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책들이 책상 가득 쌓여있지만, 도무지 제자리를 찾아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읽지 않은 책은 절대 책장에 꽂아두지 않는 나지만, 책상 위에서 서로 몸을 부대끼며 기우뚱거리는 책들을 마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임시로나마 자리를 찾아준다. 읽은 책보다는 읽지 않은 책들이 점점 위용을 떨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생각해 본다.
불과 1년전까지만 해도 책을 구입하는 속도보다는 책을 읽는 속도가 몇배는 빨랐다. 그러던 것이 점차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평행선을 그리다가 급기야 오늘에 와서는 책을 읽으면서도 쌓여만 가는 책의 높이를 보며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다.
난독증(難讀症). 시선은 텍스트에 고정되어 있지만, 좀처럼 가슴에 스며들지가 않는다. 요즘 나는 그렇게 어렵게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손에서 책을 떼어놓아도 될 것 같은데, 손에서 책이 떨어지면 영 불안해서 살 수는 없고 그러니 죽으나 사나 책만 붙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가족, 사랑, 죽음, 눈물이 공존하는 우리 문학에 식상해 있던 참이었다.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작품에 한창 불신을 가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작가인지라 '기대'라는 마음의 준비는 미처하지 못했다. 얼핏 넘겨본 책장에서 '난독(難讀)'이라는 단어가 보여 지금의 나랑 똑같네,라는 생각을 하며 읽기 시작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기계적으로 읽는 탓인지 여간해서는 책을 읽고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나이지만, 오래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으면서 펑펑 운적이 있었다. 철부지 모모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어른들의 세계가 가슴 아팠고, 어른조차 견디기 힘든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모모가 너무나도 안스러웠다. 처음에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듯 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쏟아내고 만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정원』을 읽으면서 나는 또 한번 그때 느꼇던 감정들을 경험하고야 말았다.

동구네는 인왕산 허리 아래 산동네에 산다. 동구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무역회사에 다니신다. 동구의 엄마는 마을에서 살림 솜씨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동구를 낳고 6년 동안 동생을 낳지 못했다. 3대 독자들 키워낸 동구의 할머니는 항상 육두문자를 달고 다니신다. 자신의 아들 밖에 모르는 할머니는 입만 열면 육두문자를 동구 엄마에게 쏟아냈으며, 4대 독자인 동구를 예뻐하면 동구를 낳은 며느리의 기가 드세질까봐 동구에게도 험한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런 동구에게 드디어 예쁜 여동생이 생겼다. 동구처럼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 '영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동생은 동구가 10살이 될 때까지도 다 익히지 못한 한글을 3살 때부터 술술 읽어내기 시작한다. 이런 동생이 동구는 미울법도 한데, 얼마나 예뻐하는지 영주를 업고 다니느라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비록 자신은 천덕꾸러기에 바보 소리를 듣지만 천재 동생을 동네방네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3학년이 되도록 한글도 제대로 못쓰는 동구를 동구의 담임선생님은 다만 동구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린 동구는 지진아가 아닌 남들과 조금 다른 난독증이라는 것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아버지와 할머니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손찌검까지 당하던 동구는 자신을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하시는 선생님이 너무 좋다. 동구는 방과 후 선생님과 함께 하는 한글 공부도 즐겁고, 코 끝으로 다가오는 선생님의 향기 또한 좋다. 덕분에 동구는 가족 앞에서 멋지게 선생님의 편지를 읽어내는데 성공하며, 이날은 동구네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동구의 행복은 잠시였다. 동네 입구에 탱크가 들어선 후 그 예쁜 선생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선생님이 사라져버렸다. 천재 소리를 듣던 영주는 할머니의 감나무에 열린 감을 만져보려고 동구의 무등을 타다가 넘어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할머니의 육두문자가 동구 엄마의 가슴을 후려쳐도, 아무리 동구 아버지의 무심한 발길질이 동구 엄마를 휘갈겨도 묵묵히 참아내던 엄마가 집을 나가버렸다. 동구는 다시 난독의 시대를 맞이한다.

동구네 마을에는 유일하게 3층 집이 한채 있다. 동구는 그 3층집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꾸미지 않은 그 3층집의 정원을 좋아한다. 보통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지만, 일년에 한두번씩 대문 문이 열려있을 때 동구는 살짝 대문 안으로 들어간가 정원을 보곤 했다. 동구는 그런 정원이 갖고 싶었다.

내 마음의 동요를 불러 일으킨 것은 작가의 섬세함이었다.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전적인 소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연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3층집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듯 했다. 작가는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마치 어린 아이를 옆에 두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처럼 어떻게 10살짜리 동구의 시각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몸파는 창녀 일을 '엉덩이 빌려 주는 일'이라고 말했던 에밀 아자르의 모모가 그대로 떠올랐다.

동구가 난독을 경험했던 1979년에서 1981년은 동구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난독의 시대였다. 무엇하나 제대로 쓰여진 것이 없고, 쓰여진 것을 제대로 읽어보려고 하면 억압하는 시대.
어린 아이의 눈은 정확하고 객관적이다. 어른들처럼 지식을 앞세워, 자신의 입장에맞게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표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그런 어린 동구의 눈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인 난독의 시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한 이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 준 이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불신했던 한국 문학을 다시 손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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