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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버리기로 한 날 밤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 당신은 몇 번째 별에 살고 있나요?
누구에게나 있지만 저마다 다른 무게감으로 존재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감을 느낄 겨를 조차 없이 훌쩍 떠난버린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요?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날,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그에게 어머니이자 친구, 연인이 되어 줬습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겨를이 없도록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심지어 같은 침대를 쓰고 목욕까지 함께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랬던 어머니가 어느날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그 또한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죽을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다면, 매일 8시간씩 남들보다 더 오래 깨어있을 수 있다면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주사약이 일반 사람들은 쉽게 살 엄두를 낼 수 없을만큼 비싸다는 것과 한번 주사를 맞으면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단점 말고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꿈꿀 시간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꿈일 뿐인데, 꿈 하나쯤 안 꾼다고 대수일까요? 하지만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꿈꿀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잠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자고 꿈꾸는 것을 그리워한다. 목요일마다 포커를 치던 나의 광장 친구는 수백 번도 더 꿈을 꾸도록 시도해보았다고 했다. 원하는 주제가 있으면 요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최면 기법을 통해서 그가 원하는 꿈을 들려줄 거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꿈꾸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우리는 늘 잃어버린 것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p.195)
그가 세상을 버리기로 한 방법은 '죽음'이 아니라 이 '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즉, 잠을 자지 않고 더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것이 '죽음'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는 '주사'를 맞지 못합니다. '주사'를 맞으려는 순간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낯선 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 낯선 자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 낯선 자는 자신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계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그에게 들려줍니다. 낯선 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결국 '주사'를 맞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다른 별로 가게 돼요……. 그중에 지구는 아주 알려진 곳이죠. 그러니까 제가 온 이곳은 두 번째 행성이라고 볼 수 있죠.
맞아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첫 번째 행성도 있어요. 당신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죠.
세 번째 행성에서의 삶은 두 번째 행성에서보다 훨씬 더 기쁘고 즐거워요. 물론 두 번째 행성에서는 첫 번째 행성에서보다 기쁜 삶을 살게 되고요. 죽을 때마다 당신은 좀 더 즐겁고 유쾌한 곳으로 향하게 돼요.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의 이전 삶과 관련이 있는게 아니라, 당신이 완성해야 하는 집단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두 번째 행성에서 도둑이 될 수도 있고 세 번째 행성에서는 왕자가 될 수도 있어요. 맞아요, 각 행성 이후의 삶은 늘 이전의 기쁨과 사랑의 최고치를 능가해요.
총 여섯 개의 행성이 있어요. 여섯 개의 삶인 거죠. …… 다섯 번째 행성에서는 이전 네 개의 행성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거죠. 그러면 당신은 다섯 번째 행성에서 계속 살고 싶은지, 아니면 바로 여섯 번째 행성으로 떠날 건지를 선택할 수 있게 돼요. 여기서 이 선택은 아주 중요해요. 여섯 번째 삶이 더 나을거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 중엔 바로 그곳에 가고 싶어서 자살한 사람도 있어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의 다섯 번째 삶에서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며 살고 싶어 하기도 해요." (p.264)
잠을 자지 않게 해주는 주사와 외계인,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재미있는 SF소설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현재와 미래,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누구나 하는 고민이지만 어느 누구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없었던 고민에 대해 풀어놓은 작가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암 선고를 받았으며, 열다섯 살에는 다리를 절제하고 암으로 한쪽 폐와 간의 일부까지 절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배우, 작가, 영화감독, 칼럼니스트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누구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지금 많은 생애들 중 하나, 그중 아래에 있는 힘들고 어려운 단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한층 평안해지고 엄청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지금 내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가장 아꼈던 사람이 떠나버린 게 아니라 나를 가장 아껴주었던 사람이 떠나갔기 때문이란 것을.
나를 가장 사랑해준 사람을 잃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p.295)
지금 당신은 몇 번째 별에 살고 있나요?
2013. 10. 07.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