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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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실을 투영한 상상력!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아주 오래 전, 지구에는 엄청나게 큰 생명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키가 채 2미터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그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녔지만, 그들은 멸종했고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박물관에서 화석으로만 존재합니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 항상 유리한 조건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번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제3인류』 속 생명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설정합니다.

 

   이 이야기는 절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당신이 이 소설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의 오늘이다. (p.9)

 

   자, 겨우 강산 정도만 변할 것 같은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의 상상력에 의하면, 그 옛날 추위와 지각변동으로 인해 사라진 생명체는 비단 공룡들 뿐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의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공룡처럼 아주 거대한 인류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현생 인류의 10배 정도 덩치로 10배 정도 오래 살았습니다. 하지만 덩치 큰 생명들이 노출되는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추위와 급격한 지각변동에 더 심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공룡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덩치만 큰 공룡과는 달리 지능이 있는 인류이기 때문에 그냥 사라지지 않고 제2인류들을 남겨 뒀습니다. 그들은 소행성 충돌이나 핵폭발 등 다양한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보다 1/10 정도 작은 크기의 제2인류를 만들어 지구 밖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 인간들이 지구 밖에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 해결책을 찾으러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2인류는 제1인류보다 덩치가 매우 작기 때문에 수명은 짧아졌지만 대신 생식력이 좋아져서 임신기간도 9개월로 짧아지고 마음만 먹는다면 10명 정도까지도 낳을 수 있습니다. 덩치가 작으니 제1인류보다 식량에 대한 걱정도 줄어들었겠죠.

   이 사실은 남극 탐사를 하던 프랑스의 한 과학자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프랑스는 이것을 지금의 세계와 앞으로의 지구가 겪게 될 문제를 타계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활용합니다. 그들은 그 옛날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소형화만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과학자들을 수소문해 인류 소형화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인류가 바로 '제3인류'로, 초소형 인간(Micro-Humains)의 머리글자를 따서 에마슈라고 이름 붙입니다. 처음 1명의 에마슈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한 그들은, 900명의 여자 에마슈와 100명의 남자 에마슈도 만듭니다. 성비가 이토록 불균형한 이유는 여왕개미나 여왕벌들로 이뤄진 곤충의 세계와 아마존 여전사들의 생존법을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탄생시킨 에마슈들은 이란의 핵시설을 폭발시켜 핵전쟁을 무마시키거나 도쿄전력 참사가 재현되고 있는 일본 원전에 투입해 원전 폭발을 막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냉정하고 야비한 생명체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요가 생기면 만들어서 인간들의 뜻대로 사육했다가 없어지면 과감히 버리는, 도무지 생명에 대한 윤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류에 의해 만들어지고, 훈련받은 초소형 인간들이 언제까지 인류를 위해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제3인류』 는 1, 2권을 통해 이제 막 제1부의 이야기가 끝난 참입니다. 아마도 2부에서는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에마슈들을 볼 수 있겠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제3인류』 를 통해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기발한 상상력이 아닌 오히려 현실을 투영하는데 초점을 뒀던 것 같습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을 소설 속에 담아냈습니다. 그 중에 한국이 배경인 사건들은 없으나 재미있는 설정은 있습니다. 10년 뒤 한국은 디지털 기술 쪽으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나라로, 각국의 인재들이 일하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발명한 박사도 한국의 한 연구소에 스카우트되어 일하고 있으며, 한국이 혁신을 진정으로 권장하는 유일한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것을 의식한 탓일까요. 

   또, 자신의 오랜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인지 소설 곳곳에 자신의 역작 『개미』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거나 캐릭터들이 카메오처럼 등장해서 또다른 재미를 줍니다.

   『개미』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치밀하고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줬던 소설을 기대한다면 부족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3인류』를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또다른 상상력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안락함과 편리함은 사람들을 잠들게 해요. 당신들은 아쉬운 것 없이 자라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들 같아요. (p.217)

   버튼과 손잡이와 눈금판이 달린 기계들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나중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지죠. 손도 둔해지고 두뇌 회전도 느려져요. 손으로는 매듭을 지을 줄 모르고 눈으로는 지평선을 살필 줄 모르게 돼요. 새들의 노래를 들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죠. 하기야 당신들이 새들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 보기나 했는지 모르겠네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늘 켜놓는 바람에 그것들의 소리와 영상이 시청각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에요. 당신들은 이제 사냥도 베 짜기도 할 줄 모르고, 불을 피우거나 냄새로 길을 찾거나 구름을 보며 날씨를 예측할 줄도 몰라요. 당신들은 생활 장애자가 되었어요.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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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 - 120 True Stories & Innocent Lies
황경신 지음, 김원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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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든 걸 멈출 수 있는 시간, 그래서 참 좋은 시간이야!

   밤 열한 시. 특별한 일이 없다면 늦은밤 시작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하하호호 웃고 있거나 따뜻한 이불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며 책을 읽고 있을 시간입니다. 하루 중, 무엇을 하더라도 괜찮은 시간. 무엇을 하더라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무엇을 하더라도 부담없이, 생각없이 느긋하게 즐겨도 되는 시간.

   한가지 더. 감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치열하게, 그리고 또 냉정하게 하루를 보낸 내가 유일하게 감성에 젖어들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괜찮은 시간이니까, 그래서 역시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괜찮은 시간이라고 느꼈나 봅니다. 꽤 단단한 사람인 나에게도 말랑말랑한 감성으로 충만할 수 있는 시간. 밤 열한 시는 바로 그런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작가 황경신에게 『밤 열한 시』는 어떤 시간일까요? 『밤 열한 시』는 작가 황경신의 열입곱 번째 책으로, 『생각이 나서』를 발표한 이후 열 두 계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밤 열한 시』 속 계절은 누구나 계절의 처음과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봄'이 아니라 딱 지금의 계절, '가을'부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발랄함으로 가득한 봄이 아니라 가을부터 시작해서 이 책이 더 좋습니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앞에 놓여 있을 때, 좋아하는 음식을 먼저 먹고 싫어하는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밝고 화사한 봄을 보내고 서늘하고 외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먼저 외롭고 쓸쓸한 가을을 보내고 마지막에 다시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맞이하는게 더 좋습니다.

   역시 그녀에게도 밤 열한 시는 감성으로 충만한 시간인가 봅니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일 수도 있을테죠. 『밤 열한 시』에 실린 120편의 이야기들은 딱 밤 열한 시에 느긋한 마음으로 읽기 좋은 것들을 모아뒀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밤 열한 시』인가 봅니다. 가끔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죠? 너무 바빠서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계절이 다 지났더라. 『밤 열한 시』는 그런 일상 속에서 흘러가버린 시간과 계절을 느끼고 되돌아 보게 합니다.

   벌써 시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짧디 짧은 이 계절, 잠시나마 가을의 감성에 젖어들고 싶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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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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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몇 번째 별에 살고 있나요?

   누구에게나 있지만 저마다 다른 무게감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감을 느낄 겨를 조차 없이 훌쩍 떠난버린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요?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날,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그에게 어머니이자 친구, 연인이 되어 줬습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겨를이 없도록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심지어 같은 침대를 쓰고 목욕까지 함께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랬던 어머니가 어느날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그 또한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죽을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다면, 매일 8시간씩 남들보다 더 오래 깨어있을 수 있다면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주사약이 일반 사람들은 쉽게 살 엄두를 낼 수 없을만큼 비싸다는 것과 한번 주사를 맞으면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단점 말고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꿈꿀 시간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꿈일 뿐인데, 꿈 하나쯤 안 꾼다고 대수일까요? 하지만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꿈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잠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자고 꿈꾸는 것을 그리워한다. 목요일마다 포커를 치던 나의 광장 친구는 수백 번도 더 꿈을 꾸도록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원하는 주제가 있으면 요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최면 기법을 통해서 그가 원하는 꿈을 들려줄 거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꿈꾸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우리는 늘 잃어버린 것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p.195)

 

   그가 세상을 버리기로 한 방법은 '죽음'이 아니라 이 '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즉, 잠을 자지 않고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것이 '죽음'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는 '주사'를 맞지 못합니다. '주사'를 맞으려는 순간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낯선 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 낯선 자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 낯선 자는 자신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계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그에게 들려줍니다.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결국 '주사'를 맞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다른 별로 가게 돼요……. 그중에 지구는 아주 알려진 곳이죠. 그러니까 제가 온 이곳은 두 번째 행성이라고 볼 수 있죠.

   맞아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첫 번째 행성도 있어요. 당신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죠.

   세 번째 행성에서의 삶은 두 번째 행성에서보다 훨씬 더 기쁘고 즐거워요. 물론 두 번째 행성에서는 첫 번째 행성에서보다 기쁜 삶을 살게 되고요. 죽을 때마다 당신은 좀 더 즐겁고 유쾌한 곳으로 향하게 돼요.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의 이전 삶과 관련이 있는게 아니라, 당신이 완성해야 하는 집단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두 번째 행성에서 도둑이 될 수도 있고 세 번째 행성에서는 왕자가 될 수도 있어요. 맞아요, 각 행성 이후의 삶은 늘 이전의 기쁨과 사랑의 최고치를 능가해요.

   총 여섯 개의 행성이 있어요. 여섯 개의 삶인 거죠. …… 다섯 번째 행성에서는 이전 네 개의 행성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거죠. 그러면 당신은 다섯 번째 행성에서 계속 살고 싶은지, 아니면 바로 여섯 번째 행성으로 떠날 건지를 선택할 수 있게 돼요. 여기서 이 선택은 아주 중요해요. 여섯 번째 삶이 더 나을거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 중엔 바로 그곳에 가고 싶어서 자살한 사람도 있어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다섯 번째 삶에서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하기도 해요." (p.264)

 

   잠을 자지 않게 해주는 주사와 외계인,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재미있는 SF소설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현재와 미래,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나 하는 고민이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없었던 고민에 대해 풀어놓은 작가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암 선고를 받았으며, 열다섯 살에는 다리를 절제하고 암으로 한쪽 폐와 간의 일부까지 절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배우, 작가, 영화감독,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지금 많은 생애들 중 하나, 그중 아래에 있는 힘들고 어려운 단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한층 평안해지고 엄청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금 내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가장 아꼈던 사람이 떠나버린 게 아니라 나를 가장 아껴주었던 사람이 떠나갔기 때문이란 것을.

   나를 가장 사랑해준 사람을 잃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p.295)

 

   지금 당신은 몇 번째 별에 살고 있나요?

 

2013. 10. 07.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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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화전 - 지상 최대의 미술 사기극 밀리언셀러 클럽 133
모치즈키 료코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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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자신의 주치의를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자신의 한쪽 귀를 자른 고흐의 일화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고흐는 병원을 전전하게 되는데, 이때 정신병 전문 의사이자 화가 활동까지 하고 있는 폴 가셰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가셰 박사는 고흐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곁에 머물며 건강과 관련해 많은 조언을 해주게 되는데, 이때 고흐가 가셰 박사를 모델로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됩니다. 고흐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던 가셰 박사는 같은 그림을 하나 더 그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비슷한 느낌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2개 그려지게 된 것입니다.

 

   먼저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은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로는 최고가인 8,250만 달러에 일본 다이쇼와제지의 명예회장인 사이토 료에이에게 낙찰되었습니다. 특히, 사이토 료에이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와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함께 화장해 달라고 유언을 남겨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다행히 전세계 미술계의 반대로 이 유언은 취소됩니다. 이후 1999년에 익명을 요구하는 미국인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는데 그가 공개나 전시를 원치 않아서 지금은 정확한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가셰 박사의 초상>은 백년 동안 주인이 12명이나 바뀌었는데, 이런 기구한 운명 덕분에 이야기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모치즈키 료코의 『대회화전』 역시 이 작은 그림 하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명화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

   『대회화전』은 일본인 화상에게 엄청난 금액으로 낙찰된 <가셰 박사의 초상>이 소유주가 도산하자 은행의 담보로 넘어가 렌탈 회사의 창고에서 빛을 보지 못하게 되자 이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대담한 사기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기단들은 창고에서 이 작은 그림 하나를 훔치기 위해 수 개월 전부터 준비를 하고 실행에 옮길 사람들을 영입하게 되는데, 소설의 대부분은 이러한 과정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히, 사기단들은 자신들 대신 창고에서 그림을 훔쳐올 사람들을 영입하기 위해 그들이 그림을 훔칠 수 밖에 없도록 절박한 상황으로 몰고 갈 정도록 철저합니다. 소설은 《오션스 일레븐》이나 《도둑들》처럼 빈틈없고 완벽한 범죄를 위해 다양한 트릭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빼곡하게 이야기를 채워나가고 있지만, 작가의 필력 자체가 엉성해서 곳곳에서 삐걱거리며 소설로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글쓰기를 훈련해 온 전문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엉성한 글솜씨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오늘날 돈 있는 사람들은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라 은밀한 거래 혹은 자신들의 재산 증식 수단으로 그림을 이용하곤 합니다. 앞서 언급한 사이토 료에이 회장처럼 자신만의 사유재산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 조차 박탈해 버리곤 합니다. 작가는 이런 명화라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엔딩도 그런 주제 의식을 보여주며 끝납니다.

 

   "화가는 천재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과학의 진화에 선구자가 필요하듯이 그림도 또한 느닷없이 탄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림의 손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림을 단순히 감상물로서 사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림이 진화의 물증이기 때문이기도 한 겁니다. 우리들은 고작해야 자신이 살아 있는 80년 남짓한 시간밖에 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니 자신들이 시대의 부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600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시대가 보입니다.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사실은 그림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시대를 그림 속에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그림 속에는 언어라는 비문화적인 필터를 거치지 않은, 시대의 어느 순간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화가는 시대를 남기는 일에 생명을 전부 불태우기 때문에 슬픈 겁니다. " (p.327)

 

2013. 10. 06.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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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배진수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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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면 이 책을 금(禁)하라!

   더운 여름,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는데는 단언컨대 그 어떤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은 무서운 이야기가 가장 효율적인게 아닐까요? 무더위와 에너지 절약으로 연일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웹툰 작가 배진수의 『금요일(禁曜日)』을 만납니다. '세상에 없던 공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금요일』은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충분히 그 공포가 전해져 옵니다. 피 터지는 잔인한 이야기? 혹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스멀스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섬뜩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며 『금요일』을 읽어나갑니다.

 

   이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당신에게 누군가 나타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하겠죠. 아프기 전으로 되돌려 달라던가요.

   이제 겨우 서른다섯. 하지만 그에게는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잦은 흡연으로 폐암에 걸리게 됐고, 대학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4기까지 진행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갖고 치료를 시작해 보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고통 뿐입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도 편안한 휴식과 평온한 마음 뿐입니다. 매우 강한 진통제를 맞으면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죠. 그런 그에게 천사인지 악마인지도 모를 이상한 생명체(?)가 나타나서 소원을 말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골초가 되기 전으로도 되돌려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일곱 살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빕니다.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일곱 살로 되돌아 간 그는 행복할까요? 어쩌면 로또 번호를 기억해서 당첨될 수도 있고, 우량주에 투자해 주식으로 대박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아이처럼 지내야 합니다. 무슨 놀이를 하든 재미가 없습니다. 이미 재미있고 화려한 게임들을 경험한 그에게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노는 건 정말 재미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대박나는 주식 종목을 알고 있어도 그때가 되려면 너무나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모범생이 되어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될 줄 알았던 그, 하지만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역행」을 통해 우린 깨닫게 됩니다. 결국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갈거라는 생의 비릿한 비밀을 말이죠.

 

어른의 정신을 지닌 채 아이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런 엿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처음에는 추억을 현실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새 삶과 새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한껏 설렜다.

하지만 기대감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가 '아름다운 추억'이라 여기는 기억들은

사실 길고 무료한 삶 중 스쳐간 몇몇 '아름다운 순간'이 미화되고 과장된 포장지 안에 간직돼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럼 내가 망각하고 있던 실제의 삶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나머지 시간들은?

술래잡기, 얼음땡, 고무줄놀이, 말타기…… 동네 친구들 몇몇만 어울리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해대던 놀이들.

하지만 어른인 내게 즐거움을 주는 놀이는 결코 아니다.

성인이 재미있어하는 놀이는 거의 항상 술과 이성, 돈과 관련돼 있지만

어른아이인 난 저것들 중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20세기의 세상에는 21세기에 살던 내가 즐길 수 있는 게 없다.

이 시절의 음식은 너무도 심심하고 무미하며 TV 연출은 너무도 지루하고 촌스럽기 그지없고

PC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게임기도, 블록버스터 영화도… 이곳엔 … 없다. (p.48~50)

 

   『금요일』은 총 15편의 단편만화들이 '딜레마', '아이러니', '카오스'라는 주제로 나뉘어져 실려 있습니다. 「역행」은 '딜레마'에 실려있는 단편만화인데, 주제처럼 정말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요일』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만화들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피가 튀기거나 귀신 등이 등장해서 섬뜩한 반전을 선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이야기,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어서 금기시 됐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스릴러나 공포물 보다 더 섬뜩하고 오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없던 공포'라는 부제 그대로입니다.

   생의 묵직한 이면을 엿볼 수 있어서 웹툰이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한번 펼치면 그 끝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의 비릿한 비밀을 담고 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배진수 작가, 도대체 이 작가의 아이디어와 통찰력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단언컨대 다음 작품도 꼭 지켜봐야 할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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