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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배진수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8월
평점 :
생의 이면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면 이 책을 금(禁)하라!
더운 여름,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는데는 단언컨대 그 어떤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은 무서운 이야기가 가장 효율적인게 아닐까요? 무더위와 에너지 절약으로 연일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웹툰 작가 배진수의 『금요일(禁曜日)』을 만납니다. '세상에 없던 공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금요일』은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충분히 그 공포가 전해져 옵니다. 피 터지는 잔인한 이야기? 혹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스멀스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섬뜩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며 『금요일』을 읽어나갑니다.
이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당신에게 누군가 나타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하겠죠. 아프기 전으로 되돌려 달라던가요.
이제 겨우 서른다섯. 하지만 그에게는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잦은 흡연으로 폐암에 걸리게 됐고, 대학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4기까지 진행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갖고 치료를 시작해 보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고통 뿐입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도 편안한 휴식과 평온한 마음 뿐입니다. 매우 강한 진통제를 맞으면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죠. 그런 그에게 천사인지 악마인지도 모를 이상한 생명체(?)가 나타나서 소원을 말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골초가 되기 전으로도 되돌려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일곱 살로 되돌아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빕니다.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일곱 살로 되돌아 간 그는 행복할까요? 어쩌면 로또 번호를 기억해서 당첨될 수도 있고, 우량주에 투자해 주식으로 대박을 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곱 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아이처럼 지내야 합니다. 무슨 놀이를 하든 재미가 없습니다. 이미 재미있고 화려한 게임들을 경험한 그에게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노는 건 정말 재미없어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대박나는 주식 종목을 알고 있어도 그때가 되려면 너무나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모범생이 되어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될 줄 알았던 그, 하지만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역행」을 통해 우린 깨닫게 됩니다. 결국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갈거라는 생의 비릿한 비밀을 말이죠.
어른의 정신을 지닌 채 아이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런 엿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물론 처음에는 추억을 현실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새 삶과 새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한껏 설렜다.
하지만 기대감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가 '아름다운 추억'이라 여기는 기억들은
사실 길고 무료한 삶 중 스쳐간 몇몇 '아름다운 순간'이 미화되고 과장된 포장지 안에 간직돼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럼 내가 망각하고 있던 실제의 삶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나머지 시간들은?
술래잡기, 얼음땡, 고무줄놀이, 말타기…… 동네 친구들 몇몇만 어울리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해대던 놀이들.
하지만 어른인 내게 즐거움을 주는 놀이는 결코 아니다.
성인이 재미있어하는 놀이는 거의 항상 술과 이성, 돈과 관련돼 있지만
어른아이인 난 저것들 중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20세기의 세상에는 21세기에 살던 내가 즐길 수 있는 게 없다.
이 시절의 음식은 너무도 심심하고 무미하며 TV 연출은 너무도 지루하고 촌스럽기 그지없고
PC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게임기도, 블록버스터 영화도… 이곳엔 … 없다. (p.48~50)
『금요일』은 총 15편의 단편만화들이 '딜레마', '아이러니', '카오스'라는 주제로 나뉘어져 실려 있습니다. 「역행」은 '딜레마'에 실려있는 단편만화인데, 주제처럼 정말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요일』에 실려 있는 15편의 단편만화들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피가 튀기거나 귀신 등이 등장해서 섬뜩한 반전을 선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차마 마주할 수 없었던 이야기,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어서 금기시 됐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스릴러나 공포물 보다 더 섬뜩하고 오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없던 공포'라는 부제 그대로입니다.
생의 묵직한 이면을 엿볼 수 있어서 웹툰이지만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한번 펼치면 그 끝을 보지 않고서는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의 비릿한 비밀을 담고 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배진수 작가, 도대체 이 작가의 아이디어와 통찰력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요? 단언컨대 다음 작품도 꼭 지켜봐야 할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