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기억은 존재 그자체! 시간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기억을 불완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p.7)

 

   첫 도입부터 강렬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일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젊었을 때는 수의사였고, 지금은 스물 여덟의 딸 '은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노인이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25년 전까지만해도 연쇄살인범이었으며, 그때 죽인 여자의 딸을 자신의 딸로 입양해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은희는 진실을 모릅니다. 혈액형이 맞지 않는 이유는 입양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 일흔 노인 앞에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남자가 등장합니다. 충동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 하는 남자입니다. 그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의 범인일 것입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 남자가 노인의 집 근처를 배회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딸의 남자 친구라며 인사를 합니다. 심지어 딸은 이 남자와 결혼까지 하겠다고 합니다.

   남자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걸 노인이 알게 되자 노인을 죽이든지 혹은 딸을 인질로 노인의 입을 막기 위함일 것입니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연쇄살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니 노인이 직접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병이 문제입니다. 조금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츠하이머. 급기야는 남자의 집으로 향하던 도중에 자신이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웁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죠?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역시 노인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상대로 게임을 걸어 옵니다. 과연 노인과 남자, 둘 중 누가 이길까요? 노인은 남자로부터 은희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노인에게는 그럴 힘이 없어 보입니다. 기억할 수 없다는 건, 결국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며칠째 은희가 집에 오지 않아 불안해 하고 있는 노인 앞에, 개가 여자 손을 입에 물고 옵니다. 이 상황에서는 노인도 좌절하고, 독자들도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인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독자들에게도 진실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남자가 죽였을까요? 아니면 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버릇처럼 은희를 죽이고 마당에 묻었을까요? 또, 그것도 아니라면 노인이 은희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해서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려는 남자의 계략일까요?

 

   노인과 남자의 두뇌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힙니다. 사실 노인 곁에는 딸 '은희'도, 연쇄살인범 '박주태'도 없었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떠오르는대로 재구성했을 뿐입니다. 노인이 죽였다고 생각한 '은희'는 노인을 돌봐주던 요양보호사였고, 연쇄살인범 '박주태'는 과거 살인의 흔적을 쫓아 노인을 찾아온 형사였습니다. 노인이 입양했다고 했던 딸은 여자를 죽일 때 함께 죽여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경찰은 그동안의 사건을 진술하라고 합니다. 자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하라니. 그것도 좋은 기억도 아니고 온통 나쁜 기억 뿐입니다. 이 얼마나 미칠 노릇일까요.

 

   예전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거짓말을 자주 접한 친구들은 무엇이 거짓말인지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거짓말을 하는 친구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결국에는 사실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자꾸 거짓말을 하다보니, 그것이 진짜처럼 여겨졌던 것일테죠.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저장장치에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지 않는 한 100% 진실로 기억되기는 힘듭니다. 기억을 거듭해서 떠올리다보면, 분명 머리 속에서 재구성 될 것입니다. 노인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평범했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위장되고, 나쁜 기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고,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지금의 존재가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처럼 기억이 뒤죽박죽 재구성 되어져버린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도 엉망진창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악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다 시간 때문이니까요.

 

   한 남자가 찾아와 만났다. 기자라고 했다. 그는 악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에게 덧붙였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44~145)

 

   두께가 얇은 소설입니다. 문단도 짧아서 아주 빠르고 쉽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그런데 읽는 도중에 자꾸 멈칫 멈칫하게 됩니다. 뭔가 미세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앞에서는 우리 집 개라고 했던 것을 뒤에서는 우리 집 개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그럼 잠시 멈칫하며 다시 생각해 보거나 앞 장으로 되돌아가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세하게 어긋났던 이유가 바로 노인의 진짜 기억이 아닌 재구성된 기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김영하 작가는 독자들이 자신의 소설을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정말 영리한 작가인거죠.

   『살인자의 기억법』을 보면, 소설이 꼭 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나게 합니다. 중편과 장편의 경계쯤에 있을 것 같은 이 얇은 소설 하나로도 충분히 긴장감과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19년차 작가의 내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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