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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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을 짖고 있는거야? 도대체 저 멍한 눈빛으로 뭘 보고 있는거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예쁘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녀석들, 조금은 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금새 친숙해져 버려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녀석들.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더 땡겼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에서는, 2%이든 98%이든 어딘가가 부족해 보이는 가족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등장하는 '나(미쓰코)'와 아빠는 사랑하는 엄마를 병으로 잃게 되었다. 평소 열심히 엄마를 간호하던 아빠는 엄마가 떠나는 날만 곁에 있지 않았다. 혼자서 무서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미쓰코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쓰코의 동네에는 오래되고 낡은 '아르헨티나 빌딩'이 있었다. 그 빌딩은 마치 유령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다는 소문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마치 마귀 할멈과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를 잡아 먹고 산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엄마가 죽고 6개월이 지났을 즈음 석재상을 정리한 아빠가 딸인 미쓰코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엄마가 떠나던 날도 보이질 않더니, 이제는 아르헨티나 빌딩까지 가서 사는걸까.

무성한 소문을 뒤로하고 미쓰코는 사실 확인을 위해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아빠는 아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고 있었고,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미쓰코 또한 그곳이 싫지 않았다. 미쓰코는 아빠가 왜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겉모습은 볼품없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함께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만들어 살게 된다.  

 

퇴근하는 길, 밀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워낙 짧은 거리여서 책을 읽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는데, 이 책은 워낙 얇은데다가 그림까지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읽기 시작해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다 읽고 말았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항상 어렵다. 얇고 짧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면 무엇인지도 모를 여운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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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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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왜 이렇게 뚱한 표정을 짖고 있는거야? 도대체 저 멍한 눈빛으로 뭘 보고 있는거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예쁘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녀석들, 조금은 날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금새 친숙해져 버려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녀석들.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이 더 땡겼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에서는, 2%이든 98%이든 어딘가가 부족해 보이는 가족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등장하는 '나(미쓰코)'와 아빠는 사랑하는 엄마를 병으로 잃게 되었다. 평소 열심히 엄마를 간호하던 아빠는 엄마가 떠나는 날만 곁에 있지 않았다. 혼자서 무서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던 미쓰코는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쓰코의 동네에는 오래되고 낡은 '아르헨티나 빌딩'이 있었다. 그 빌딩은 마치 유령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다는 소문 때문에 '아르헨티나 할머니',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마치 마귀 할멈과 같은 모습으로 가끔씩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고양이를 잡아 먹고 산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엄마가 죽고 6개월이 지났을 즈음 석재상을 정리한 아빠가 딸인 미쓰코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도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엄마가 떠나던 날도 보이질 않더니, 이제는 아르헨티나 빌딩까지 가서 사는걸까.

무성한 소문을 뒤로하고 미쓰코는 사실 확인을 위해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아빠는 아빠만의 세계를 만들며 살고 있었고,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미쓰코 또한 그곳이 싫지 않았다. 미쓰코는 아빠가 왜 아르헨티나 빌딩으로 들어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겉모습은 볼품없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아르헨티나 할머니와 함께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만들어 살게 된다.  

 

퇴근하는 길, 밀리는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워낙 짧은 거리여서 책을 읽고 앉아있을 틈이 없었는데, 이 책은 워낙 얇은데다가 그림까지 있어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읽기 시작해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다 읽고 말았다.

그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항상 어렵다. 얇고 짧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면 무엇인지도 모를 여운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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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말의 힘 - 어떤 사람도 마음을 열게 하는
할 어반 지음, 박정길 옮김 / 엘도라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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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긍정적인 말의 힘

 

굳이 이 책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의 힘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몽테스키외는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적으면 함부로 지껄인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는 그 사람의 사고의 폭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맹자는 '말이 쉬운 것은 결국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멀리 가지 않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우리의 속담만 보더라도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

 

내가 맨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였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나는 마주치는 직장 동료들마다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얼굴을 잘 모르니까 내가 아침에 인사를 한번 건넨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던 사람들도 자꾸 거듭되다 보니 서로가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살다보면 항상 좋을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도 때로는 몸이 아파서, 또 때로는 마음이 아파서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때도 있다. 그러나 저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야, 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수가 없어서 내 자신을 속이며 또다시 웃으며 인사를 건네게 된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내뱉는 말이라서, 그래서 내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말인데 사실은 내가 내뱉은 그 말에 내가 지배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말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 할 어반은 고등학교 교사로서,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말의 힘을 전파하고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 대신 힘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말을 하고, 아침에는 사건사고로 가득한 신문을 보는 대신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를 하며, 고래도 춤추게 만드는 칭찬을 하라고 한다.

 

'긍정적인 말의 힘'보다는 '진심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심'의 힘이다.

아무리 칭찬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해도 '진심'이 빠진 말은 입에 발린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어린 학생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긍정적인 말을 받아들 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세상의 때가 묻은 사람에게 '진심'이 빠진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말 속에 뼈가 있다고 했다. 긍정적인 말의 힘도 좋지만, 그것보다 나는 '진심'의 힘을 믿는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진심이 있고, 그 진심이 통하다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더불어 더 큰 힘을 발휘하려면 말의 힘을 빌려 '진심'을 표현하면 될 것이다.

 

'말의 힘'과 함께 '글의 힘'도 알아야 한다

 

간혹 말과 글 중에 어느 것을 더 조심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박을 벌이는 경우를 접하곤 한다. 한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을 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글은 한번 씌여지면 오랫동안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말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긍정적인 말의 힘을 강조하는 책에서 많은 오탈자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은 1쇄도 아니고 무려 32번째로 찍어낸 책이었는데도 말이다. 물론 작가 할 어반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런 것들은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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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1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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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세계사랑 그다지 친하지 않다. 특히 세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로마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세계사를 배우지 않아서 그래, 라는 말로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관심이 있으면 혼자서라도 찾아봤어야지, 하는 또다른 질책이 나에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 기회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라도 읽으면서 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파르타쿠스가 누구야?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달려 있어서 찾아보았다. 알고 보니 이 사람 유명한 사람이더군. 또 한번 좌절. 1960년에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라는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단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여야 하며, 그런 자신의 잔인한 모습은 단지 누군가의 구경거리 밖에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검투사를 만나게 된다. 자신들은 로마제국의 시민이며 천년만년 흥하며 살게 될 문명인이라 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미개인이라 불렀던 사람들보다 더 잔인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로마인들의 양면적인 심성이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았던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노예 출식으로 로마의 검투장에서 검투를 하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스파르타쿠스는 다른 노예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자유를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항상 양면적인 모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기 전에 가졌던 마음가짐을 그대로 간직하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무언가를 얻고나서 급격히 타락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자유를 성취하기 전에 지녔던 동지애는 잊어버리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분열의 길을 걷게 되며, 그 길이 곧 실패의 길, 죽음의 길이었다. 기억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한 스파르타쿠스 또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

나는 자유를 성취한 후에 점점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돼지들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싫어 혁명을 일으킨 돼지들도 점점 인간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말처럼 그는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그가 기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로마사랑 친하지 않다는 핸디캡도 있고, 덕분에 이야기의 내용이 머릿 속에 쏙쏙 들어오지가 않았다. 정말 『로마인 이야기』든 뭐든지 간에 공부를 한 다음에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에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그때는 내가 먼저 아는척 해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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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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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이 책상 가득 쌓여있지만, 도무지 제자리를 찾아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읽지 않은 책은 절대 책장에 꽂아두지 않는 나지만, 책상 위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며 기우뚱거리는 책들을 마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임시로나마 자리를 찾아준다. 읽은 책보다는 읽지 않은 책들이 점점 위용을 떨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생각해 본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책을 구입하는 속도보다는 책을 읽는 속도가 몇배는 빨랐다. 그러던 것이 점차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평행선을 그리다가 급기야 오늘에 와서는 책을 읽으면서도 쌓여만 가는 책의 높이를 보며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다.
난독증(難讀症). 시선은 텍스트에 고정되어 있지만, 좀처럼 가슴에 스며들지가 않는다. 요즘 나는 그렇게 어렵게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손에서 책을 떼어놓아도 될 것 같은데, 손에서 책이 떨어지면 영 불안해서 살 수는 없고 그러니 죽으나 사나 책만 붙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가족, 사랑, 죽음, 눈물이 공존하는 우리 문학에 식상해 있던 참이었다.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작품에 한창 불신을 가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작가인지라 '기대'라는 마음의 준비는 미처하지 못했다. 얼핏 넘겨본 책장에서 '난독(難讀)'이라는 단어가 보여 지금의 나랑 똑같네,라는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기계적으로 읽는 탓인지 여간해서는 책을 읽고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오래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서 펑펑 운적이 있었다. 철부지 모모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어른들의 세계가 가슴 아팠고, 어른조차 견디기 힘든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모모가 너무나도 안스러웠다. 처음에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듯 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쏟아내고 만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정원』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번 그때 느꼇던 감정들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동구네는 인왕산 허리 아래 산동네에 산다. 동구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무역회사에 다니신다. 동구의 엄마는 마을에서 살림 솜씨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동구를 낳고 6년 동안 동생을 낳지 못했다. 3대 독자들 키워낸 동구의 할머니는 항상 육두문자를 달고 다니신다. 자신의 아들 밖에 모르는 할머니는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동구 엄마에게 쏟아냈으며, 4대 독자인 동구를 예뻐하면 동구를 낳은 며느리의 기가 드세질까봐 동구에게도 험한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런 동구에게 드디어 예쁜 여동생이 생겼다. 동구처럼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 '영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동생은 동구가 10살이 될 때까지도 다 익히지 못한 한글을 3살 때부터 술술 읽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동생이 동구는 미울법도 한데, 얼마나 예뻐하는지 영주를 업고 다니느라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비록 자신은 천덕꾸러기에 바보 소리를 듣지만 천재 동생을 동네방네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3학년이 되도록 한글도 제대로 못쓰는 동구를 동구의 담임선생님은 다만 동구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동구는 지진아가 아닌 남들과 조금 다른 난독증이라는 것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아버지와 할머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손찌검까지 당하던 동구는 자신을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하시는 선생님이 너무 좋다. 동구는 방과 후 선생님과 함께 하는 한글 공부도 즐겁고, 코 끝으로 다가오는 선생님의 향기 또한 좋다. 덕분에 동구는 가족 앞에서 멋지게 선생님의 편지를 읽어내는데 성공하며, 이날은 동구네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동구의 행복은 잠시였다. 동네 입구에 탱크가 들어선 후 그 예쁜 선생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선생님이 사라져버렸다. 천재 소리를 듣던 영주는 할머니의 감나무에 열린 감을 만져보려고 동구의 무등을 타다가 넘어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할머니의 육두문자가 동구 엄마의 가슴을 후려쳐도, 아무리 동구 아버지의 무심한 발길질이 동구 엄마를 휘갈겨도 묵묵히 참아내던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동구는 다시 난독의 시대를 맞이한다.

동구네 마을에는 유일하게 3층 집이 한채 있다. 동구는 그 3층집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꾸미지 않은 그 3층집의 정원을 좋아한다. 보통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지만, 일년에 한두번씩 대문 문이 열려있을 때 동구는 살짝 대문 안으로 들어간가 정원을 보곤 했다. 동구는 그런 정원이 갖고 싶었다.

내 마음의 동요를 불러 일으킨 것은 작가의 섬세함이었다.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전적인 소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3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듯 했다. 작가는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마치 어린 아이를 옆에 두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처럼 어떻게 10살짜리 동구의 시각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몸파는 창녀 일을 '엉덩이 빌려 주는 일'이라고 말했던 에밀 아자르의 모모가 그대로 떠올랐다.

동구가 난독을 경험했던 1979년에서 1981년은 동구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난독의 시대였다. 무엇하나 제대로 쓰여진 것이 없고, 쓰여진 것을 제대로 읽어보려고 하면 억압하는 시대.
어린 아이의 눈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어른들처럼 지식을 앞세워, 자신의 입장에맞게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표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그런 어린 동구의 눈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인 난독의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한 이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 준 이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신했던 한국 문학을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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