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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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지만 이것 또한 삶이었다!

좋은 작품을 읽은 후에는 리뷰를 쉽게 쓸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좋았다고만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으면서 "초등학생 일기도 아니고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는 없을까?" 이렇게 투덜대곤 했었는데, 지금 되짚어보니 그들도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 좋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는 1년이 지나도 못 쓸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써보기로 한다. 아무튼 이 책의 좋았던 부분을 이 부족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만 유념해 주길 바라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연작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2017)』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로, 소설 곳곳에 '루시 바턴'을 비롯해 전작에서 언급됐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순서대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이 책만 따로 떼내어 각각의 단편소설로 읽어도 충분히 매력 있는 책이다. 단, 두 권의 책을 모두 읽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된다는 것.

9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무엇이든 가능하다』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사람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과 학대가 평생 흉터처럼 남아있는 사람들. 소도시 특성상 이 정도 근황쯤은 쉽게 알 수 있고, 다른 누군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소홀하게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을 통해 스트라우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었을 테다. 타인이 멀리서 본 상처와 직접 주인공의 입으로 말하는 상처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과 연대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때론 그곳 출신인 작가 루시 바턴의 책을 통해서도 위로받곤 한다. 그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좌절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함께한 친구를 '선물'이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다. 어차피 '삶'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불안을 이해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삶을 "살아내는 중"(83쪽)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347쪽)

그 화재는 하느님이 그에게 이 선물을 꼭 간직하고 살아가라고 내려준 계시 같았다. 그 생각을 혼자만 간직한 것은, 비극적인 사건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시」, 12쪽

그는 나이가 들수록ㅡ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ㅡ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계시」, 22쪽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ㅡ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ㅡ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계시」, 41쪽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엄지 치기 이론」, 149쪽

고통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건 당신은 결코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엄지 치기 이론」, 158쪽

하지만 이것이 삶이었다! 그리고 삶은 엉망이었다! 「미시시피 메리」, 199쪽

언제나처럼 스트라우트의 감정 묘사는 섬세하고 구체적이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이지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있다.

ㅡ 그것은 가려움증과 같아서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228쪽

ㅡ 행복감이 따뜻한 액체처럼 몸속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230쪽

ㅡ 뚜렷한 이유 없이, 어쩌면 바로 그 순간 견목 바닥 위로 해가 비스듬히 들어왔다는 것 이상의 이유는 없이, 불현듯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기억이 도티를 찾아왔다. 262쪽

이런 섬세한 감정 묘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상처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최근 나의 최애 작가로 급부상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2016)』과 이어지는 이야기인 걸 알면서도 제목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니, 이런 세계관은 정말 질색이다. 표지 또한 그런 느낌이라서 더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원제 역시 그랬으니 제목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고, 제발 나처럼 제목 때문에 이 책을 기피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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