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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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안의 그림자가 그녀를 파괴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다릅니다. 늦은 시간, 혼자 골목길을 걸어갈 때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사람이 두려울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자체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싱크홀이 어둠 속에서 나타날까봐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요? 늦은 시간, 누군가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오는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또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일도 없었던다는 듯이 그냥 사라집니다. 아무도 만질 사람이 없는데, 늘 놓여있던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고 텅텅 비어져 있어야 할 냉장고엔 음식물이 가득합니다. 창 문 밖으로 그림자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잠결에 침대 끝에 서있는 그림자를 본 것도 같습니다. 항상 내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지만 어느 곳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오직 나 혼자만 있을 때, 나 자신에게만 보이는 그림자입니다. 애인, 친구, 경찰... 누구 하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 이야기처럼 정말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걸까요?

 

   카린 지에벨의 심리 추리소설 『그림자』의 이야기 입니다. 광고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클로에는 차기 회장으로 거론될만큼 능력있고 매력있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그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그림자'는 그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 그녀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 '그림자'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잠을 못자고, 회사에서도 연이어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녀의 평판은 점점 더 나빠지고, 사람들도 하나 둘씩 그녀 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도, 오랜 친구도,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좋게 평가했던 회장까지도.

   다행히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강력계 형사지만, 아내의 죽음과 부하의 부상으로 정직을 당하게 된 고메즈 형사. 그는 예전에 동료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사건과 클로에의 사건으로부터 공통점을 발견하고, 실제로 '그림자'가 존재하며 그를 잡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면 클로에와 고메즈 형사가 쫓고 있는 '그림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까요?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들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클로에는 어린 시절 여동생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죄의식을 숨기려고 더 강하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림자'는 더 큰 만족감을 얻기 위해 그런 클로에를 자신의 타겟으로 설정합니다.

 

   『그림자』는 '심리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답게 인간의 죄의식, 욕망, 불안 등을 이야기 속에 풀어냈고, 이야기를 읽다보면 강박증, 트라우마, 착란, 분열증, 망상증과 같은 정식분석학 용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착란증상과 분열증을 비교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착란증상을 겪는 환자는 주변에서 빚어지는 모든 일들을 매번 일정한 체계를 통해 받아들이고 반응합니다. 현실을 왜곡해 자신이 세운 체계, 즉 착란증상에 맞춰 해석석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세운 체계에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말이죠."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착란증상을 겪는 환자가 자신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생각할 경우 운전을 하던 중 타이어 펑크가 나도 자신을 노리는 누군가가 도로에 못을 던져 사고를 유발했다고 여기게 됩니다. (……) 세탁기가 고장 나도 적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기르던 개가 심장마비로 죽어도 마찬가지로 적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착란 환자의 경우 자신이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여기게 되면 길거리에서 사진기를 든 관광객들조차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비밀요원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 하지만 착란증상의 경우 환각증상은 겪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짓말을 하지 않죠."

   "그러니까 착란증상 환자의 경우 현실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해석할 뿐 환각증상을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분열증 환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외계인을 볼 수도 있지만 착란 환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관광객을 보고도 신분을 위장힌 비밀요원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착란증상을 겪는 망상증 환자는 설득력이 꽤나 높은 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자들이 세운 이론 체계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될 정도로 대단히 논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 자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p.499~501)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된 고메즈 형사와 정신과 박사의 대화를 통해 클로에 역시 착란증상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평소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 덕분에 분량이 꽤 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히며, 왜 카린 지에벨이 프랑스 심리스릴러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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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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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불평등이다!

   보통 불평등이라고 하면 경제적인 불평등이나 사회적 불평등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불평등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며, 유형도 매우 다양합니다. 불평등은 굴욕, 굴종, 차별 대우, 조기사망, 건강 악화, 지식습득, 주류 사회생활로부터의 소외, 빈곤, 무기력, 스트레스, 불안, 근심,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결여, 기회 박탈 등의 결과를 낳습니다. 캄보디아에만 '킬링필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가 '킬링필드'인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불평등, 막연하게 느끼고 있을 때는 충격이 덜하지만 구체적인 자료나 객관적인 수치를 제시하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입니다. 1990년부터 2008년 사이에 대학 졸업장이 없는 미국 백인은 기대수명이 3년 줄었고,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여성은 5년 이상 수명이 짧아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보다 수명이 훨씬 더 짧습니다. 그래도 미국은 덜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짝 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의 어린 아이들이 피와 맞바꿔가며 채집한 산물입니다. 이 다이아몬드로 인해 가난한 나라인 시에라리온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지는데,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요즘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죽음만 일찍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만성질환이나 각종 전염병에 노출될 확률도 그만큼 많습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공동의 생활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 마이클 샌델 (p.51)

 

   저자는 인간 역량을 방해하는 세 가지 종류의 불평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번째는 생명력 불평등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아서 저마다 수명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사망률, 기대수명, 건강수명(심각한 질병 없이 살 수 있는 기간)과 출생시 몸무게와 특정 시기의 신체 성장 같은 아동 건강에 관한 여러 지표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실존적 불평등입니다.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불평등을 당했을 때 박탈감과 스트레스, 자존강 상실 등의 문제를 겪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원 불평등입니다.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입니다. 원래 강수량이 적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고르게 돌아갈 물이 부족할 수도 있고, 반대로 물이 살 돈이 없어서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면, 생명력 불평등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 세 가지 차원은 서로 뒤얽히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불평등이 변화했다고 해서, 나머지 불평등들도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이론적으로 불평등은 사회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해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해체되지 못했을까요? 불평등으로 인해 무언가를 취한 사람들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불평등에 맞선 사람들은 불평등을 겪고 있는,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가장 위쪽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중산층 세계가 평등을 위한 싸움에 나서야 합니다. 결국 중산층을 키워야 불평등이 완화되거나 해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0년전만해도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보통은 부자이거나 가난하다고 대답하죠.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뚜렷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불평등을 초래한 사회를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불평등을 겪지 않고, 공동의 생활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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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전자 전쟁 -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조적 파괴
칼레 라슨 & 애드버스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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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제학은 맛이 갔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조적 파괴

   우리가 배운 경제학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을까요? 『문화 유전자 전쟁』은 경제학, 특히 신고전파 경제학에 이런 질문을 던지며 문화 유전자 전쟁(MEME WARS)에 동참해야 한다고 합니다.

   신고전파 경제학이란, 현재 미시 경제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제학파로 인간 행동을 모델링할 때 자기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p.128)합니다. 즉, 우리 인간이 합리적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이 극대화되고, 효율성만 좋아진다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했던 애덤 스미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과 일치한다(p.153)고 말했지만, 엔론 사태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면 자기 이익만 극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경제학은 맛이 갔다. 경제학은 경제를 이해한다는 실용적 목적을 저버리고 학문 자체를 위한 지적 유희로 전락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분석적 엄밀성만 있을 뿐 현실 적합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종의 사회 수학으로 둔갑시켰다. (p.113)

 

   경제학자들은 근사한 연구실에서 빈곤을 연구하고 분석한다. 온갖 통계를 입수하고 온갖 모형을 만들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p.161)

 

   19세기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유별난 점은 최종적 성공을 거둔 시기가 20세기 말이라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놀라운 현상이다.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공학은 이제 19세기의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늘 진화했다. 경제학은 21세기 문제를 19세기 이론으로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죽음 충동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150년 된 공동묘지에서 가르침과 깨우침을 찾는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지금처럼 대학들이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p.127)

 

   이렇게 경제학 이론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대 경제학은 지금의 경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실용적 목적 대신 그저 연구실에 앉아서 공식을 만들고, 통계를 내고, 계산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경제학은 상당히 폐쇄적인 학문입니다. 심리학, 과학과 같은 학문들은 시대에 따라 늘 변화하고, '새로고침'을 합니다. 반면 경제학은 21세기에도 19세기의 이론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각있는 경제학도들은 이런 가르침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기하급수적 성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미치광이 아니면 경제학자다. (p.329)

 

   경제학은 다른 학문에 비해 상당히 낙관적입니다. 효율적인 방법을 발견하기만 하면 영원히 성장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원을 예로 들어보면, 연료를 좀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 소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 우리는 더 열심히 쓸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게다가 이 자원이 조만간 고갈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가장 큰 자원이 지구가 병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미래가 지금보다 나아질거라는 무조건적인 희망을 갖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밥 먹고 나서 숟가락을 씻는 것보다 땅속에서 석유를 뽑아내어 정유 공장에 운반하여 플라스틱으로 변환하고 적절히 성형하여 가게에 운송한 플라스틱 숟가락을 사서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놀라운 경지에 올랐다. (p. 225)

 

   장기와 연결된 동맥을 끊으면 장기가 죽는다. 사람의 삶과 연결된 자연의 흐름을 끊으면 정신이 죽는다. 간단한 이치. (p.235)

 

   지금의 경제학은 생태 혹은 지구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 또한 경제학이 분석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경제학 혹은 경제학자들과 싸우는 것을 그들은 '문화 유전자 전쟁(MEME WARS)'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다음 세대 경제학자들에게 과제를 던져 줍니다. 경제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계산하고 반영하여 모든 상품의 가격이 생태적 진실을 말하는 세계 시장을 만들어(p.227) 달라고 말이죠.

 

 

   차버려 선언 : 전 세계의 경제학과 학생 일동은 아래와 같이 고발한다

 

신고전파 경제학을 가르치는 당신네 교수들과 당신네에게서 배워 졸업한 학생들은

이 땅에서 대형 사기극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했다.

 

당신들은 공식과 법칙의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고 우기지만,

경제학은 온갖 약점과 불확실성을 가진 사회 과학이다.

진짜 모습을 감추고 거짓 행세를 한 죄로 당신들을 고발한다.

당신들이 전문 용어로 방벽을 쌓고 연구실에 숨어 있는 동안 진짜 세상에서는

숲이 사라지고 생물이 멸종하고 사람들은 삶이 황폐화되고 목숨을 잃는다.

지구의 살림을 소홀히 한 죄로 당신들을 고발한다.

 

당신들은 경제 발전을 측정하는 방법인 GDP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것이 국제적 기준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으며

온갖 언론에서 매일같이 인용하도록 방관했다.

진보의 환상을 무분별하게 부추기며 인간과 환경의 건강을 파괴한 죄로 당신들을 고발한다.

  

세상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당신들의 시대가 이제 저물어 간다.

인류 역사상 가장 희망적이고 단호한 경제학 혁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패러다임 투쟁을 벌일 것이고 진리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며,

그로부터 개방적이고 총체적이고 인간적 척도를 가진 새로운 경제학이 탄생할 것이다.

  

이 캠퍼스에서 저 캠퍼스에서 당신네 꼰대들을 권좌에서 몰아낼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아니 몇 달 안에

우리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새로운 방향으로 굴리기 시작할 것이다.

 

   kickitover.org를 방문하면 선언에 서명할 수 있다.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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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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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곱하기 92를 단숨에 계산하는 방법!

   2013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 한 권의 소설로 할배들 열풍에 가세했던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두번째 장편소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가 나왔습니다. 100세 할배가 그랬듯이, 이 까막눈이 여자 또한 상당히 엉뚱 발랄할 것이라 기대하며 책장을 펼칩니다.

   우리는 두 권의 소설을 통해 요나스 요나손 소설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에 앞서, 줄거리부터 살짝 살펴볼까요?

 

   소웨토 B 섹터의 공동변소 신임 관리소장은 한 번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었다. 이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보다 시급한 다른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놈베코가 불운하게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이유가 컸다. 그것도 1960년대, 그러니까 정치 지도자들이 놈베코 같은 아이들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정도로 여기던 시대에 태어났으니 설상가상이었다. 당시의 수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걸로 유명하다. '왜 까만 사람들이 학교에 다녀야 합니까? 기껏해야 땔감이나 물을 나르는 사람들 아닌가요?'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의 말이 틀렸다. 왜냐하면 놈베코가 나른 것은 땔감도 물도 아니요, 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 말라깽이 소녀가 나중에 커서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列國)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p.17~18)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놈베코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종차별정책이 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난한 흑인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다섯 살부터 놈베코는 자기 몸뚱이만 한 분뇨통을 메고 다녔습니다. 놈베코가 공동변소의 분뇨를 수거해 돈을 몇 푼 벌어가면 그녀의 어머니는 환각제와 알코올을 샀고, 그 때문에 놈베코는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 하나 없이 혼자가 됐습니다.

   글도 배운 적이 없는 까막눈이였지만, 놈베코는 셈을 할 줄 알았습니다. 단순히 셈을 할 줄 아는게 아니라 놈베코의 암산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95x92도 이내 계산해 낼 줄 알았습니다.

  

   "95 곱하기 92는……." 그는 혼자서 웅얼거렸다. "가만있자, 계산기가 어디 있더라?"

   "8,740." 놈베코가 옆에서 알려 주었다.

   "꼬마야, 그냥 계산기나 찾아다 줘!"

   "8,740이에요!" 놈베코가 되풀이했다.

   "지금 뭔 말을 하는 거냐?'

   "95 곱하기 92는 874-"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에, 그러니까, 95는 100 빼기 5이고, 92는 100 빼기 8이에요. 100에서 5와 8을 빼면 87이에요. 그리고 5 곱하기 8은 40이고요. 따라서 87에다가 40을 붙이면 8,740이 나와요." (p.20)

 

   당시 13살이었던 놈베코는 공동변소 분뇨 수거인용 샤워실에서 한 늙은 호색한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게 되는데, 놈베코는 그의 허벅지에 가위를 박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자신의 가위를 찾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간 그녀는 노인의 집에 가득한 책을 보고는 글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없었던 노인은 책에 관심을 보이는 놈베코가 반가워 글을 가르쳐주게 되고, 수 십개의 다이아몬드와 책을 남기고 죽습니다.

 

   이렇게 글을 배우고, 다이아몬드를 가지게 된 놈베코는 빈민촌을 떠나 도서관이 있는 도시로 향하다가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 사고로 피해를 입은 건 놈베코였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의 목숨이란 차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자신과 부딪혀 차가 파손되자 놈베코는 그 피해 보상으로 7년동안 운전자에게 무급으로 일을 해주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데, 그 운전자는 핵폭탄 엔지니어였습니다.

   놈베코는 연구소에 7년동안 갇혀 있으면서 무급으로 일해야 했지만, 자신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배운 것 없는 흑인 소녀가 밖에서 할 수 있는 얼마되지 않을 뿐더러 바깥 세상에서 수 십개의 다이아몬드를 지키기란 더더욱 쉽지 않을테니까요. 게다가 연구소 안에는 책이 많았습니다. 놈베코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모든 내용을 소화했습니다. 심지어 엔지니어보다 이해력이 더 좋아서 엔지니어가 곤란해 할 때마다 대신 계산을 해주거나 분석해 줬습니다. 즉, 놈베코는 분뇨통을 나르거나 무급으로 청소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넘치는 천재였던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엔지니어의 계산 착오로 6개만 만들어야 하는 핵폭탄을 7개나 만들었고, 연구소를 탈출해 스웨덴으로 건너간 놈베코에게 7번째 핵폭탄이 배달됩니다. 놈베코는 이 핵폭탄을 지키기 위해, 혹은 스웨덴의 국왕이나 수상에게 핵폭탄 보유 사실을 알리기 위해 20년이 넘도록 노력합니다.

 

    현대사 주요 장면에 등장했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또한 곳곳에서 실존 유명인사들이 등장하며,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믹스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스 요나손이 쓴 두 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야기가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을 믹스시키려고 하다보니 개연성은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문제점인듯 합니다.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해 온 작가였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요나스 요나손은 글을 쓰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초보 작가니까요. 다음 소설에서 이 부분이 개선된다면, 요나스 요나손만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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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
에두아르도 라고 외 지음, 신미경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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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뇨. 우리는 외친다. 볼라뇨라고! 

   로베르토 볼라뇨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나 2003년 스페인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방대한 양의 문학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어마한 분량의 『2666』은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매달린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으로 스페인과 칠레, 미국 문학상을 모두 흽쓸어 버립니다.

   이런 그였기에 그를 추종하고, 그에게 감염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볼라뇨 전염병 : 감염자들의 기록』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 펴낸 책입니다. 이 책에는 20명이나 되는 국내ㆍ외 추종자들의 기록들이 실려 있습니다. 국내 추종자들 가운데는 방대한 독서로 유명한 작가 장정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고 볼라뇨가 소설 속에 그려 넣은 그림을 흉내내어 그린 그림까지 선보이고 있습니다.

   앞서 로베르토 볼라뇨가 스페인, 칠레, 미국에서 문학상을 휩쓸었다고 언급했었는데 장정일은 볼라뇨 문학의 국적까지 걱정합니다. 볼라뇨 문학을 읽다보면 서로 문학의 국적을 탐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칠레에서 태어난 작가가 스페인에 살면서, 청년기의 고향이었던 멕시코에 관해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이 빚어낸 풍요로움 가운데 일부는 이처럼 복잡한 다국적성으로부터 왔다. 그런 까닭에 작품의 귀속처가 애매해진 것은, 문학 사가들이 겪을 곤경이다. 칠레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멕시코에서 보내고, 스페인으로 건너가 살았던 볼라뇨가 스페인어로 쓴 이 작품은 어느 나라 작품일까?

 

   또, 번역가 이경민은 '로베르토 볼라뇨 삼각형'이라는 것을 언급하며 그의 문학의 특징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도 합니다.

 

   볼라뇨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메타텍스트적 유희>로 규정한 바 있다. 문학을 일종의 <인용 체계>로 간주한 보르헤스처럼 그 또한 (자기) 인용과 변용을 창작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문학은 (단편) 소설과 시 문학 장르를 불문하고 상호 의존적으로 교차하는 분절적 연속체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제3제국』의 주제인 나치즘은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거쳐 『먼 별』, 『칠레의 밤』, 『2666』 등의 작품으로 투사되며,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라미레스 호프만은 『먼 별』에서 카를로스 비더로 재등장했다가 R.P. 잉글리시로 바뀌는데, 이 인물은 『전화』의 단편 「조안나 실베스트리」의 증언에서 다시 나타난다. 또한 『먼 별』에서 비더의 글을 비형한 이바카체나 비비아노라는 인물은 『칠레의 밤』에서 재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제3제국』의 배경인 코스타 브라바는 『아이스링크』의 배경이 되며 이 작품이 지닌 다성적 목소리는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에서 극대화된다. 더불어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등장한 아욱실리오의 이야기는 『부적』으로 확장되고 죽음과 폐허의 공간인 소노라는 『2666』의 산타 마리아와 아날로지적 상응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듯 볼라뇨의 작품은 인물, 배경, 사건, 주제, 형식 등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 맞물리며 움직인다. 그로 인해 볼라뇨의 작품은 문학적 유희가 되며 그 안에서 독자는 텍스트 추적자로 변모한다. 더불어 볼라뇨를 읽는 독자라면 볼라뇨의 작품 안에 흩어진 연쇄의 고리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드릐 작품의 흔적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p.311~312)

 

   '로베르토 볼라뇨 삼각형'을 설명한 이 글을 보는 순간, 쉽게 덤빌 수 없는 작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그의 문학의 매력에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요?

 

   작가로 태어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해 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게다가 이 책은 가격까지 '2,666원'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가볍게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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