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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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학교 때였던가? 교과서에서 「선학동 나그네」를 접한 이후, 주변 사람들의 추천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이라는 것이 그닥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영화 《천년학》이 개봉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천년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 사람』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새롭게 출간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미 이전에 영화를 통해 많이 봤던 「서편제」와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담겨져 있는데,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천년학》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보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러갈 만큼 소설이 내 가슴에 꽂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청준 작가가 모자란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소재들에 공감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사실 제목은 끌렸지만 이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깊은 공감을 얻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망국의 설움, 전쟁의 고통, 이념의 갈등 등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표제작인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일본의 노예 교육을 피해 지난날의 소련으로 유학길에 오른 유일승 씨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조국을 잊고 살아야만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국도, 고향도, 가족도 모두 잊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까지 유일승에서 노일승으로, 유 세르게이로 바꾸면서 말이다. 곧이어 고국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는 또 한번 그곳을 잊어야만 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고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자 그는 잊고 지냈던 가족과 고국을 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고국을 잊으려고 돌아간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잊고 지내야 했던 그의 심정을 100%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한켠에서부터 시린 어떤 것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책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일부러 표제작부터 읽었던 것인데 잠시 책을 덮어두어야만 했다. 역시 대작가는 달랐다.

 

이 책에는 유일승 씨 뿐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이들도 있고, 강제로 멕시코까지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했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잊고 지내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고,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가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또다른 소설인 「이상한 선물」을 쓰는 도중에 작가는 병원으로부터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제목처럼 '이상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바로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로 먼저 쓰고, 그 에세이를 에세이 소설로, 에세이 소설을 다시 소설로 쓰곤 한다. 그런 방법으로 인물을 쓰는 것은 에세이가 소설에 비해 인물을 보다 직접적이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오직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인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런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나 보다.

그는 에세이 소설 「귀항지 없는 소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것이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며, "자신의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그가 담아내지 못한 인물들이 많다고 한다. 하루 빨리 그의 병이 완쾌되어 또 다른 독행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탄식을 금치 못해하는 내게 시를 쓰는 한 이국 친구가 충고해왔다.

─ 너는 물론 그 길을 계속해가야 한다. 그 밤 산길행이 어째 너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네 소설은 그 깨어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귀항지 없는 항로」, p280)

 

2007/12/1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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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생 텍쥐페리 지음, 최복현 옮김 / 이른아침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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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던 사촌 언니가 한명 있었다. 그 언니는 소위 명문고라는 곳에서 항상 1등만 독차지하며 학생회장을 했고, 흔히 명문대라고 하는 곳을 들어갔다. 방학이 되기만 하면 서울로 올라가 언니의 포스를 둠뿍 담아오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책은 많았지만, 내 또래가 볼만한 동화책은 없었다. 온통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에게 물려받은 색이 바랜 두꺼운 책 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도 못하면서 그 책들을 읽곤 했다. 4학년 겨울방학 때였던가? 자신의 책장 앞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던 나에게 언니가 책 한권을 꺼내 주었다. 책을 펼쳐보니 모자와 아주 잘생긴 남자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상으로는 처음 만난 그림이 있는 책이었다.

그날 이후 항상 "어린 왕자"의 여자 친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프랑스 이름 앞에 붙는 "생"은 귀족에게만 붙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그때부터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생텍쥐페리의 다른 작품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 나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가 상상했던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생텍쥐페리의 '장미'였던 콘수엘로와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고, 그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어린 왕자"의 환상을 깨 주었다.

『인간의 대지』는 사막 위를 비행하며 우편 배달을 했던 생텍쥐페리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기요메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던 일,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조종사라는 직업을 그려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직업의 소유자들은 해후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p. 48)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지." (p. 67)

 

특히 자신이 실종되면 아내가 보험금을 수령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죽든지 살든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걸었다는 기요메의 이야기, 그냥 그는 웃으면서 한 이야기였지만 생텍쥐페리에게 영감을 주었듯이 내 가슴에도 깊이 박혔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때론 사랑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사실 생텍쥐페리를 좋아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재미있지 않은 책이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어린 왕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인간적인 고민과 조종사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어린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7/12/0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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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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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고흐를 만났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처음으로 고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옷 속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쉬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가 없었다. 아침의 또렷한 정신으로는 그를 제대로 만날 수가 없는가보다. 다시 밤을 기다려야겠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고흐만의 붓터치가 안면을 감싸고 있는 그림. 덕분에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어떤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동감 같은 것. 옆눈짓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그, 약간 토라진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거지? 굳게 다문 입술, 그에게 물어보아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반 고흐의 침실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삐뚤삐뚤한 방, 이런 방에서는 도저히 휴식을 못 취할 것 같다. 방이 너무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도 고흐에게는 편안한 곳이겠지. 그는 일부러 그의 방을 이렇게 그려냈겠지. 자신만이 이 편안한 공간을 누리기 위해서, 아무도 불편할 것 같아 찾아오지 않게 만들려고. 침대 위로 액자가 떨어질 것 같다. 똑바로 걸어주고 싶은데.

 

아를의 공원 입구 (1888,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모두들 검은 옷차림일까. 노랑의 길과 극명하게 되조되는 색감. 아마 9월과 10월의 어느 날이겠지. 나뭇잎이 햇빛이 많이 투과된 곳만 노랗게 물들어 있으니.

고흐는 외로웠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공원으로 나가니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검게 표현했으리라. 자신보다 그들이 더 외로워 보이도록, 더 우울해 보이도록 말이다.

 

우체부 룰랭의 초상 (1888,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아트 인스티튜트)

풍성한 수염도 멋지고, 짙은 색의 제복도 멋지다. 아마도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우체부와 친해졌겠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비어있다. 일이 힘들었던 것일까, 아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발 아래 빌밭이 마치 파도처럼 석양에 넘실거린다. 지는 태앙인데 너무 찬란하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고흐 자신처럼.

 

바위들 (1888, 휴스턴, 휴스턴 미술관)

어떻게 바위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그러니까 고흐다운 것이겠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고흐와는 달리 나무는 바람 부는대로 제 몸을 향하고 있다. 나무에 이는 보라빛 바람을 잡고 싶다.

 

아이리스 (1889,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

노랑이 주조를 이루던 이전의 그림과는 다른 색감이 마음에 든다. 병실 창 밖에 피어있는 이 아이리스를 보면서 고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정적이거나 우울한 것 보다는 오히려 활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치료 덕분인가.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 숲 (1889, 미니애폴리스 아트 이스티튜트)

씨 뿌리는 사람에 등장하는 태양보다 덜 강렬한 태양. 반면에 대지는 꿈틀거리고 있다. 이전보다 색채가 많이 절제된 느낌이다.

 

연인이 있는 관목 풍경 (1890, 오하이오, 신시내티 미술관)

고흐에게 연인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림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색감도 싱그러운 톤으로 바뀌었다. 그의 거친 붓터치마저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다정히 걸어가고 있는 연인이 보이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앞모습이리라. 그들이 걸어와야 할 길이 그들의 앞에 놓여있다. 과연 그들은 얼마만큼 걸어갔을까. 

 

클림트의 노랑은 "황금빛 유혹"이라 했다. 그렇다면 고흐의 노랑은 "열정과 갈망"이 아닐까. 그는 끊임없이 태양을 그렸다. 그는 달과 별을 밤에 뜨는 태양이라며 태양이 사라진 밤 하늘을 그렸다. 해바라기, 진정한 그의 자화상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쉬지않고 태양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꽃과 고흐, 그 열정이 닮았다.

 

2007/11/28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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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맨
남궁유 글.그림 / 샘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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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인간>, 어린 시절 사소한 호기심 때문에 온몸이 기름으로 변한 소년이 있다. 기름인간이 된 소년은 한곳에 머물 수가 없어 길을 나선다. 기름인간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만질 수도, 예쁜 꽃 향기를 맡을 수도,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할 수도 없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메스꺼운 냄새까지 난다. 그는 추운 날씨에도 불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당신도 당신 삶에 숙명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적어도 몇 가지쯤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다거나 번번히 실패라는 기분을 맛보는 것 말이야. 그 뒤로 나는 일정한 규칙을 정해두고 이것은 해도 되는 것, 이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두었어. (p. 56~57)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는 겨울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숲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자라기만 한다. 결국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고립되고 만다. 마을의 어느 누구도 숲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레바퀴를 만드는 남자>네 가족이 마을을 떠난다. 점점 커지는 숲 때문에 더이상 수레바퀴가 지나갈 수 있는 길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레바퀴를 만드는 남자>네 가족이 마을을 떠나던 날, <기름인간>이 이 숲에 도착한다.

 

<다리가 튼튼한 남자>는 마을과 숲을 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숲에서 길을 잃어 헤맨 덕분에 숲의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숲으로 약초를 캐러간 남자는 검은 얼룩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흔적을 따라간다. 흔적의 끝에서 만난 <기름인간>, 남자는 괴물이라도 만난 것처럼 마을로 도망을 친다. 얼굴에 <기름인간>의 흔적을 얻어 돌아온 남자는 자신이 괴물의 저주 때문에 곧 죽을거라며 매일 술에 취해 바보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기름인간>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심어준다.

 

<말머리 사나이>는 영웅이 돼서 돌아온다고 큰소리를 치며 전쟁터로 떠났지만 공은 커녕 사소한 편지를 배달하고 잡일을 거드는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친 큰소리 때문에 그냥 돌아갈 수 없었던 사나이는 말머리 가죽을 머리에 쓰고 마을로 돌아왔다. 온 마을이 <기름인간> 때문에 들썩이자 이번에도 그는 <기름인간>을 잡아 오겠다며 큰소리치며 숲으로 향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두려웠다. 그냥 숲에서 시간만 떼우다가 저녁이 되면 마을로 가 또다시 큰소리를 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그 앞에 <기름인간>이 나타났다. 사나이는 <기름인간>을 안으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기름인간>은 '더러워질거야'라는 말 한마디를 하고 숲으로 사라진다. 사나이는 비로소 <기름인간>의 마음을 눈치챘다. 정말 사악하고 나쁜 괴물이었다면 '더러워질거야' 같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털실남자>의 부모님은 그를 집안에만 꽁꽁 숨겨 두었다. 걱정이 컸던 탓인지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신 후 <털실남자>는 집 밖으로 나온다. 멀리있는 산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본 <털실남자>는 눈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에게 여행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여기저기 뻗은 가지들 덕분에 그의 몸에서 털실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눈을 보고 싶었다. 자신의 몸에서 모든 털실들이 풀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눈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털실남자>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의 모습을 해석하기도 한다. <기름인간>은 <말머리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부둥켜 안은 것은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고독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러워진다'는 것보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자신을 안은 것이라고 여겼다. 온전히 서로의 모습이 되어 보지 못한다면,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보아야겠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기름값이 치솟는 때면, <기름인간>의 몸값도 오르는게 아닐까. 계속 몸에서 기름이 흐르고 있는 <기름인간>은 오히려 환영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항상 바람이 부는 꿈을 꾼다. 라는 것과

꿈속에서는 항상 바람이 분다. 라는 것은 다른 의미인가? (p. 87)

 

책을 읽는내내 생각해 보았다. 아마 같은 의미일 것이다. 표현만 다를 뿐.

<기름인간>이나 <말머리 사나이>, <털실남자>가 모습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인간인 것처럼 말이다.

 

2007/11/27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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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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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책』, 내 손에 들려있는 이 책을 보고 혹자는 나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책과 침대는 상극이 아닌가요? 그런가.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깊은 공감을 했는데, 아마도 침대에서 책을 보면 바로 잠에 빠져든다는 얘기겠지.

집에서의 내 생활은 침대와 책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특히 요즘처럼 책상이 놓여져 있는 창가에서 차디찬 바람이 스며 들어올 때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이불로 동굴을 만들어 놓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책만 읽는다. 그래서 내게는 "관능적"이라기보다는 "따뜻하고 포근한"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사실 나는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딜레마에 빠져 있다. 책을 읽기는 하나, 아무리 읽어도 내 자신이 "사색"으로 빠져 들지는 않는다. 같은 책을 읽고도 누군가는 깊은 사유에 빠지곤 하는데, 내 경우에는 거의 그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사유에 빠지더라도 아주 얇은 사유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일부러 사유에 빠지기 위해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한 책을 읽기라도 하면 금새 몰이해에 좌절하고 만다.

 

『침대와 책』은 정혜윤 PD의 독서기를 담고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들과 그것으로부터 나온 생각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궁금해졌다.

나 역시 그녀 못지않게 많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사실 책을 덮고나면 머리 속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당연히 그것들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고 연결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단편들이 머리 속에서 뒤죽박죽 섞여서 어느 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은 번거롭더라도 따로 메모를 해두지만, 그것조차 시간이 지난 후에는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녀는 어떻게 읽은 목록들과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그녀만의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나름대로의 사고 방식이 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바꾸어 보기,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닌 그녀만의 기준으로 정리하기, 그리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그녀에게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그녀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서비스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만의 방식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공유된 그녀의 목록을 보며 고민 중이다. 어떤 책을 읽으면 그녀의 사유까지 공유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녀처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없다. 그녀의 것들을 공유하면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

 

2007/11/27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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