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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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잊혀지고 싶어서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완전 편애하는 김중혁 작가의 새 장편소설이 나왔습니다. 최근 김유정 문학상, 젊은 작가상,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위치를 공공히 하고 있을 뿐아니라 팟캐스트라는 매체를 통해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는 김중혁 작가. 그동안 팟캐스트를 통해 살짝 살짝 언급한 적이 있어서인지 더욱 궁금하게 만듭니다.

 

   얼마전, 죽은 사람의 온라인 기록을 모두 삭제하는 '디지털 장례식'이라는 것이 관심을 받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몸은 죽어 없어졌는데, 내가 남긴 기록과 사진들이 온라인 상에 그대로 떠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으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게 죽은 사람에게도,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속 편한 일이겠죠.

   역시 김중혁 작가는 문학계의 '얼리어댑터'이자 '젊은 작가'가 확실합니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는 '딜리팅(Deleting)' 혹은 '딜리터(Deleter)'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딜리터'는 의뢰자가 미리 이 세상에서 지워달라고 한 비밀을 의뢰자가 죽고나면 대신 지워주는 사람으로, 이런 일을 '딜리팅'이라고 합니다. 이 '딜리팅'에는 앞서 언급한 '디지털 장례식'이 포함될 수도 있고, 각종 데이터들이 가득 차있는 컴퓨터 하드디스크, 하루도 빠짐없이 작성한 일기,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한 사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딜리터'는 의뢰자의 죽음이 범죄와 관련되지 않는 한, 의뢰자가 의뢰한 것을 틀림없이 지워줍니다.

   한때는 형사였던 구동치가 '딜리터'가 된 이유는, 흔하고 흔한 탐정업계에서 틈새 시장을 공략한 탓이겠죠. 악취가 풍기는 악어빌딩 4층에 탐정 사무실을 연 구동치, 소박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서로 얽혀 있는 악어빌딩에서 구동치는 해결사 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구동치를 찾을 정도입니다. 이런 인간미 솔솔 풍기는 구동치도 의뢰인이 앞에 앉아 있으면 까칠한 딜리터로 변신합니다.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에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 (p.11)

 

   1920년대 이탈리아 테너 가수가 모노로 녹음한 아리아가 흘러나오는 사무실에 노크를 하는 순간, 구동치와 의뢰자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의뢰자가 구동치에게 무언가를 없애달라고 의뢰를 하기 위해서는 왜 없애려고 하는지 비밀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구동치는 합당한 이유없이 무언가를 없애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동치는 의뢰자와의 계약과는 달리 그것들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지는 않습니다. 그저 위치를 바꿀 뿐입니다. 의뢰자가 알고 있던 장소에서 구동치의 사무실 캐비넷으로 말이죠.

 

   "사람들이 제일 많이 없애달라는 게 뭐예요?"

   "다양하죠. 비밀문서, 사진, 연애편지, 컴퓨터……"

   "난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게, 사람들은 다들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그렇게 없애고 싶은 거면 미리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거죠."

   "이상한 사람들이네."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p.232)

 

   구동치의 이야기처럼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안고 사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소용 없는 물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안고 있는 것들 말이죠. 어쩌면 이런 흔적이나 지켜야 할 비밀이라도 있어야 세상을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깔끔하게 죽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했던 말요. 탐정님 말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인데, 어떻게 보면 그 흔적이야마롤 진짜 그 사람이잖아요. 지저분한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p.49)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p.328)

 

   한때는 구동치의 동료였다가 지금은 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구동치와 손을 잡고 일하는 김인천 형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역지사지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썼는데, 그의 소설을 읽은 구동치는 "빨리 읽을 수 있다는 건 소설의 가장 큰 장점"(p.288)이라고 한다. 그렇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기발한 소재와 캐릭터가 등장해 흥미를 유발하면서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1920년대 아리아 가수가 그토록 길다고 노래했던 무미건조한 월요일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함께 사라졌으면 하는 것들은 참 많은데, 반대로 꼭 간직해줬으면 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아마도 버리고 싶은 것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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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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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미래에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마이크로소프트 ★★★★★ / 구글 ★★★★☆ / 삼성전자 ★★★☆☆ / 애플 ★★★☆☆

 

세계를 대표하는 전자ㆍIT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네 기업에 매겨진 별점은 어떻게 산정된 것일까요? 지금은 다소 주춤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별점 5개로 1위, 항상 혁신을 강조하고 있는 애플은 겨우 별점 3개를 받았습니다.

이 별점은 독일의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인 프랑크 비베가 독일의 전문 평가기관 세 곳의 점수와 자신의 생각을 토대로 지수화한 것입니다. 그가 평가한 것은 기업의 혁신 아이디어나 경영 상태가 아닙니다. 그는 기업의 윤리성을 평가했고, 특히 그 중에서도 지속 가능성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즉, 기업의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를 평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근본적으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으로, 무엇보다 기업의 이윤이 우선시 됩니다. 이렇게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비윤리적이고 공정하지 못한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기업은 원래 그런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니, 돈만 잘 벌면 그만일까요?

저자는 소비자들이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기업 스스로도 윤리 기준을 만들고 자정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위에 언급된 별점은 이런 저자의 생각이 반영돼 나온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퓨터를 팔면서 자사의 소프트웨어를 끼워 팔고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업 윤리가 바닥이어야 할텐데, 왜 별점을 5개나 받았을까요? 그것은 모두 창업주인 빌 게이츠의 게이츠 재단 덕분입니다. 비록 독점적인 시장 지배를 통해 어마어마한 돈을 벌긴 했지만, 재단을 만들어 그것을 다시 기부하면서 최소한의 노력을 보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세상에는 돈 잘 버는 기업도 많지만, 이렇게 많이 기부하는 창업주도 드문 일이니까요.

 

게이츠 재단의 재산이 결국 게이츠가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서 거둔 천문학적인 수익에서 비롯되었다는 비난은 맞다. 그러나 독점적 지위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게다가 다른 기업은 그렇게 번 돈을 재단에 기부하지도 않는다. (p.139)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지만, 해외에서는 검색을 하려면 구글로 갑니다.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으면, 역시 구글로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글을 통해 정보를 공유합니다. 구글 역시 자사의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합니다. 이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해당하는 범죄가 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 또한 구글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저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구글에게 별점 4개를 주며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최근 가장 떠들썩한 두 라이벌인 삼성과 애플은 나란히 별점 3개를 받았습니다. 애플은 혁신 IT 기기를 내놓지만 직접 생산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중국 등에 하청을 주곤 하는데, 애플의 윤리적 문제는 대부분 이곳에서 발생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임금이나 아동 노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나마 별점 3개를 받게 된 것도 이 하청업체들을 모두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하청업체들 명단을 공개해 버리면 정부나 감시 단체들이 예전보다 더 엄격하게 감시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삼성은 대부분의 제품을 직접 생산합니다. 그래서 애플에 비하면 하청업체 문제는 줄어들 수 있지만, 총수 일가의 윤리적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삼성은 재벌 총수가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도 곧 특별 사면이 될 정도로 파워가 막강합니다. 게다가 다른 기업들처럼 공개되어 있는 것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어서 별점 3개를 준 이유도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이름있는 기업 50곳의 윤리보고서를 이런 식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이 윤리보고서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깊이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드러나 있는 부분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하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처럼 저자 자신의 윤리적 잣대에 따라 일종의 면죄부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에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인류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우리도 기업을 선택할 때, 또하나의 잣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세상은 우리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데 말이다. 개인이 무슨 힘이 있을까? 그런 재앙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정치인과 기업이 져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정치인들과 기업에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정치인을 뽑고 기업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탄식하는 것처럼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잘사는 나라의 소비자인 우리는 누구보다 힘이 세다. 우리의 돈이 누구에게로 갈지 결정하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한 사람이 구매 태도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많은 소비자가 힘을 합치면 세사으이 가장 거대한 경제 권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투표 한 장이 선거를 결정하지는 못하지만 그 표들이 모이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인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에도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업의 생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제동을 걸고, 나쁜 기업과 좋은 기업을 가려내고, 기업 활동에 관심을 보이고, 목적의식을 갖고 상품을 구매하거나 소비하고, 때로는 시위나 청원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기업은 고객이 상품 생산 방식에 관심을 보인다는 인상을 받을수록 윤리 지침을 준수해야 할 압박도 더 거세게 느끼기 때문이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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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노예 12년 - 체험판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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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잃어버리는 건 한순간! 모두가 함께 경계하고 지켜야 합니다!
학창시절, 50분 수업이 끝나면 주어지는 10분 휴식의 달콤함! 다들 기억하실거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시대를 잘 타고나서 대놓고 자유를 빼앗긴 적은 없지만, 잠깐씩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될 때도 우리는 못 견뎌합니다. 그런데 자유인으로 태어나 12년 동안 누군가의 소유물로 전락해 억압받는 삶을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예 12년』은 작가 솔로몬 노섭이 실제로 겪은 일들을 소설로 쓴 것으로, 그는 자유인으로 태어나 30년 넘게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다시 자유인으로 돌아오기까지 12년 동안의 노예 생활과 투쟁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1853년 1월 20일 「뉴욕 타임스」 1면에 처음 소개되었고, 3개월 후에 책으로 나오게 됐다고 합니다.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되자 얼마 전에는 「뉴욕 타임스」가 당시 기사에서 노섭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 것을 161년만에 정정 보도한 적도 있었죠.
『노예 12년』을 읽기 전에 당시의 시대상을 조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에 발발하는데, 솔로몬 노섭은 1841년에 납치를 당합니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도를 두고 찬반 논쟁이 뜨겁던 때였습니다. 미국 북부는 도시 산업 혁명으로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남부는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예들의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북부에서는 노예들에게 자유인 증서를 쥐어주며 풀어주고 있었지만 남부에서는 오히려 더 노예 거래가 성행했습니다.
"뉴욕에 사십니다."
"자네가 그곳에 살았었나?"
"네, 나리 ─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그렇다면 자유인이었잖아. 이 빌어먹을 깜둥이 같으니."
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널 살 때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
"엡스 나리."
나는 그동안 사용하던 것과는 약간 다른 말투로 대답했다.
"엡스 나리, 나리가 굳이 저한테 물어보지 않으신 거죠. 게다가, 저는 한 주인한테 ─ 저를 납치했던 사람한테 ─ 내가 자유인이라고 말했다가 거의 죽을 만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p.292)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솔로몬 노섭은 자유인 증서가 있는 자유인이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곤 하는데, '노섭'이라는 성은 솔로몬의 아버지를 자유인으로 풀어준 주인의 성입니다. 노섭은 다른 곳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누군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뉴욕을 떠납니다. 노예제가 있는 주에 가려면 자유인 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챙겨서 나섰는데, 누군가에게 이 자유인 증서를 빼앗기고 노예로 팔려 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솔로몬 노섭이라는 이름 대신 플랫 포드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노예를 거느리는 주인들이 항상 악덕하지는 않지만 플랫이 만난 주인 중의 한 명은 노예를 동물보다 더 못하게 여겼고 그로 인해 플랫은 2번이나 죽을 고비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악덕한 주인이 있는 반면, 노예들을 일꾼으로 여기며 존중해주는 주인도 있어서 플랫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급기야 자유인으로 풀려나기에 이릅니다.
『노예 12년』을 보면 노예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보가 필요할 때 부동산에 하는 근저당 설정을 이 당시에는 동산인 노예에게도 할 수 있었습니다. 노섭은 이 저당권 설정 때문에 목숨을 살릴 수 있었지만, 인간에게 그 몫에 따라 주인이 여러 명 될 수 있다는 사실. 정말 잔인하죠? 게다가 노예들에게 흔하게 가해졌던 채찍질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범죄자에게 행해지던 수준과 맞먹습니다. 그저 목화밭에서 가지 하나를 부러 뜨렸을 뿐인데 25대의 채찍질이 가해집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피부색 하나 다르다고 그들이 견뎌내야 하는 억압의 크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채찍질 횟수는 사안에 따라 등급이 다르다. 25대는 그저 가벼운 벌 정도로 여겨지는데, 목화 속에서 마른 잎이나 꼬투리 조각이 발견될 때, 또는 목화밭에서 가지 하나를 부러 뜨릴 때의 벌이다. 50대는 그다음 단계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모든 노예들이 받는 보통의 벌이다. 100대는 심한 벌로 여겨지는데, 목화밭에서 빈둥빈둥 서 있는 심각한 죄를 저지를 때 가해진다. 150대부터 200대까지는 오두막 동료와 싸운 죄에 대한 벌이며, 500대는 개들에게 물어 뜯기는 것과 함께, 동정받지 못하는 가련한 탈주 노예를 몇 주 동안의 극심한 고통과 통증으로 몰아넣는 벌이다. (p.177)
지금은 피부색이 다른 대통령이 나올 정도로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상 노예제도도 폐지되었으니 먼 옛날의 이야기 같겠지만, 지금은 또다른 의미의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혹은 어느 한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유, 우리 모두가 경계하고 지킬 때 누구에게나 평등한 자유가 주어지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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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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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 불리는 '누구나'의 이야기!

'우연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폴 오스터. 지금까지 읽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은 모두 '우연'에 대한 소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겨울일기』는 조금 색다른 소설입니다.

『겨울일기』는 1947년 생인 폴 오스터가 그동안의 삶을 회고하며 써내려간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특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나 '그'가 아닌 2인칭 '당신'입니다. 서술자 본인이 자기 자신을 '당신'이라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폴 오스터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는데, 단순히 시간에 따라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정 사건 혹은 주제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가 살았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47년 2월 3일, 뉴저지 뉴어크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2011년 1월의 어느날까지 그 긴 세월동안 자신이 몸을 부렸던, '집'이라고 불렀던 장소들은 21곳이나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뉴욕과 브루클린인데, 그래서 『뉴욕 3부작』과 『브루클린 풍자극』이라는 소설이 나올 수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그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가족이겠죠? 그는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두 명의 아내와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죽음도 함께 되돌아 봅니다. 지금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할아버지나 할머니,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조만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p.7)

『겨울일기』가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이야기를 쓴 이유는, 비록 작가 자신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독자'들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라는 것이죠. 작가의 소설의 첫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평생 '우연'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폴 오스터. 이 소설, 이 순간만큼은 '우연'을 노래할 수가 없었겠죠. 태어나고, 늙고, 죽어가는 과정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할 운명일테니까요.

"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쉰일곱 살에 나는 늙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일흔네 살이 되니 그때보다 훨씬 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당신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문제이며 당신과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공유하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에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당신은 그의 말을 계속해서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희미하게 반짝이면서 그가 한 말의 진실을 거의 이해할 것만 같은 때가 간혹 있다. 사람은 일흔네 살 때보다 쉰일곱 살 때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는, 어쩌면 이런 간단한 뜻인지도 모른다.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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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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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는데도 의문이 남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책은 독자들을 참 피곤하게 만듭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팽 선생』 또한 바로 그런 책입니다. 특히, 『팽 선생』은 로베르토 볼라뇨가 죽기 전까지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작가를 다시 불러와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팽 선생』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최면요법가이자 침술가인 팽 선생에게 딸국질이 멎지 않아 죽어가고 있는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를 봐달라는 청이 들어옵니다. 병원에서는 바예호를 위해 어떤 치료나 조치도 하지 않고, 병의 원인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팽 선생이 바예호를 살펴보는 것은 경계합니다. 게다가 이상한 일도 벌어집니다. 바예호를 보고 돌아오는 날, 두 명의 스페인 남자가 나타나 바예호의 치료를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바예호의 치료만 거절하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만큼 많은 돈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예호는 이 알 수 없는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이미 유명한 의사가 나타나 바예호를 살펴보겠다고 해서 시인의 부인은 팽 선생의 도움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두 스페인 남자는 자신이 치료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으니,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이 돈으로 레노 부인과 근사하게 저녁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요.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바예호 부인이 다시 팽 선생의 도움을 청했고, 팽 선생이 병원으로 가자 병원 관계자들이 그를 막아섭니다. 바예호 부인을 소개해 줬던 레노 부인과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스페인 남자들을 찾아 돈을 돌려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상은 더욱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집니다. 멀리 스페인에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고, 자살했던 친구는 어느날 영화 속에서 등장합니다. 레노 부인은 약혼자를 데리고 나타나 바예호가 죽었다고 하며 한마디 남깁니다.

"아직도 선생님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p.160)

도대체 팽 선생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팽 선생 뿐만이 아닙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현실인지 꿈인지,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튀어 나옵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예호는 실존했던 인물이며, 바예호 뿐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팽 선생』을 통해 로베르토 볼라뇨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궁금해 합니다.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볼라뇨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면서도 그 어둠의 크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볼라뇨의 죽음과 함께 그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정 볼라뇨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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