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노예 12년 - 체험판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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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자유, 잃어버리는 건 한순간! 모두가 함께 경계하고 지켜야 합니다!
학창시절, 50분 수업이 끝나면 주어지는 10분 휴식의 달콤함! 다들 기억하실거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시대를 잘 타고나서 대놓고 자유를 빼앗긴 적은 없지만, 잠깐씩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될 때도 우리는 못 견뎌합니다. 그런데 자유인으로 태어나 12년 동안 누군가의 소유물로 전락해 억압받는 삶을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예 12년』은 작가 솔로몬 노섭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소설로 쓴 것으로, 그는 자유인으로 태어나 30년 넘게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오기까지 12년 동안의 노예 생활과 투쟁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1853년 1월 20일 「뉴욕 타임스」 1면에 처음 소개되었고, 3개월 후에 책으로 나오게 됐다고 합니다.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되자 얼마 전에는 「뉴욕 타임스」가 당시 기사에서 노섭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 것을 161년만에 정정 보도한 적도 있었죠.
『노예 12년』을 읽기 전에 당시의 시대상을 조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에 발발하는데, 솔로몬 노섭은 1841년에 납치를 당합니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도를 두고 찬반 논쟁이 뜨겁던 때였습니다. 미국 북부는 도시 산업 혁명으로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남부는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예들의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북부에서는 노예들에게 자유인 증서를 쥐어주며 풀어주고 있었지만 남부에서는 오히려 더 노예 거래가 성행했습니다.
"뉴욕에 사십니다."
"자네가 그곳에 살았었나?"
"네, 나리 ─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그렇다면 자유인이었잖아. 이 빌어먹을 깜둥이 같으니."
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널 살 때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
"엡스 나리."
나는 그동안 사용하던 것과는 약간 다른 말투로 대답했다.
"엡스 나리, 나리가 굳이 저한테 물어보지 않으신 거죠. 게다가, 저는 한 주인한테 ─ 저를 납치했던 사람한테 ─ 내가 자유인이라고 말했다가 거의 죽을 만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p.292)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 증서가 있는 자유인이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곤 하는데, '노섭'이라는 성은 솔로몬의 아버지를 자유인으로 풀어준 주인의 성입니다. 노섭은 다른 곳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누군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뉴욕을 떠납니다. 노예제가 있는 주에 가려면 자유인 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챙겨서 나섰는데, 누군가에게 이 자유인 증서를 빼앗기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 대신 플랫 포드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노예를 거느리는 주인들이 항상 악덕하지는 않지만 플랫이 만난 주인 중의 한 명은 노예를 동물보다 더 못하게 여겼고 그로 인해 플랫은 2번이나 죽을 고비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악덕한 주인이 있는 반면, 노예들을 일꾼으로 여기며 존중해주는 주인도 있어서 플랫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급기야 자유인으로 풀려나기에 이릅니다.
『노예 12년』을 보면 노예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보가 필요할 때 부동산에 하는 근저당 설정을 이 당시에는 동산인 노예에게도 할 수 있었습니다. 노섭은 이 저당권 설정 때문에 목숨을 살릴 수 있었지만, 인간에게 그 몫에 따라 주인이 여러 명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잔인하죠? 게다가 노예들에게 흔하게 가해졌던 채찍질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범죄자에게 행해지던 수준과 맞먹습니다. 그저 목화밭에서 가지 하나를 부러 뜨렸을 뿐인데 25대의 채찍질이 가해집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피부색 하나 다르다고 그들이 견뎌내야 하는 억압의 크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채찍질 횟수는 사안에 따라 등급이 다르다. 25대는 그저 가벼운 벌 정도로 여겨지는데, 목화 속에서 마른 잎이나 꼬투리 조각이 발견될 때, 또는 목화밭에서 가지 하나를 부러 뜨릴 때의 벌이다. 50대는 그다음 단계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모든 노예들이 받는 보통의 벌이다. 100대는 심한 벌로 여겨지는데, 목화밭에서 빈둥빈둥 서 있는 심각한 죄를 저지를 때 가해진다. 150대부터 200대까지는 오두막 동료와 싸운 죄에 대한 벌이며, 500대는 개들에게 물어 뜯기는 것과 함께, 동정받지 못하는 가련한 탈주 노예를 몇 주 동안의 극심한 고통과 통증으로 몰아넣는 벌이다. (p.177)
지금은 피부색이 다른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상 노예제도도 폐지되었으니 먼 옛날의 이야기 같겠지만, 지금은 또다른 의미의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혹은 어느 한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유, 우리 모두가 경계하고 지킬 때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유가 주어지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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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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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이라 불리는 '누구나'의 이야기!

'우연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 지금까지 읽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은 모두 '우연'에 대한 소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겨울일기』는 조금 색다른 소설입니다.

『겨울일기』는 1947년 생인 폴 오스터가 그동안의 삶을 회고하며 써내려간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특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나 '그'가 아닌 2인칭 '당신'입니다. 서술자 본인이 자기 자신을 '당신'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폴 오스터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는데, 단순히 시간에 따라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사건 혹은 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가 살았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47년 2월 3일, 뉴저지 뉴어크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2011년 1월의 어느날까지 그 긴 세월동안 자신이 몸을 부렸던,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들은 21곳이나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뉴욕과 브루클린인데, 그래서 『뉴욕 3부작』과 『브루클린 풍자극』이라는 소설이 나올 수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그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가족이겠죠? 그는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두 명의 아내와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죽음도 함께 되돌아 봅니다.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할아버지나 할머니,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조만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p.7)

『겨울일기』가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이야기를 쓴 이유는, 비록 작가 자신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라는 것이죠. 작가의 소설의 첫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평생 '우연'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폴 오스터. 이 소설, 이 순간만큼은 '우연'을 노래할 수가 없었겠죠. 태어나고, 늙고, 죽어가는 과정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운명일테니까요.

"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쉰일곱 살에 나는 늙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일흔네 살이 되니 그때보다 훨씬 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당신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당신과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공유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당신은 그의 말을 계속해서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희미하게 반짝이면서 그가 한 말의 진실을 거의 이해할 것만 같은 때가 간혹 있다. 사람은 일흔네 살 때보다 쉰일곱 살 때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는, 어쩌면 이런 간단한 뜻인지도 모른다.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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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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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는데도 의문이 남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책은 독자들을 참 피곤하게 만듭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 선생』 또한 바로 그런 책입니다. 특히, 『팽 선생』은 로베르토 볼라뇨가 죽기 전까지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작가를 다시 불러와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팽 선생』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최면요법가이자 침술가인 팽 선생에게 딸국질이 멎지 않아 죽어가고 있는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를 봐달라는 청이 들어옵니다. 병원에서는 바예호를 위해 어떤 치료나 조치도 하지 않고, 병의 원인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팽 선생이 바예호를 살펴보는 것은 경계합니다. 게다가 이상한 일도 벌어집니다. 바예호를 보고 돌아오는 날, 두 명의 스페인 남자가 나타나 바예호의 치료를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바예호의 치료만 거절하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만큼 많은 돈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예호는 이 알 수 없는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이미 유명한 의사가 나타나 바예호를 살펴보겠다고 해서 시인의 부인은 팽 선생의 도움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두 스페인 남자는 자신이 치료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으니,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이 돈으로 레노 부인과 근사하게 저녁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요.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바예호 부인이 다시 팽 선생의 도움을 청했고, 팽 선생이 병원으로 가자 병원 관계자들이 그를 막아섭니다. 바예호 부인을 소개해 줬던 레노 부인과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스페인 남자들을 찾아 돈을 돌려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은 더욱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집니다. 멀리 스페인에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고, 자살했던 친구는 어느날 영화 속에서 등장합니다. 레노 부인은 약혼자를 데리고 나타나 바예호가 죽었다고 하며 한마디 남깁니다.

"아직도 선생님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p.160)

도대체 팽 선생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팽 선생 뿐만이 아닙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튀어 나옵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예호는 실존했던 인물이며, 바예호 뿐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팽 선생』을 통해 로베르토 볼라뇨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궁금해 합니다.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볼라뇨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면서도 그 어둠의 크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볼라뇨의 죽음과 함께 그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정 볼라뇨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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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은 존재 그자체! 시간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기억을 불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p.7)

 

   첫 도입부터 강렬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일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젊었을 때는 수의사였고, 지금은 스물 여덟의 딸 '은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노인이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25년 전까지만해도 연쇄살인범이었으며, 그때 죽인 여자의 딸을 자신의 딸로 입양해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은희는 진실을 모릅니다. 혈액형이 맞지 않는 이유는 입양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 일흔 노인 앞에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남자가 등장합니다. 충동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 하는 남자입니다. 그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의 범인일 것입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 남자가 노인의 집 근처를 배회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딸의 남자 친구라며 인사를 합니다. 심지어 딸은 이 남자와 결혼까지 하겠다고 합니다.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걸 노인이 알게 되자 노인을 죽이든지 혹은 딸을 인질로 노인의 입을 막기 위함일 것입니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연쇄살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니 노인이 직접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병이 문제입니다. 조금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츠하이머. 급기야는 남자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에 자신이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웁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죠?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역시 노인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상대로 게임을 걸어 옵니다. 과연 노인과 남자, 둘 중 누가 이길까요? 노인은 남자로부터 은희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노인에게는 그럴 힘이 없어 보입니다. 기억할 수 없다는 건,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며칠째 은희가 집에 오지 않아 불안해 하고 있는 노인 앞에, 개가 여자 손을 입에 물고 옵니다. 이 상황에서는 노인도 좌절하고, 독자들도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인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독자들에게도 진실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남자가 죽였을까요? 아니면 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버릇처럼 은희를 죽이고 마당에 묻었을까요? 또, 그것도 아니라면 노인이 은희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해서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려는 남자의 계략일까요?

 

   노인과 남자의 두뇌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힙니다. 사실 노인 곁에는 딸 '은희'도, 연쇄살인범 '박주태'도 없었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떠오르는대로 재구성했을 뿐입니다. 노인이 죽였다고 생각한 '은희'는 노인을 돌봐주던 요양보호사였고, 연쇄살인범 '박주태'는 과거 살인의 흔적을 쫓아 노인을 찾아온 형사였습니다. 노인이 입양했다고 했던 딸은 여자를 죽일 때 함께 죽여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경찰은 그동안의 사건을 진술하라고 합니다. 자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하라니. 그것도 좋은 기억도 아니고 온통 나쁜 기억 뿐입니다. 이 얼마나 미칠 노릇일까요.

 

   예전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거짓말을 자주 접한 친구들은 무엇이 거짓말인지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거짓말을 하는 친구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결국에는 사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자꾸 거짓말을 하다보니, 그것이 진짜처럼 여겨졌던 것일테죠.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저장장치에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지 않는 한 100% 진실로 기억되기는 힘듭니다. 기억을 거듭해서 떠올리다보면, 분명 머리 속에서 재구성 될 것입니다. 노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평범했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위장되고, 나쁜 기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고,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지금의 존재가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처럼 기억이 뒤죽박죽 재구성 되어져버린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도 엉망진창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악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다 시간 때문이니까요.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44~145)

 

   두께가 얇은 소설입니다. 문단도 짧아서 아주 빠르고 쉽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읽는 도중에 자꾸 멈칫 멈칫하게 됩니다. 뭔가 미세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앞에서는 우리 집 개라고 했던 것을 뒤에서는 우리 집 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그럼 잠시 멈칫하며 다시 생각해 보거나 앞 장으로 되돌아가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세하게 어긋났던 이유가 바로 노인의 진짜 기억이 아닌 재구성된 기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김영하 작가는 독자들이 자신의 소설을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정말 영리한 작가인거죠.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면, 소설이 꼭 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나게 합니다. 중편과 장편의 경계쯤에 있을 것 같은 이 얇은 소설 하나로도 충분히 긴장감과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19년차 작가의 내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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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전통 요리를 전문으로 한다는 우 베네딕타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흑맥주부터 시키고 앉아서 숨을 돌렸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체코의 흑맥주는 두고 두고 삼삼하게 그리울 것 같다.

맥주는 뭐니뭐니해도 고단한 노동 끝의 휴식을 완성해준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 차가운 술 한 잔이 부끄럽지 않다.

메뉴 고르기는 항상 어렵다.

유대교 경전 토라를 공부하듯이 메뉴 이름과 설명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숙고를 거듭했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는 언제나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나는 갈릭 크림 수프와 올드 보헤미안을 시켰고

비노 양은 체코 전통 수프인 굴라쉬와 프라하 스타일 고기 요리를 시켰다.

'올드 보헤미안'이란 이름이 멋져 보이기도 했지만,

이 메뉴에 유대인의 전통 음식인 훈제 혀요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모험심이 꿈틀거렸다.

 

 

─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 p.87~88 ─ 

 

어쩌면 프라하 여행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소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진한 수프로 파프리카나 고추를 넣어 매운 맛이 난다는 체코식 얼클한 쇠고기 수프인 굴라쉬.

아무리 글로 읽어도 도통 상상할 수 없었던 굴라쉬의 맛.

프라하에 가게 된다면 꼭 굴라쉬를, 그것도 브런치로 먹어보겠다고 다짐했었죠.

아니 어쩌면 이 굴라쉬 브런치를 맛보기 위해 프라하를 선택했을지도.

 

 

 

 

저녁 먹으러 간 곳에도 '굴라쉬'가 있었지만 일부러 브런치로 먹으려고 아껴뒀어요.

네루도바 거리를 둘러보고 말라스트라나 광장을 지나 발견하게 된 우 스흐넬루(U SCHNELLU).

여행가이드에 나오는 맛집이라 사람이 많을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갔던 날은 조용한 편이었어요.

여행가이드에 나온 맛집을 찾아가면 꼭 한국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 외에는 한국 사람도 없더라구요.

 

 

 

 

앗! 잠시 후 이 앞자리에 오늘도 어김없이, 한국인 관광객이 앉더라구요.

역시나 다들 똑같은 가이드북을 들고 있었어요.

앞으로는 가이드북도 좀 더 유니크한 걸 선택해야 할까봐요.

 

골렘 모양의 화덕이 인상적입니다.

프라하는 진흙으로 만든 골렘 전설이 워낙 유명해서 곳곳에서 이 골렘들을 만날 수 있어요.

피규어 같은거 있음 하나 사올걸 그랬어요.^^

 

 

 

우리도 먼저 물보다 싸다는 맥주부터 주문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 때부터 맥주를 마시면 긴장이 풀어져서 싫어하는데,

이날은 꼭 맥주와 함께 굴라쉬 브런치를 즐기고 싶었어요.

저는 벨벳 맥주로 선택!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보헤미안 전통 메뉴들이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스흐넬루" 소고기 굴라쉬가 한 눈에 들어오네요.

덤블링과 곁들여 나오는게 있고, 구운 감자 팬케이크와 함께 나오는 것이 있는데

덤블링은 완자와 비슷할 것 같아서 저는 구운 감자로 선택했어요.

 

이것이 진정한 굴라쉬 브런치!

 

빛깔마저 고운 체코 벨벳 맥주

흑맥주인데 정말 벨벳처럼 부드럽더라구요. 제가 체코에서 마신 맥주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것 같아요.

원래 저는 톡~ 쏘는 맥주 안 좋아하거든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스흐넬루 소고기 굴라쉬

소고기는 양이 조금 적은듯 했지만 구운 감자가 푸짐하게 나왔어요.

소스는 매콤하면서 간간하고, 소고기는 부드러워서 순식간에 꿀떡!

사실 제가 이렇게 소스에 적신 고기 종류를 좋아하지 않아서 한국에서도 잘 안 먹는데,

이건 정말 최고였어요.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을 정도로요.

 

 

 

이날 우 스흐넬루에서 먹은 굴라쉬와 벨벳 맥주 맛은 정말 두고 두고 그리운 맛이랍니다.

아직도 혀 끝에서 그날의 맛이 맴돌고 있는데, 정말 잊혀지기 전에 다시 먹어보고 싶어요.

책에 등장한 저 레스토랑을 찾아갔더라면 더 좋았을테지만, 이곳도 다른 책에 등장하는 맛집!

이젠 책 속 그 맛을 공감할 수 있어요.^_^

프라하 가시면 꼭 굴라쉬 브런치를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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