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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일곱 해의 마지막』, 32쪽
읽은 지 두 달 만에 다시 펼쳐든 『일곱 해의 마지막』. 잘 읽혔지만 읽고나니 정리되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었고, 김연수 작가가 쓴 또 다른 시인의 이야기인 『꾿빠이, 이상』이 떠올라서, 그 책을 읽고 다시 읽게 되었다. 역시 한 번에 들어오지 않는 책은 재독이 진리다.
1956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백석은, 1962년 5월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이 시는 시인이 "압록강 변에서 나무를 심고 길을 닦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십여 년 전 그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에 그 강을 건너가던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당시 북한 문학잡지에 실린 다른 시에 비하자면 노골적인 찬양시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 일곱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노래하던 시인은 어디 가고 찬양시만 남았을까?
(※ 이 리뷰는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재구성해 정리한 것으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읽기 전 주의 요망. 원망 금지.)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백석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하는데, 이때 여러 편의 시들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모던보이'였던 그의 시들은 인기가 많았지만, 194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의 조선어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하자, 그는 만주로 가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절필한다.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간 기행(그러니까 그는 '월북'한게 아니라 그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었고, '월북시인'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은 소박한 삶을 꿈꾸지만,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이끌던 고당 선생이 통역 겸 비서로 그를 부른다. 그때만 해도 기행은 곧 좋은 시절이 오리라 믿었고, 정국이 안정되면 선생으로 살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편 정도의 시를 꼭 쓰리라 다짐했다.
당시 소련에서도 해빙의 물결이 일어 세계가 바뀌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해방 후 십여 년 동안의 경직된 도식주의에서 벗어나 문학의 감동과 개성을 되찾자"(106쪽)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기행은 작가동맹 기관지에 '나의 항의, 나의 제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협동조합과 공장에 관한 것이라면, 내면을 깊이 추구하지 않아도, 문학도 감동이 없어도 무조건 좋은 시라고 말하는 당시의 시단에 대한 정면공격이었다."(105쪽)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 년간의 짧고도 그나마 어렴풋했던 해빙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지고"(132쪽) 말았고, 당은 이 글을 트집 삼아 그의 사상 검증에 나선다.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 88~89쪽
"아이들에게 사상성보다 교양성을 심어주는 게 우선입니다. (…) 아프리카 기린에 대해 쓰면 안 되는 것입니까?"
"동무는 우리의 서정이란 우리나라 아동들의 실지 생활감정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당의 창작 지침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겠소? (…) 이 시에는 주체적인 우리의 생활, 우리의 감정이 없소. 주체적으로 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아프리카의 기린 같은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겠소." 20쪽
1958년 5월 15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올렸다. 문학신문 편집위원회에서 이를 기념하는 시를 게재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뜻밖에도 집필자로 기행이 결정됐다. 일 년 전 가을이 시작할 무렵, 『아동문학』의 확대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기행이 발표한 동시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뒤로 동시 청탁이 끊어진 상황인지라 기행 자신도 의아한 결정이었다. 문학신문은 당의 문예 정책을 정확하게 창작에 반영시키기 위해 만든 주간신문이었다. (…) 당은 생각하고 문학은 받아쓴다는 것. 그러자면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말아야만 했는데, 기행은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비판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아'가 너무 많았다. 그 자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53~54쪽
또다시 찬양시를 쓰라고 하는 당 지도위원에게 시를 쓰지 않은 지 십수 년이 지나서 더이상 시를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기행. 지도위원은 "창작이 부진하다면, 그 이유를 추궁받을 것이오. 그때는 노동계급 속으로 파견돼 그들의 사상으로 재무장하는 절차를 거치게 될 것"(57쪽)이라고 말한다.
시를 쓰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기행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고, 또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이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장이라도 집필 금지를 당할 시가 분명했다. 이제 사상 검토에 내몰릴 각오를 하고 그런 시를 읽어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 지금이 아닌 먼 미래의 언젠가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57~58쪽
노동자가 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사상 잔재를 청산하고 노동계급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상 검토 위원회를 열어 모든 작가들을 심사, 분류한 뒤 현지 파견 등 적절한 조치를 통해 개조할 것을 결의했다.(133쪽) 기행 역시 천리마 작업반에 투신하겠다며 지원서를 쓸 수 밖에 없었는데, 다른 작가들처럼 희망하는 생산 현장을 고향으로 적어 냈다. 그런데 정작 기행이 파견된 곳은 생판 낯선 삼수의 협동조합이었다.(삼수는 예로부터 벽지였고, 유배지로 자주 언급됐던 곳이다. 이곳으로 유배를 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은 윤선도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 악명 높은 곳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는 기행의 동지였지만, 지금은 위원장 자리에 있는 병도를 찾아간다. 병도는 기행에게 개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옥심과 리진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기행은 1957년에 평양으로 초청 받아온 소련 시인 벨라의 통역을 맡게 된다. 자신과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기행은 벨라에게 자신의 시작 노트를 건넨다. 소련으로 돌아간 벨라는 소련에서 유학중이었던 리진선에게 노트를 맡기며 번역을 부탁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되어도 리진선은 나타나지 않고 벨라는 영영 그 노트를 돌려받지 못하게 된다. 기행은 소련으로 돌아간 벨라에게 한글로 쓴 자신의 시를 보낸다. 당은 이것 또한 모두 알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추궁하기도 한다. 시를 쓰지 못하는 기행의 시를 소련의 시인은 어떻게 많이 읽을 수 있었냐고 말이다.
노어번역실에서 자신 대신 번역해 달라고 기행에게 벨라의 편지를 건넸던 옥심은 아빠를 구하기 위해 소련 국적도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소련 유학생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숙청 당했고, 가족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옥심이 친한 친구가 쓴 것이라며 건넨 노트에는 기행의 눈길을 끄는 시가 한편 있었다.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1쪽
기행은(작가 조차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시는 벨라에게 건넨 자신의 시였을 것이다. 시인을 꿈꿨던 리진선이 벨라에게 돌려주기 전에 필사해 두었을 것이다.
한편, 유배지와 같았던 삼수에 도착한 첫날. 출근 통지만 받았을 뿐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역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기행에게 한 사람이 알은채를 한다. 삼수읍에 있는 인민학교의 교원 진서희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작가동맹에서 파견한 시인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한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흠모하던 국어 선생이 수업시간이면 줄줄 외던 시"를 쓴 시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사람들로 북적대는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라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우연히 만난 시인 앞에서 그의 시를 욀 줄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높은 자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쓸쓸히 앉어'라든가 '소주의 마시며' 따위의 비관적이고 퇴폐적인 문장을 저토록 큰 소리로 말하는 철없는 입술을 만류하기도 전에, 기행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아니, 비로소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 타오르는 갈탄의 힘으로 한쪽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난로며, 좀체 귀에 와닿지 않는 변방의 사투리며, 도내에서도 손꼽히는 축산반을 자랑한다는 협동조합을 찾아간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 그때 그는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안에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다. 그 밤과 마음이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196쪽
게다가 그녀는 기행이 시에 썼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기행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때 그 시를 쓴 시인과 지금의 자신은 다른 사람이니까.
일 년 동안 삼수에서 '노동을 통한 개조시간'을 가지고 있는 기행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최근 완성된 삼지연 스키장에 관한 오체르크, 즉 현장 보고의 집필이 맡겨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써야되는지는 알지만, 기행은 결국 쓰지 못한다. 삼수에 남은 기행은 자신만을 위해서 시를 쓴다. 그리고 이내 불태워버린다. 서희의 부탁으로 아이들이 쓴 시를 봐준다. 시인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서희에게 이제는 농사꾼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 우선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었지. 제목은 사슴이면 좋겠고. 시골 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면 싶었고.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하지." 223~224쪽
이것은 오래 전 기행이 품었던 꿈이다.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기행은 삼수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후 40년을 그렇게 살아내지 않았을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작가의 말」 245쪽
8년 만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여기에는 백석 시인의 7년(1956~1962년)이 담겨 있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우리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남긴 백석 시인은, 전쟁이 끝난 후 땅도, 몸도, 마음까지 모두 황폐한 곳에서 더 이상 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시를 쓸 수가 없어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며 근근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기필코 시를 다시 쓰라고 한다. 시인의 마음속에서 움튼 시어가 아닌, 그들의 사상을 담은, 그들이 원하는 시를 쓰라는 것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1962년)에 쓴 시를 마지막으로, 1996년 생을 다할 때까지 더이상 시를 발표하지 않았던 시인. 그의 실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소설가의 손끝에서 그의 삶이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