한편으론 신기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 광고가 나온 이후, 거리 곳곳에서 택시를 그런 자세로 올라타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고, 나와 내 친구들은 자주 그런 자세로 버스에 올라타다가 기사 아저씨에게 호되게 욕을 얻어먹기도 했다. (p.53~55) 

 

 

프라이드 광고 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아지 플렉, 운명의 남자아이를 만나다 소담 팝스 5
에바 이봇슨 지음, 유예림 옮김 / 소담주니어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짐작하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세요!

   해마다 어린이날 즈음이면 우리 어린이들이 부모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된다. 시대가 바뀌고 유행도 달라지면서 우리 아이들이 받고 싶은 아이템은 늘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비싼 게임기나 용돈 대신 부모님과 함께 놀고 싶다는 아이들. 어른들은 종종 우리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을 사주고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해주기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동화 《강아지 플렉, 운명의 남자아이를 만나다》에서 운명의 남자아이 역할을 맡고 있는 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할은 부자 부모님을 둔 덕분에 큰 저택에 살면서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부모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사달라고 했더니 그것만큼은 안된단다. 특히, 엄마의 반대가 심하다. 강아지가 있으면 가구도 망가지고, 카페트도 더러워지고, 집안 곳곳이 엉망친창이 되기 때문이란다.

   형제도 없고, 늘 일 때문에 바쁘고 출장이 잦아서 보기 힘든 아빠. 어쩌면 할은 형제나 아빠 대신 정 붙일 무언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체온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말이다.

   강아지만 빼고 무엇이든지 사주겠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도통 고집을 꺽지 않는 할, 그래서 아빠가 묘안을 짜냈다. 할의 아빠 사무실 근처에는 개를 대여해 주는 '이지펫'이라는 곳이 있는데, 원래 아이들이 싫증을 잘 내기 때문에 그곳에서 강아지를 며칠만 대여해서 할이 키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강아지를 향한 마음이 이내 사그라 들어서 강아지는 안중에도 없게 될거라며 자신있게 말하는 아빠. 하지만 할의 아빠가 틀렸다. 대여기간이 끝나고 할의 엄마가 강아지를 다시 돌려보내자 난리가 났다. 급기야 할은 대여소에서 강아지를 훔쳐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먼 여행길에 나선다.

   한편 이지펫에서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플렉은 자신을 정말 사랑해주는 할을 만나 정말 기쁘다. 사실 이지펫의 다른 개들은 족보가 있고 몸값이 아주 비싼 개들인데 반해 플렉은 몇 종이 섞인지도 모를 정도로 교배된 잡종 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지펫에서 조차 쫓겨날 운명이었는데, 운명의 남자아이 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케일리는 '이지펫'에서 개를 돌보고 있는데, 할이 이지펫에서 플렉을 훔쳐간 날은 몸이 아파서 대신 동생 피파가 개들을 돌봐 주고 있었는데, 우리 속에 갇혀있는 개들이 불쌍했는지 피파가 그만 개들이 도망가게 잠금장치를 풀어주고 만다. 이 동화는 할과 플렉, 피파, 강아지들이 함께 할의 할아버지 댁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여행 도중 강아지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과 주인을 찾아 떠나게 된다.

 

   "우리는 아이가 납치당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경찰은 괘씸하게도 애가 가출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할은 원하는 거라면 세상의 어떤 거든 다 가진 애였어요. 내 아내와 나는 아이가 변덕을 부려도 다 맞춰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방에 장난감이 얼마나 많은지, 보시면 압니다." (p.168)

 

 《강아지 플렉, 운명의 남자아이를 만나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생각해 보게하는 동화다. 할은 딱 하나, 강아지를 원했지만 부모님은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할아버지 댁으로 향한다. 강아지들도 마찬가지다. 서커스에 재주가 있던 개, 양치기 개, 아픈 아이를 돌볼 줄 아는 개 등 각자 잘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이지펫 우리에 갇혀 매일매일 자신들을 대여해 갈 사람들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할과 함께 여행에 나서면서 자신들이 진정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 혹은 당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일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라!

  

2013. 06. 06.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 3
박동선 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직접 밝히는 혈액형별 성격론의 허구성,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도움이 된다!

   혈액형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0년에 오스트리아의 의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가 A, B, C형 혈액형을 발견했고 2년 후인 1902년 추가로 AB형을 발견해 지금의 A, B, O, AB형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후 1910년 대에 독일에서 백인이 다른 인종에 비해 우월하다고 보는 우생학과 혈액형을 연결시켰고, 유럽인들에게는 A형이 많은데 아시아인들에게는 B형이 많다며 A형보다 B형이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식민지배를 위해 아시아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일본이 이 주장을 받아들여 성격과 혈액형을 연관시켰다. 결국 혈액형별 성격 유형은 아픈 역사 속에서 탄생해 대유행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혈액형별 성격유형은 좋게 말하면 통계학, 나쁘게 말하면 그럴듯한 말로 믿게하는 사기일 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혈액형별 성격유형을 신뢰하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참 간단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내 성격은 소심한 편이라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무언가 완성되지 않으면 드러내놓길 싫어하고, 완벽하게 할 자신이 없으면 시작 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내 성격을 설명하려면 주절주절 줄줄이 말해야 하는데,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냥 혈액형이 A형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트리플 A형이라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래서 혈액형별 성격유형은 신뢰하지 않지만 이렇게 활용할 때가 많다.

 

   혈액형별 성격유형 가운데 요즘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쳐돌았구맨이 그린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이 아닐까. 벌써 3권까지 출간되었고, 한국 웹툰 최초로 일본에서 <혈액형 군!>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은, 흔히 우리는 《혈관고》라고 줄여서 말하곤 하는데 웹툰 뿐아니라 캐릭터, 광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 3권에서는 일상, 학교, 직장,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용한 것이 혈액형별로 직장인들의 성격과 업무능력이다.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활용하고 싶을 정도로 공감가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나 같은 A형은 타고난 '사회인'이라고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고, 자신감에 따라 능력이 천지 차이라고 하는데 정말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게 된다. 에피소드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수긍하게 된다. 이러니 《혈관고》에 중독될 수 밖에.

 

   이런 웹툰을 그리는 작가는 혈액형별 성격유형을 얼마나 신뢰하는 걸까? 작가는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서 행동하게 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나 낙인 효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경향인 바넘 효과를 소개하며 "혈액형별 성격론의 허구성"을 미리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장난에 넘어가지 않을거라고 단단히 다짐을 하고 읽기 시작해도 첫번째 에피소드부터 무장해제 되는 것이다.

   당신도 몰랐던 당신의 성격이 궁금하다면, 매일 마주치는 직장 동료와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아주 가볍게 읽어보길 바란다. 왜냐하면 간단한 고찰이니까.

 

2013. 05. 30.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 자신과 친구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선배가 등장한다. 굉장한 독서가인 그 선배는 죽은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지만, 피츠제럴드처럼 위대한 작가는 예외라고 했다. 당시는 피츠제럴드가 죽은지 28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던 《위대한 개츠비》는 《상실의 시대》를 통해 처음 접한 사람도 꽤 될 것이다. 나 역시 《상실의 시대》를 덮자마자 바로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으니까.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설이다. 게다가 《위대한 개츠비》는 번역 저작권을 보호받고 있지 않는 작품이라 많은 출판사에서 내놓았는데, 버전이 다른 번역본으로 읽다보니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깨닫곤 한다.

 

   5년 전 사랑했던 여자를 잊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집이 보이는 바다 건너에 집을 샀고, 그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밤 수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그가 바로 개츠비다. 개츠비는 5년 전 우연히 만난 데이지에게 첫 눈에 반해 버렸지만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개츠비와 부유한 집에서 자란 데이지는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그래서 개츠비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진짜 처지를 알고 데이지가 떠날까봐.

 

   그는 거짓 핑계로 그녀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신을 경멸했을 수도 있다. 있지도 않은 수백만 달러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데이지에게 고의로 안도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사회 계층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를 충분히 보살펴 줄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사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에게는 풍요로운 가정의 뒷받침도 없었을 뿐더러 비정한 정부의 변덕에 따라 세계 어디에서든 갑자기 목숨이 날아가 버리게 될지도 모를 처지였다. (p.210)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형씨. 한동안은 그녀가 나를 차 버려줬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꽤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나는 본래의 야망을 잊은 채 순간순간 점점 더 깊이 사랑에 빠져들었고, 또 갑자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어요. 그녀에게 앞으로 할 일을 들려주면서 훨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도대체 거창한 일들을 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p.211~212)

 

   그러던 중 개츠비는 1차 대전 때문에 해외로 파병되고, 군대에서 활약이 대단했던 개츠비의 귀국은 늦어지고 만다. 개츠비를 기다리던 데이지도 주변의 압력 때문에 예전에 개츠비에게 느꼈던 것처럼 안도감이 느껴지는 톰 뷰캐넌과 결혼한다. 데이지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톰에게는 정부가 있었고 데이지도 그 정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과 함께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안도감을 주는 톰의 재산과 지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데이지의 결혼 소식을 들은 개츠비는 데이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갖은 불법을 저지르며 돈을 모았고, 대저택을 구입했다. 개츠비는 여전히 데이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부자가 된 자신을 보면 데이지가 다시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5년을 기다린, 아니 준비한 사랑의 끝은 참으로 잔혹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사랑 밖에 몰랐던 개츠비, 그는 너무 순수했다. 문득 떠오르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걸려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p.227)

 

   《위대한 개츠비》를 이끌어 나가는 화자는 데이지의 사촌 오빠이자 개츠비의 옆집에 살고 있는 캐러웨이다. 불법과 일탈을 일삼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그는 언제나 올곧다. 개츠비가 얼마나 데이지를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그들의 만남을 환영하지는 않는다. 어찌됐든 개츠비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고, 그가 사랑하는 데이지도 이미 결혼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츠비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 유일하게 개츠비의 편에 서고,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 환멸을 보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난다.

 

   몇 번을 읽는다 해도 결말이 바뀔리가 없고, 이미 개츠비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알고 있는데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또 읽을 때마다 개츠비의 '위대함'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사랑에 대한 나의 경험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예전에는 개츠비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츠비의 위대함을 느끼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개츠비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2013. 05. 22.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 박사가 누구인지 당신이라면 말해줄 수 있을거예요!

단편소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이기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입니다. 앞서 발표한 두 권의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까지 모두 읽어본 결과 역시 이기호 작가는 단편소설을 참 잘 쓴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세 번째 소설집을 온라인 서점에서 보자마자 바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이런 소설집을 읽을 때는 으레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 작가와 편집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겠지만, 소설집에 실린 순서대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표제작부터 읽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끌리는 제목의 단편소설부터 읽을 것인지, 혹은 발표연도까지 표시되어 있다면 발표순으로 읽을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소설집에 따라 다르지만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한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표제작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김 박사가 누구길래 이렇게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제목을 단 것일까요?

 

   사범대학교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준비중인 스물네 살의 최소연. 분명 붙을거라고 생각했던 임용고시에 아슬한 점수 차로 떨어지자 노량진 고시원으로 향합니다. 휴대전화도 끊고 메신저도 지우고 머리도 귓바퀴가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짧게 자른 후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던 그녀에게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 11층 문이 열리면 너는 등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욕을 할 것이다.

   ─ 11층 문이 열리면 너는 등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OO놈, 지랄하고 자빠졌네'하고 욕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욕을 입에 담아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적도 없는 그녀는 처음에는 그냥 무의식이라고 여겼지만, 점점 더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반복해서 들려오자 의심하게 됐고 심지어 등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내리면서 그녀의 팔꿈치를 밀치며 내리자 그 말들이 예언처럼 느껴져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주기가 짧았지만 점점 더 심해져서 누군가 그녀에게 말 시키는 것이 두려워지고, 공부하는데도 엄청난 방해가 됩니다. 임용고시를 준비중이라 쉽게 상담을 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김 박사에게 메일을 보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김 박사입니다.

   지금 최소연 씨의 상황은 일종의 강박증세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현재 최소연 씨가 직면한 현실, 그러니까 뜻하지 않은 시험 탈락과 그로 인한 좌절감, 다시 반복되는 수험생활의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일정 부분 원인이 되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많은 수험생들이 증상과 증세는 달라도 하나쯤 강박증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연 씨의 경우, 그게 전부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소연 씨가 말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다른 이유가 더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제 솔직한 견해입니다. (……)

   최소연 씨는 '난생처음 듣는 욕'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영화에서든, 소설에서든, 언젠가 한 번 쯤 최소연 씨가 '경험'한 것들이 되살아난 경우일 것입니다. 그것들이 최소연 씨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가 고되고 각박한 수험생활을 틈타 전면에 등장한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그 강박증세를 없애기 위해선 그 기원을 먼저 알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은 일시적인 치유일 뿐, 언제고 다시 반복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원을 알아내 거기에서부터 하나하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그게 더 확실한 치유법일 것입니다." (p. 107~109)

 

   김 박사의 답변을 들은 후 그녀는 강박증세의 기원을 찾아냅니다. 그 기원은 바로 '엄마'였습니다.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그녀가 어릴 때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 검은 수첩을 보며 욕을 해댔다고 합니다. 그 때의 엄마 목소리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그녀 앞에 메아리처럼 돌아온 것입니다.

   강박증세의 기원을 찾아낸 그녀는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치유법을 찾으려 하지만, 엄마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부정하고 맙니다. 이제 엄마를 보는 것 조차 두려운 그녀에게 이번에는 그런 엄마를 이해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합니다. 김 박사 자신도 어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았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그녀가 김 박사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자 김 박사는 아무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자 입을 꽉 다물어 버린 김 박사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단편소설 하나는 재미있게 잘 쓰는 이기호 작가이니 읽을까 말까 갈팡질팡 하지 말고 어서 읽어보세요. 그리고 말해 주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김 박사는 도대체 누구인지를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