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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 다빈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한라산 들녘에서 그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
지난 5월 29일은 사진작가 故 김영갑 선생의 추모 4주기였다. 『김영갑 1957~2005』는 2006년 사진작가 김영갑의 추모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사진집이다. 그는 1982년 처음 발을 디딘 제주에 매혹돼 1985년부터는 아예 제주에 눌러 앉아 사진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그는 오로지 제주만 사진에 담았다. 그는 몸이 점점 굳어가는 루게릭 병에 걸려서도 오직 사진만 생각했다. 그가 그토록 사진에 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제주도 사람 누구나 알고 있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꼭꼭 숨어 있는 속살을 엿보려면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을 보고 느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한라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빼어날 수 없다. 한라산의 속살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하와이나 발리, 아니 지구상의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낙원임을 인정할 것이다.
제주도의 역사는 바람과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기에 눈물과 한숨의 역사이다.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주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태풍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한라산은 일년 내내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크고 작은 바람은 온갖 생명에게 시련을 안겨준다. 사람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본문 中)
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제주의 자연을 사진에 담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보이지 않는 바람을 담으려고 애썼다. 그는 제주하면 절대 바람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제주에 정착하기 전 그는 바람처럼 떠돌아 다녔고, 제주에 정착하면서 그 바람을 쫓아 다녔다. 그가 20여년 동안 바람을 쫓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에는 자연의 장엄하고 오묘한 풍경과 함께 바람이 담겨 있다. 그 바람은 때론 두 눈을 감고 얼굴에 맞닿는 감촉을 느껴보고 싶을 정도로 싱그럽기도 하고, 또 때론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거칠기도 하다.
내가 한라산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웃는다.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벌써 다른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기에 한라산 자락에서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라산 들녘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본다. 고요와 적막, 평화로움... 첩첩산중이나 무인도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 평화로움과는 다르다. 이곳에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평화로움이 있다. 이에 홀린 나는 20대, 30대, 40대를 중산간 들녘을 지키고 있다. (본문 中)
그는 무려 20여년을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들녘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가 와도 중산간에 섰고, 눈이 와도 중산간에 섰다. 물론 거친 바람이 몰아쳐도, 자신의 몸이 점점 굳어가도 중산간에 서서 한라산을 느꼈다. 중산간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곳에서 사진 작업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날씨가 궂은 날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자신은 이곳을 고집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는 이곳에서 한라산을 오롯이 혼자서만 느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모습을 담기 위해서 말이다.
바람, 들녘, 오름, 구름... 자연의 경외감을 느껴보라!
이 사진집에 실려 있는 파노라마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왜 그토록 제주도만 담으려 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무 사이에 걸려 있는 시원한 바람이 보이고, 눈 앞이 탁 트이는 푸른 들녘도 보인다. 해질녘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친 햇살도 보이고, 천지가 하얗게 변한 곳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햇살도 보인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며칠동안 눈비를 맞으며 버틴 그가 아니면 절대 담아낼 수 없는 풍경들이다. 다른 이들은 궂은 날씨를 피해 자리를옮겼지만 그는 제주의 눈과 비, 바람을 알았기 때문에, 이 궂은 날씨가 지나고나면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고 아쉬움이 남았다면, 아직 두모악 갤러리에 다녀오지 못했다면, 두모악 갤러리를 다녀와서 그 여운을 떨치지 못했다면 꼭 한번 보길 권한다. 그가 담아내고자 했던 자연의 경외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9-68. 『김영갑 1957~2005』2009/06/01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