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미술사 - 현대 미술의 거장을 탄생시킨 매혹의 순간들
서배스천 스미 지음, 김강희.박성혜 옮김 / 앵글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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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아내>, 1868-1869


질투는 예술가의 힘! 그들을 거장으로 성장시킨 라이벌들

이 그림은 1868년 에드가 드가가 절친 에두아르 마네 부부에게 선물한 부부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드가는 마네의 아내 수잔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황톳빛 벽 뒤로 숨긴 것일까? 아니면 캔버스가 변색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그림의 오른쪽, 그러니까 황톳빛 벽처럼 보이는 부분은 사실 그림에서 잘려나간 부분이다. 마네의 작업실을 방문한 드가는 누군가 칼로 그림을 잘라냈고, 게다가 칼날이 수잔의 얼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림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드가는 마네가 자신에게 준 정물화를 마네에게 돌려보낸다. 드가의 그림을 훼손한 범인은 다름 아닌 마네였던 것이다.

마네는 왜 수잔의 얼굴을 칼로 잘라낸 것일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수잔은 남편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마네의 표정을 볼 수 있다. 마네의 시큰둥한 태도와 불만 가득한 표정, 아마도 마네는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켜버려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얼굴을 칼로 그어버려야 했던 게 아닐까? 본인 입으로는 수잔의 얼굴을 만족스럽지 않게 그려서 잘라냈다고 했지만, 수잔의 초상화를 자주 그린 자신보다 드가가 훨씬 더 잘 표현했기 때문은 아닐까?

마네는 매력적이었고 온화했으며 대담했다. 사람들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드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상화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7년간 드가는 마네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드가로서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만큼 마네를 알아갈 기회가 그때까지 없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초상화 모델이 되어달라고 마네에게 부탁한 것도 어쩌면 조용히 경쟁적이던 우정 관계를 다지기 위한 방법, 또 누구보다 사교적인 사람이었던 마네의 보다 내밀한 삶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 있다. 39쪽

드가의 초상화에 대해 마네가 화가 났다면 그것은 아마도 초상화를 훼손한 이유로 드는, 즉 수잔을 돋보이게 그리지 않았다는 미온적이고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최고조로 늘어난 위협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말해 드가가 마네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 속에 감춰둔 비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 것이다.

마네가 그 그림을 칼로 그어버린 데는 어쩌면 자신과 모리조 간의 미묘한 상황 속으로 불쑥 침입한 드가에 대한 분노가 일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런던 여행을 제안했다가 불발되었을 때부터 높아졌던, 그러니까 드가가 더 이상 제자나 동료가 아닌 진정한 라이벌이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근원적 의심이 마네를 자극한 것일 수도 있다. 마네가 수렁으로 빠져드는 동안에도 왕성히 나아가던 존재, 그게 드가였다. 게다가 드가는 마네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지나치게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마네의 인생에서 매우 중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결혼 생활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마네의 분노에 불을 지폈을 수도 있다. 마네가 칼로 잘라낸 건 결국 수잔으로 특정되는 부분이었다. 드가의 초상화가 우울한 그 무엇, 대충 꿰맞춘 무언가를 떠오르게 만듦으로써 두 사람의 조합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지게끔 했기 때문일까? 그림을 그어버린 마네의 행동은 혹 수잔과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114쪽

드가의 그림을 그어버린 직후 분노를 가라앉힌 마네는 보다 부드럽고 보다 호의적으로, 드가의 초상화처럼 똑같이 피아노 앞에 앉은 수잔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봐. 이렇게 해야지.'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마치 사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16쪽

드가와 마네의 일화로 시작하는 『관계의 미술사』는 덕분에 상당히 흥미롭게 시작한다. 『 The Art of Rivalry 』이라는 원제처럼 이 책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한 8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ㅡ 에두아르 마네 (1832.1.23~1883.4.30) vs 에드가 드가 (1834.7.19~1917.9.27)

ㅡ 앙리 마티스(1869.12.31~1954.11.3) vs 파블로 피카소(1881.10.25~1973.4.8)

ㅡ 빌럼 드쿠닝(1904.4.24~1997.3.19) vs 잭슨 폴록(1912.1.28~1956.8.11)

ㅡ 루치안 프로이트 (1922.12.8~2011.7.20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vs 프랜시스 베이컨 (1909.10.28~1992.4.28 :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후손)

이 여덟 명의 이름만 봐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예술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름을 알리고 사랑받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뇌했던 시간들이 있었으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비난받는 시절도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질투심 때문에 자기 한계 속에 갇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요즘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 마티스의 작품인데, 마티스와 피카소의 일화가 포함되어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저자 서배스천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예술 비평가로, 흥미 위주의 단 몇 페이지로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깊이 있어서 좋은 반면 가끔은 그들의 일화를 너무 깊게 파고들어서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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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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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읽어보시라!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한국문학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읽힐까? 트렌드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이미 검증된, 지난 세대의 문학을 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딱히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읽을 만큼 읽어서 그 시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시절을 반추해 지금을 생각하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변해버렸으니까.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한 편씩 읽으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에세이는 몇 편 읽었지만 소설은 애써 피해왔었다. 평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이 감탄하는 부분에서 혼자 공감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키울까 봐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은 지난 세대들이 그린 것보다 더 이전의 시절(1950년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힘이 넘치고 새롭다. 문장 자체도 고와서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다. 작품 전체를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문장이 많다.

『엄마의 말뚝』은 세 편의 「말뚝」연작과 여섯 편의 단편이 함께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엄마의 말뚝 1」은 개성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터를 잡은 박완서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아들과 딸이 서울에서, 그것도 서울 문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하며 살림을 키우다가 기어코 서울에 집을 장만해 말뚝을 박는다. 그들은 그곳을 '괴불마당' 집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주인공이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서 '신여성'이 되길 원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신여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죽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33쪽)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34쪽) 하지만 '나'의 눈에는 시시해 보였던 신여성. 아마도 어린 '나'는 몰랐을 것이다.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는 훗날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여성'이 된 후에야 그걸 깨닫는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고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나'는 "어머니가 낯설고 바늘 끝도 안 들어가게 척박한 땅에다가 아둥바둥 말뚝을 박으시면서 나에게 제발 되어지이다,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바란 신여성보다 지금 나는 너무 멋쟁이가 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한 것으로부터는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못 미처 있는가. 엄마의 생각은 그 당시에도 당돌했지만 현재에도 역시 당돌했다. (…)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81~82쪽

문밖에 살면서 일편단심 문안에 연연한 엄마는 내가 그 동네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문안 애가 되길 바랐다. (…) 엄마는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상향과 당장 처한 현실과의 갈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식이 겪는 갈등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 한동네 사는 애들하곤 격이 다르게 만들려고 엄마가 억지로 조성한 나의 우월감이 등성이 하나만 넘어가면 열등감이 된다는 걸 엄마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같이 이질감이라는 것으로 서로 한통속이었다. 67쪽

「엄마의 말뚝 2」는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나'가 집을 비울 때마다, 밖에 나가서 집이라는 존재를 잊고 있을 때마다 집에서는 사고가 터진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길에 넘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사고의 당사자가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여서 조금 안도한다. 뼈가 부러진 어머니는 괴불마당 집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때도 어머니는 눈길에 미끄러져 손목을 다쳤고, 오빠와 '나'는 돈 걱정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몰래 산골을 구하러 나선다. 산골이 나는 곳은 한 곳뿐이었는데, 그곳을 지키던 사람은 약간의 돈을 받고 산골을 아이들에게 내주면서 정성을 들였으니 이내 나을 거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의 손목은 이내 나았고, 어머니는 이때까지 그 산골의 효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전쟁 때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고향이 보이는 바다, 그곳을 갈 수 없는 고향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에 아들의 유해를 뿌렸다. 어머니는 자신도 그 아들처럼 장례를 치러달라고 당부한다.

「엄마의 말뚝 3」에서 어머니는 그 후 7년을 더 사셨다. 그리고 유언처럼 또다시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당부했지만, 장손은 자신의 어머니 곁에 할머니를 모셨다. 그게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생각한다. "한을 품은 세대가 속속 죽어가니 느희끼리 잘들 해보라."(171쪽)고. 이제 어머니의 성함이 쓰인 말뚝이 산소 앞에 꽂혔다.

「엄마의 말뚝 1ㆍ2ㆍ3」에는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고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세대의 안타까움이 베여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거창하지 않고 작가 가족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소소하게 조명해 준 방식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이와 더불어 「유실」, 「꿈꾸는 인큐베이터」,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을 찍는 사진사」, 「창밖은 봄」, 「우리들의 부자」를 통해 지난 세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보편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여성의 경제력(혹은 일자리), 계층 갈등 같은 문제들이다. 작가의 소설이 여전히 힘이 있고 새롭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 시절도 바뀌고 세계도 바뀌었는데, 왜 이런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말뚝」 연작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의 단편들도 모두 매력 넘치는 작품들이지만,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그 매력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밖에 없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들의 고통을 털끝만 한 잔재도 안 남기고 뿌리 뽑아내는 내 솜씨는 참으로 영검했다. 마음속에 여자가 받는 그런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있음으로써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나였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337쪽

흰 꽃을 문 뱀처럼 유연하고 민첩한 학부모의 손길이 흰 꽃 대신 가시를 물고 내 수치심을 찔렀다. 「꿈을 찍는 사진사」, 407쪽

밉지도 않고, 싫었을 뿐이다. 미움은 적어도 정열의 일종이지만 싫증에는 그런 열기조차 없다. 「꿈을 찍는 사진사」, 414쪽

올봄은 내일보다는 멀지만 착실히 다가오고 있다. 내일처럼 영원히 도망치지는 못한다. 「창밖은 봄」,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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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
태재 외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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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몽당연필에 대한 로망

여전히 연필을 쓴다. 연필이 좋아서 연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몽당연필이 갖고 싶어서 연필을 쓴다. 투병한 유리병에 몽당연필을 차곡차곡 넣어 책장 위에 올려두고 싶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를 읽으면서 나처럼 몽당연필에 대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몽당연필 만들기 동호회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유리병에 차곡차곡 모으기는커녕 몽당연필을 한 자루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일 년 내내 쓰고 깎아도 한 자루도 만들 수 없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거나 책에 살짝 메모하는 용도로만 연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몽당연필이 갖고 싶어서 일부러 쓰임새를 찾아낸 것이다. (덕분에 애정 했던 마일드라이너는 안녕히!)

상상해 본다. 내가 쓴 몽당연필을 모아 놓는 상상을.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 내 서랍을 열었을 때, 그 속에는 몽당연필 몇 자루도 남겨 놓고 싶다. 나의 노력을 은근하게 과시하고 싶다. 20쪽, 태재

하나 사면 한참을 쓴다. 몽당연필을 만들려고 억지로 깎을 정도다. 아, 뾰족한 심을 좋아해서 매번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쓰는 분들은 금방 닳을 수도 있겠다. 나는 뭉툭하게 닳은 연필도 좋아하는 편이라 연필을 많이 사용하지만 소비가 정말 더디다. 일 년에 몽당연필을 세 자루 정도 만들어 내는 듯하다. 얼른 몽당연필들을 모아서 투명한 유리병에 보관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연필이 잘 줄어들지 않는다. 160쪽, 펜크래프트



일 년에 한 자루도 만들기 어려운 몽당연필. 이 정도 속도라면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몽당연필은커녕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연필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미술관을 가면 굿즈로 연필을 사는 버릇이 있어서 몸값 비싼 연필들도 꽤 많다.

조급한 마음에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얼마나 작아져야 몽당연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기부나 나눔 같은 것을 할 때 7cm 이하의 연필은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7cm? 아니 이건 너무 긴 것 같고 5cm? 연필 깎이로 연필을 깎는 나는 더 이상 연필 깎이로 깎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몽당연필이라 부르기로 했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시인, 만화가, 에디터, 에세이스트, 유튜브 크리에이터, 작곡가, 디자이너 등 연필과 일상이 맞닿아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좋았던 이야기는 손글씨 크리에이터 펜크래프트의 연필로 필사하는 이야기와 연남동에서 작은 연필 가게 '흑심'을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연필 이야기였다. '흑심' 디자이너들은 연필을 팔 때, 단순히 오래된 연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왜 연필을 파는지, 이 연필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함께 소개해 준다고 한다. 연필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는 따로 한 권의 책으로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끼는 무언가를 사용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 중 하나다. 더군다나 연필은 점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더 아까운 마음이 든다. 연필을 수 천 자루 모은 우리도 아끼는 연필은 아직 선뜻 쓰지 못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일을 할 때나 소중한 글을 적을 때는 아끼는 연필로 써 보길 추천한다. 쓰면 더 소중해지기도 하니까. 물론 안 써도 좋다. 그 연필이 10년 뒤 또는 20년 뒤에 누구에게 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쓰지 않고 간직해 준 덕분에 우리도 이 소중하고 오래된 연필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도 우리는 오래된 연필에 환호한다. 194쪽, 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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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열린책들 세계문학 12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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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도끼 책을 원한다면 이 책으로!

도스토옙스키는 24세 때인 1845년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벨린스키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이내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사상을 옹호하고 당대 러시아 상황에 대한 비판적 모임이었던 뻬뜨라셰프스끼 서클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활동은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기준으로 초기ㅡ중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아저씨의 꿈』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배를 다녀온 뒤 처음으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을 통해 중기 창작 활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아저씨의 꿈』은 허영심도 많고 말도 많지만 수완 역시 좋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가 자신의 딸 지나를 쇠약한 K 공작에게 시집보내려는 계획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담고 있다. 지나에게 구혼 중인 모즈글랴꼬프는 마리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차 사고를 당한 K 공작을 친척 집 대신 마리야의 집으로 모셔온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K 공작은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고 기억력과 판단력 또한 흐려진 상태다. 마리야는 폐병에 걸려 병석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가정교사에게 마음을 뺏긴 지나에게 K 공작과 결혼하라고 설득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입도 뻥긋 못하게 했던 지나는 자신이 부유한 공작의 미망인이 된다면 가정교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결국 승낙하고 만다. 수완 좋은 마리야는 K 공작 역시 잔뜩 술이 취한 상태에서 지나에게 청혼을 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를 모두 엿듣게 된 모즈글랴꼬프는 잠에서 깨어난 K 공작(사실 모즈글랴꼬프의 아저씨뻘쯤 된다.)에게 그것은 '꿈'이었다고 말한다. K 공작 역시 나이 어린 지나에게 청혼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아마 꿈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원래 작은 소도시에서는 소문도 빨리 퍼지는 법. 모즈글랴꼬프의 방해로 계획도 들통나고 결혼도 무산된 마리야 일가는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모즈글랴꼬프 역시 취직해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가장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발령을 받아 간 곳에서 시장의 아내가 된 지나를 만나게 된다.

불행은 언제나 한 가지만으로 그치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 운명이 한번 어떤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 주면 그 불행의 타격은 끝없이 계속되게 마련이다. 232쪽

한 편의 드라마(혹은 연극)를 보는 것처럼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런데 왜 '아저씨의 꿈'일까? 처음에는 '어머니 마리야의 꿈(신분 상승)'이었다가 '모즈글랴꼬프의 꿈(결혼)' 때문에 결국 '아저씨의 꿈(백일몽)'으로 끝나버리는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그렇게 끝나버리니 '아저씨의 꿈'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텐데, 그렇다면 '지나의 꿈'은 무엇일까? 한때 꿈꿨던 가난한 가정교사와의 사랑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버리자 결국 체념해 버린 것일까? 정작 본인의 결혼을 두고 가장 목소리가 작았던 지나. 지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주제의 결이 사뭇 달라 보이는 이 소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평하는데, 그 이유를 다음의 글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유형 생활을 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여전히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배 생활을 통해 인간 도스토옙스키도, 작가 도스토옙스키도 모두 성장했다고.

15년 동안 나는 『아저씨의 꿈』을 한 번도 다시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읽어 보니 형편없군요. 나는 당시 출옥한 직후 시베리아에서 이 작품을 썼는데, 그때 유일한 집필 목적은 문학 활동을 개시하는 데 있었고 또한 검열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검열에 걸리지 않을 온건한 작품을 썼던 겁니다. 이 작품은 가벼운 보드빌로 만들 수 있겠지만, 희극을 만들기에는 내용이 부족하며, 이 중편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인물인 공작에게서도 내용은 부족합니다. 283~284쪽,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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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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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지만 이것 또한 삶이었다!

좋은 작품을 읽은 후에는 리뷰를 쉽게 쓸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좋았다고만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으면서 "초등학생 일기도 아니고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는 없을까?" 이렇게 투덜대곤 했었는데, 지금 되짚어보니 그들도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는 1년이 지나도 못 쓸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써보기로 한다. 아무튼 이 책의 좋았던 부분을 이 부족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만 유념해 주길 바라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연작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2017)』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소설 곳곳에 '루시 바턴'을 비롯해 전작에서 언급됐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순서대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이 책만 따로 떼내어 각각의 단편소설로 읽어도 충분히 매력 있는 책이다. 단,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것.

9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무엇이든 가능하다』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과 학대가 평생 흉터처럼 남아있는 사람들. 소도시 특성상 이 정도 근황쯤은 쉽게 알 수 있고, 다른 누군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소홀하게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통해 스트라우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었을 테다. 타인이 멀리서 본 상처와 직접 주인공의 입으로 말하는 상처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과 연대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때론 그곳 출신인 작가 루시 바턴의 책을 통해서도 위로받곤 한다. 그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좌절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함께한 친구를 '선물'이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다. 어차피 '삶'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불안을 이해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삶을 "살아내는 중"(83쪽)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347쪽)

그 화재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 선물을 꼭 간직하고 살아가라고 내려준 계시 같았다. 그 생각을 혼자만 간직한 것은, 비극적인 사건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시」, 12쪽

그는 나이가 들수록ㅡ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ㅡ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계시」, 22쪽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ㅡ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ㅡ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계시」, 41쪽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엄지 치기 이론」, 149쪽

고통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은 결코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엄지 치기 이론」, 158쪽

하지만 이것이 삶이었다! 그리고 삶은 엉망이었다! 「미시시피 메리」, 199쪽

언제나처럼 스트라우트의 감정 묘사는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이지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있다.

ㅡ 그것은 가려움증과 같아서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228쪽

ㅡ 행복감이 따뜻한 액체처럼 몸속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230쪽

ㅡ 뚜렷한 이유 없이, 어쩌면 바로 그 순간 견목 바닥 위로 해가 비스듬히 들어왔다는 것 이상의 이유는 없이, 불현듯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기억이 도티를 찾아왔다. 262쪽

이런 섬세한 감정 묘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나의 최애 작가로 급부상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제목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니, 이런 세계관은 정말 질색이다. 표지 또한 그런 느낌이라서 더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원제 역시 그랬으니 제목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고, 제발 나처럼 제목 때문에 이 책을 기피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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