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말뚝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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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읽어보시라!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한국문학에 대해 조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읽힐까? 트렌드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이미 검증된, 지난 세대의 문학을 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딱히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읽을 만큼 읽어서 그 시절을 모르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시절을 반추해 지금을 생각하기엔 세상이 너무나도 변해버렸으니까.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한 편씩 읽으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에세이는 몇 편 읽었지만 소설은 애써 피해왔었다. 평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이 감탄하는 부분에서 혼자 공감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키울까 봐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은 지난 세대들이 그린 것보다 더 이전의 시절(1950년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힘이 넘치고 새롭다. 문장 자체도 고와서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다. 작품 전체를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문장이 많다.

『엄마의 말뚝』은 세 편의 「말뚝」연작과 여섯 편의 단편이 함께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엄마의 말뚝 1」은 개성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터를 잡은 박완서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아들과 딸이 서울에서, 그것도 서울 문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하며 살림을 키우다가 기어코 서울에 집을 장만해 말뚝을 박는다. 그들은 그곳을 '괴불마당' 집이라고 부른다. 어머니는 주인공이 서울에서 학교를 나와서 '신여성'이 되길 원한다. 어머니는 '나'에게 신여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죽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33쪽)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34쪽) 하지만 '나'의 눈에는 시시해 보였던 신여성. 아마도 어린 '나'는 몰랐을 것이다.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는 훗날 어머니의 바람대로 '신여성'이 된 후에야 그걸 깨닫는다. 세월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신여성'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고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깝다.

'나'는 "어머니가 낯설고 바늘 끝도 안 들어가게 척박한 땅에다가 아둥바둥 말뚝을 박으시면서 나에게 제발 되어지이다,라고 그렇게도 간절히 바란 신여성보다 지금 나는 너무 멋쟁이가 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신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한 것으로부터는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못 미처 있는가. 엄마의 생각은 그 당시에도 당돌했지만 현재에도 역시 당돌했다. (…)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81~82쪽

문밖에 살면서 일편단심 문안에 연연한 엄마는 내가 그 동네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문안 애가 되길 바랐다. (…) 엄마는 자기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상향과 당장 처한 현실과의 갈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자식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식이 겪는 갈등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 한동네 사는 애들하곤 격이 다르게 만들려고 엄마가 억지로 조성한 나의 우월감이 등성이 하나만 넘어가면 열등감이 된다는 걸 엄마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우월감과 열등감은 다같이 이질감이라는 것으로 서로 한통속이었다. 67쪽

「엄마의 말뚝 2」는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나'가 집을 비울 때마다, 밖에 나가서 집이라는 존재를 잊고 있을 때마다 집에서는 사고가 터진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길에 넘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사고의 당사자가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여서 조금 안도한다. 뼈가 부러진 어머니는 괴불마당 집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때도 어머니는 눈길에 미끄러져 손목을 다쳤고, 오빠와 '나'는 돈 걱정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몰래 산골을 구하러 나선다. 산골이 나는 곳은 한 곳뿐이었는데, 그곳을 지키던 사람은 약간의 돈을 받고 산골을 아이들에게 내주면서 정성을 들였으니 이내 나을 거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의 손목은 이내 나았고, 어머니는 이때까지 그 산골의 효험을 믿고 있는 것이다. 전쟁 때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고향이 보이는 바다, 그곳을 갈 수 없는 고향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며 그곳에 아들의 유해를 뿌렸다. 어머니는 자신도 그 아들처럼 장례를 치러달라고 당부한다.

「엄마의 말뚝 3」에서 어머니는 그 후 7년을 더 사셨다. 그리고 유언처럼 또다시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당부했지만, 장손은 자신의 어머니 곁에 할머니를 모셨다. 그게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생각한다. "한을 품은 세대가 속속 죽어가니 느희끼리 잘들 해보라."(171쪽)고. 이제 어머니의 성함이 쓰인 말뚝이 산소 앞에 꽂혔다.

「엄마의 말뚝 1ㆍ2ㆍ3」에는 전쟁 때문에 가족을 잃고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세대의 안타까움이 베여 있다. 한국의 현대사를 거창하지 않고 작가 가족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소소하게 조명해 준 방식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이와 더불어 「유실」, 「꿈꾸는 인큐베이터」,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을 찍는 사진사」, 「창밖은 봄」, 「우리들의 부자」를 통해 지난 세기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보편적으로 겪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 가장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여성의 경제력(혹은 일자리), 계층 갈등 같은 문제들이다. 작가의 소설이 여전히 힘이 있고 새롭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이다. 시절도 바뀌고 세계도 바뀌었는데, 왜 이런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말뚝」 연작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편의 단편들도 모두 매력 넘치는 작품들이지만,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그 매력을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말밖에 없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들의 고통을 털끝만 한 잔재도 안 남기고 뿌리 뽑아내는 내 솜씨는 참으로 영검했다. 마음속에 여자가 받는 그런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있음으로써만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 건 나였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 337쪽

흰 꽃을 문 뱀처럼 유연하고 민첩한 학부모의 손길이 흰 꽃 대신 가시를 물고 내 수치심을 찔렀다. 「꿈을 찍는 사진사」, 407쪽

밉지도 않고, 싫었을 뿐이다. 미움은 적어도 정열의 일종이지만 싫증에는 그런 열기조차 없다. 「꿈을 찍는 사진사」, 414쪽

올봄은 내일보다는 멀지만 착실히 다가오고 있다. 내일처럼 영원히 도망치지는 못한다. 「창밖은 봄」, 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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