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불안의 그림자가 그녀를 파괴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다릅니다. 늦은 시간, 혼자 골목길을 걸어갈 때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사람이 두려울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자체가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요즘 빈번하게 발생하는 싱크홀이 어둠 속에서 나타날까봐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요? 늦은 시간, 누군가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오는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또 갑자기 나타났다가 아무일도 없었던다는 듯이 그냥 사라집니다. 아무도 만질 사람이 없는데, 늘 놓여있던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고 텅텅 비어져 있어야 할 냉장고엔 음식물이 가득합니다. 창 문 밖으로 그림자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잠결에 침대 끝에 서있는 그림자를 본 것도 같습니다. 항상 내 주변을 그림자처럼 맴돌지만 어느 곳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오직 나 혼자만 있을 때, 나 자신에게만 보이는 그림자입니다. 애인, 친구, 경찰... 누구 하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 이야기처럼 정말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걸까요?

 

   카린 지에벨의 심리 추리소설 『그림자』의 이야기 입니다. 광고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클로에는 차기 회장으로 거론될만큼 능력있고 매력있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그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그림자'는 그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 그녀에게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 '그림자'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잠을 못자고, 회사에서도 연이어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녀의 평판은 점점 더 나빠지고, 사람들도 하나 둘씩 그녀 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남자도, 오랜 친구도,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좋게 평가했던 회장까지도.

   다행히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강력계 형사지만, 아내의 죽음과 부하의 부상으로 정직을 당하게 된 고메즈 형사. 그는 예전에 동료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사건과 클로에의 사건으로부터 공통점을 발견하고, 실제로 '그림자'가 존재하며 그를 잡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면 클로에와 고메즈 형사가 쫓고 있는 '그림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까요?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들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클로에는 어린 시절 여동생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죄의식을 숨기려고 더 강하고 완벽하게 보이려고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림자'는 더 큰 만족감을 얻기 위해 그런 클로에를 자신의 타겟으로 설정합니다.

 

   『그림자』는 '심리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답게 인간의 죄의식, 욕망, 불안 등을 이야기 속에 풀어냈고, 이야기를 읽다보면 강박증, 트라우마, 착란, 분열증, 망상증과 같은 정식분석학 용어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착란증상과 분열증을 비교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착란증상을 겪는 환자는 주변에서 빚어지는 모든 일들을 매번 일정한 체계를 통해 받아들이고 반응합니다. 현실을 왜곡해 자신이 세운 체계, 즉 착란증상에 맞춰 해석석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세운 체계에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말이죠."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착란증상을 겪는 환자가 자신이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있다고 생각할 경우 운전을 하던 중 타이어 펑크가 나도 자신을 노리는 누군가가 도로에 못을 던져 사고를 유발했다고 여기게 됩니다. (……) 세탁기가 고장 나도 적이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기르던 개가 심장마비로 죽어도 마찬가지로 적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죠. 착란 환자의 경우 자신이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여기게 되면 길거리에서 사진기를 든 관광객들조차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비밀요원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 하지만 착란증상의 경우 환각증상은 겪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짓말을 하지 않죠."

   "그러니까 착란증상 환자의 경우 현실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해석할 뿐 환각증상을 경험하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분열증 환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외계인을 볼 수도 있지만 착란 환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관광객을 보고도 신분을 위장힌 비밀요원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로군요."

   "착란증상을 겪는 망상증 환자는 설득력이 꽤나 높은 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자들이 세운 이론 체계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될 정도로 대단히 논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 자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p.499~501)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된 고메즈 형사와 정신과 박사의 대화를 통해 클로에 역시 착란증상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평소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 덕분에 분량이 꽤 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히며, 왜 카린 지에벨이 프랑스 심리스릴러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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