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치밀함에 욕이 나올 뻔한 이야기! 예감은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진 않았지만 ─ 그러지 않으려고 정말 정성들여 읽었습니다  ─  그 순간 욕이 튀어 나올 뻔 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전혀요. 예감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속된 말로 우리는 제목에 낚인 겁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국 문학의 제왕이라 불리는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2011년 맨부커 상을 수상합니다. 원문으로는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소설의 분량을 두고 당시 약간의 말이 오갔지만, 반스는 이렇게 반격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독자들이 나에게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고 말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이 삼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p.261)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1960년대에 함께 고등학교를 다닌 네 친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 그의 패거리인 앨릭스와 콜린, 그리고 총기 넘치는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당시 그들이 다녔던 학교에는 자살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친구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유서도, 일기도, 그 어떤 기록도 없었기 때문에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대학생이 된 그들은 각각 대학교로 진학했는데, 당연히 총기 넘쳤던 에이드리언 핀은 명문대에 입학합니다. 친구들은 서로 에이드리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즈음 토니는 베로니카를 만나 사귀게 되고, 여자친구의 집까지 방문하게 됩니다. 베로니카가 아버지, 오빠와 함께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고 토니 혼자 남게 되자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토니에게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p.54)라고 합니다. 보통의 어머니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러고나서 베로니카는 토니의 친구들도 만나게 되지만, 둘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얼마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베로니카와 데이트를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토니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왜 하필 그의 친구여야만 하는 걸까요? 몇 주 후 그는 에이드리언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와 베로니카가 공동으로 느낄 윤리적 가책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또 나는 베로니카가 오래전에 받은 괴로운 상처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다. 그런 다음 그에게 행운을 빌었고, 그의 편지를 텅 빈 벽난로 속 쇠살대에 넣고 태운 후(신파조라고?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청춘이었음을 참작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그 두 사람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내치기로 결심했다. (p.78)


   그 이후로 에이드리언과의 연락을 끊었던 토니는 한참 후에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에이드리언은 그 옛날 친구와는 달리, 자신이 왜 죽으려고 하는지 편지를 남겼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했는지는 더이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공표해줄 것을 부탁했고, 검시관은 그의 말대로 했다. (p.88)


   그 사건으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나고, 토니는 이제 60대 노인이 됐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토니는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를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그에게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500파운드는 당장 지급될 수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그녀의 딸인 베로니카가 거부하고 있어서 당장은 집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그에게 500파운드를 남겼고, 또 어떻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토니는 의문을 풀기 위해 베로니카를 만나지만, 베로니카는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은채 그 옛날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 한 장만을 보여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앞서 토니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토니는 정말 격정적으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 속에는 베로니카를 향한 온갖 저주와 경멸이 담겨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옛날 친구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듯이 에이드리언에게도 베로니카를 임신시켜 보라고 했습니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 ─ 올더스 헉슬리 (p.263)


   이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는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토니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열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맨 첫 페이지에 등장했던 문장처럼,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p.11)이니까요.

   토니가 편지를 받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자 베로니카는 또다른 힌트를 던져 줍니다. 하지만 토니는 그것이 힌트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토니의 기억과 시선을 따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독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에 대한 힌트일까요?

   모든 비밀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밝혀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감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닙니다. 예감은 한번도 맞았던 적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독자는 줄리언 반스의 치밀함에 무릎을 치며 욕을 하게 됩니다. 줄리언 반스는 이 장면의 반전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토독 치밀하게 이야기를 짜놓았던 것입니다. 그 말 많던 부커상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의 이견도 없이 이 소설을 만장일치로 선정해 버린 이유를 알겠습니다.

   작가가 이토록 치밀하게 이야기를 짜놓은 것처럼 독자 또한 치밀하게 읽지 않으면, 작가의 말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에게 '책'이란?

   책은 많은 사람들을 꿈꾸게 하고, 그 꿈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 평생 책과 함께 꿈꾸며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 여러 곳의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하면서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을 쓰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마존과 뉴욕타임스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써냈으니 그녀의 꿈은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녀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쓰면서 건강이 나빠졌고, 조카에게 책을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녀는 책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이 책은 그녀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이 75살에 비로소 꿈을 이루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떠났을까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속에는 메리 앤 섀퍼처럼 책을 통해 희망을 키우고, 꿈을 키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던 채널 제도의 건지 섬 사람들은 5년 동안 독일군의 지배를 받으며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외부 소식 차단령'이라는 이름 하에 라디오는 물론이고 모든 통신이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건지 섬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군들은 건지 섬 사람들의 식량까지 통제하고, 약탈합니다. 그 와중에 돼지 한 마리를 숨기는데 성공한 모저리 부인이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돼지구이 파티를 벌입니다. 이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몇몇 사람들이 독일군의 통금시간에 걸리게 되는데, 이때 엘리자베스가 재치를 발휘해 문학회를 하다가 시간이 늦은 줄도 몰랐다고 둘러댑니다. 이 거짓말이 거짓말로 들통날까봐 건지 섬 사람들은 진짜 문학회를 열게 되고, 이렇게 해서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문학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파티가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문학회 첫 모임인 셈이었으니까요. 당시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입니다. 음식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진미였지만 사람들은 더더욱 훌륭했습니다. 신나게 먹고 이야기하느라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그러다 아멜리아(모저리 부인의 이름입니다)가 9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야간 통금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난 겁니다. 뭐, 배불리 먹고 배짱이 두둑해진 탓일까요,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밤새 아멜리아의 집에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가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통금을 어기는 건 범죄 행위였어요. 실제로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 얘기도 들었으니까요. 하물며 돼지를 숨기는 건 더 큰 범죄였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들판을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존 부커 때문에 그만 일이 틀어졌습니다. 파티에서 음식보다 술을 더 마시더니만 우리가 도로에 닿자마자 정신을 놓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겁니다! 제가 즉시 그를 붙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독일군 순찰 대원 여섯 명이 숲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기관총을 겨누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통금 시간에 왜 나돌아다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어디로 가는 중이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가면 그들이 저를 쐈을 겁니다. 그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입이 분필처럼 바싹 마르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저 부커를 붙잡은 채 헛된 희망에 기댈 수밖에요.

   바로 그때 엘리자베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앞으로 나섰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작아요. 그래서 총구가 그녀의 눈앞에 늘어서 있었는데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총을 전혀 보지 못한 듯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순찰대 대장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 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하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p.50~51)

 

   전쟁 중에 '이지 비커스태프, 전장에 가다'라는 글을 쓰며 유명세를 떨친 줄리엣은 건지 섬에 살고 있는 도시의 편지를 통해 우연히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글의 소재를 찾던 줄리엣은 건지 섬 사람들과 북클럽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하고, 건지 섬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합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런던에 살고 있는 줄리엣과 건지 섬 사람들이 주고 받은 편지로 쓰여진 서간문 형식의 소설입니다. 비록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 거짓말 때문에 탄생한 북클럽이었지만, 사람들은 이 북클럽을 통해 책을 읽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사람들을 통해 5년의 시간을 버텨냅니다.

 

   이 소설에는 찰스 램이라는 작가가 등장합니다. 맨처음 도시가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도 바로 찰스 램이라는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편지를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애슈턴 양,

   제 이름은 도시 애덤스입니다. 건지 섬 세인트마틴스 교구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지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예전에 당신이 갖고 있던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이 지금 저한테 있습니다. 앞표지 안쪽에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더군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 찰스 램의 열렬한 팬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제목이 '선집'인 걸로 짐작건대 작가의 다른 글들도 나와 있다는 얘기 같아서요. 다른 작품이 있다면 당연히 읽고 싶은데, 독일군은 건지 섬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서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하려 합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있다면 서점에 한 권 구해달라고 얘기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유쾌하고 기지 넘치는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이 인생에서 엄청난 슬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도시 애덤스 (p.18~19)

 

   도시가 편지에서도 언급했듯이, 찰스 램은 실제로 인생에서 엄청나게 슬픈 일을 겪었습니다. 그녀의 누이가 부모님을 칼로 찔러 죽였지만, 찰스 램은 평생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며 그녀를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엘리아 수필 선집』을 써냈습니다. 줄리엣은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p.22)을 찾는 걸 좋아한다고 합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찰스 램이라는 작가를 언급하며 그런 재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도시가 그토록 사랑한 작가 찰스 램의 글이 문득 궁금해 집니다. 정말 그의 글에서 슬픔이 느껴지는지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365일 동안 매일 한 권씩 읽고 쓴 책들의 기록!

   일 년 동안 일주일에 책 한 권씩 읽고 서평을 쓰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매일 포스팅하기에 도전한 적도 있었습니다. 일 년 동안 읽는 책들이 100권이 넘으니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건 쉽게 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주말에 읽고 쓸거라며 미뤄뒀다가 주말에 일이 생겨서 겨우 시간을 맞춘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매일 포스팅하기였는데, 매일 무언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말은 살아 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 (p.35)

 

   그런데 니나 상코비치는 일 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매일 한 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어려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덕분 입니다.

   니나 상코비치는 3년 전 언니를 암으로 잃은 후 바쁘게 살았습니다. 가족들이 언니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3년 동안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보냈습니다. 그녀 자신과 가족의 삶을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 삶을 빽빽하게 채워도, 아무리 빨리 달리고 돌아다녀도, 슬픔과 고통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마침 그 때 400쪽이 넘는 묵직한 『드라큘라』를 하루만에 읽어내고는 모든 일을 멈추고 '독서의 한 해'를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의 결심에 남편은 매주 한 권을 추천했지만, 이미 묵직한 『드라큘라』를 하루만에 읽어낸 그녀는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나는 독서를 하나의 규율로 정해두려고 한다. 독서에는 즐거움도 있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어떤 일정에 맞출 필요가 있다. 그렇게 몰두하지 않으면 삶의 다른 부분들이 슬금슬금 침범해 들어와 시간을 훔쳐 가버릴 수 있다. 읽고 싶은 만큼 읽지 못할 수도 있고,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읽지 못할 수도 있다. 책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으면 도피는 불가능하다. 청소해야 할 먼지라든가 개켜야 할 옷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우유도 사야 하고 저녁 식사도 마련해야 하며 설거지도 해야 한다. 하지만 1년 동안은 그런 일이 절대로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나는 1년 동안 달리지도 않고 계획도 세우지 않고 가족도 돌보지 않으려고 한다. 1년 동안 '…… 하지 않기'를 하려 한다. 걱정하지 않기, 규제하지 않기, 돈을 벌지 않기. 물론 우리 가족은 다른 수입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워낙 오랫동안 한 사람의 수입으로만 살아왔으니 한 해 더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이다. 가외의 지출은 뒤로 미루고 지금 가진 것으로 지낼 것이다.

   내 계획에 따르면 매일 책 한 권씩 읽는다는 프로젝트는 마흔여섯 살 생일에 시작된다. 그날 첫째 권을 읽고 다음 날 첫 서평을 쓴다. 한 해 동안의 계획은 단순했다. 어떤 저자의 책도 한 권 이상은 읽지 않는다. 이미 읽은 책은 읽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옛날 책을 읽는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는 안 되겠지만 톨스토이의 최후작인 『인연』은 읽을 수 있다. (p.43~44)

 

   하지만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이가 아플 수도 있고, 꼭 참석해야만 하는 집안 행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무려 네 아이의 엄마입니다. 비록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은 없다고 하더라도, 네 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누군가의 딸로서 그녀가 해야 하는 일들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 도전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네 아이들은 그녀의 도전을 응원하고, 그녀가 잘 해낼 수 있도록 그녀의 일을 분담하고 도와 줍니다.

 

   "난 운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매일 책 한권씩 읽고 있어. 너희들이 내가 그걸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지. 무라카미 하루키도 나만큼 도움을 받지는 못했을 거라고 장담해. 가족이란 게 바로 그런 거지. 서로를 돕는 거." (p.224)

 

   그녀는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책 선정에도 신중을 기합니다. 한 시간에 70쪽 정도를 읽는 그녀는 대략 250에서 300쪽짜리 책을 선택합니다. 그녀의 도전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책 추천을 할 때면 곤란해 합니다. 독서란 지극히 사적인 취향이 반영되기 때문에 지인들이 추천하거나 선물한 책이 그녀와 맞지 않을 확률도 많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일 서평을 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거나 매우 재미있게 읽은 책들의 서평은 더더욱 힘듭니다. 그때의 그 감정과 재미를 글로 옮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니나 상코비치 또한 이런 고민에 빠집니다.

 

   책들을 검색하면서 제목이 좋은 책은 뭐든 골라내는 것은 여전하지만, 두께가 1인치 이하인 책만 골라낸다는 점에서 조금은 달라졌다. 보통 크기(세로 9에서 10인치)에 두께가 1인치인 책이라면 대략 250에서 300쪽짜리이다. 나는 한 시간에 70쪽 정도 읽으므로 300쪽짜리 책은 네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서평을 쓰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하지만 서평을 시작한 지 며칠도 안 되어 서평을 쓰는 데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다섯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 책이 내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 책이 뜻하는 바를 컴퓨터 화면에서 말로 옮기기가 얼마나 쉬운 책인지에 따라 달랐다. 평균 두 시간을 예상했는데, 실제로도 그 정도의 시간이 들었다. (p.67)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사람들이 흔히 겪곤 하는 일들을 그녀 역시 겪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살고 있지만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가 읽었던 책들 가운데 상당 부분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는 있지만, 아직 한국에는 없는 책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책들이 더 많았더라면, '혼자 책 읽는 시간'을 더 즐겁게 즐길 수 있었을텐데요.

 

   독서는 나의 상실과 혼란이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두렵고 피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세계의 다른 사람들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살아간다. 공포와 혼란감, 고독과 슬픔의 부담을 나누어 짐으로써 나는 내 부담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부담은 이미 덜어지고 있다. 나의 욕망은 다시 파종되고 나의 필요는 다시 심어진다. 나는 들장미 가시와 잡초가 돋아나지 않는 정원에 있고, 혼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잡초를 뽑고 태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모두가 있다. (p.190~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라는 제목이 너무 좋았고,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장례와도 잘 맞는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을 춤으로 표현해 보세요!

   수많은 작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작가들의 책, 『그리스인 조르바』. 그들을 매료시킨 '조르바'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작가들의 극찬 덕분에 '조르바'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려고 여러 번 읽기를 시도해 봤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을 매료시킨 조르바의 '엄청난' 매력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빨간책방》을 통해서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김중혁 작가의 솔직한 소감에 더 공감이 갑니다. 어쩌면 작가들의 '극찬'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찬'을 보지 않았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기대'란 대부분 예상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 '나'는 사랑하는 친구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남습니다. 전쟁터로 떠나면서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얼마나 더 있겠다는 것인가? 왜 나와 함께 가지 않나? 저 멀리 카프카스에, 위험에 처한 수천만 동포가 있는데? 함께 가서 구해 주자…… 구해 주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그럼 구해야지. 자네는 설교에만 소질이 있는 건가. 왜 나랑 같이 가지 않는 건가? (……) Au revoir(안녕), 이 책벌레야!" (p.10)

 

   '나'는 사랑하는 친구를 홀로 떠나보내는 것이 슬펐지만, 친구와 함께 떠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의 그 말이 '나'의 내부에 조용한 혁명(p.14)을 일으킨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인생에 책 부스러기를 동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쯤 전에 내가 바라던 기회가 왔다. 내게는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빌려 둔 게 있었다. 나는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기나 한 듯이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p.14~15)

 

   크레타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나' 앞에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 하나가 나타나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나'는 그의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 뱃사람 신드바드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고, 세상 돌아다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 가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조르바'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책 속에 모든 것이 있는줄 알았고, 책 외에는 즐길 수 있는게 없었고, 행동할 줄도 몰랐던 '나'와 달리 '조르바'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말투와 행동은 거칠고, 머리 속에는 온통 여자와 '그것' 생각 뿐이지만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을 즐기며 삽니다. 밥을 먹을 땐 오로지 음식과 먹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며, 일을 할 때는 또 그 일에만 집중합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Carpe Diem'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인물인거죠.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p.391)

 

   조르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고 싶으면 펄쩍 뛰어 일어나 춤을 춥니다. 엄청나게 행복할 때도, 반대로 불행이 휘몰아칠 때도 그 감정들을 춤으로 표현합니다. '나'처럼 무언가에 얽매여 있고,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에,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 그때의 감정들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 조르바가 행복에 겨워 '나'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했을 때 '나'는 싫다고 거절합니다.

 

   "춤추시겠소? 춤춥시다!" 그가 내게 졸랐다.

   "싫습니다."

   "싫다고요?"

   그는 어리둥절해진 채 두 팔을 양옆으로 툭 떨구어 대롱거리게 했다.

   "좋습니다."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그럼 나 혼자 추겠소, 두목.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시오. 받아 버리지 않게 말이오."

   그는 펄쩍 뛰어 오두막을 뛰쳐나가 신발과 코트와 조끼를 벗고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엔 갈탄이 시커멓게 묻어 있었다. 눈의 흰자위는 번쩍거렸다.

   이윽고 그는 춤에다 몸을 맡기고, 손뼉을 치는가 하면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밭끝으로 도는가 하면 무릎을 꿇었다 다리를 구부리고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흡사 고무로 만든 사람 같았다. 그는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늙은 육신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던져 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오래는 공중에 머물 수 없어서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의 몸은 몹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몸은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 뛰어올랐지만 그의 불쌍한 육신은 쉴 새 없이 다시 땅에 떨어졌다. (p.104~105)

 

   하지만 갈탄광 사업이 거덜 난 이후 조르바와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조르바와 함께한 몇 달 동안 비로소 '나'도 자유롭다는게 뭔지 알게 됐나 봅니다.

 

   "조르바! 이리 와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처음엔 제임베키코를 가르쳐 드리지. 이건 아주 거친 군대식 춤이지요. 게릴라 노릇 할 때, 출전하기 전에는 늘 이 춤을 추곤 했지요."

   그는 구두와 자주색 양말을 벗었다. 셔츠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더운지 그것마저 벗어부쳤다. 그러고는 나를 끌어당겼다.

   "두목, 내 발 잘 봐요. 잘 봐요!"

   그는 발을 내뻗으며 발가락만으로 땅을 살짝 건드리더니 그다음 발을 세웠다. 두 발이 맹렬하게 헝클어지자 땅바닥에서는 북소리가 났다.

   그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해봐요! 자, 같이!"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나는 차츰 대담해졌다.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브라보! 아주 잘하시는데!" 조르바는 박자를 맞추느라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 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p.415~416)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p.417)

 

   하지만 조르바는 말합니다. 아직 '나'는 자신처럼 자유로워지지 않았다고 말이죠.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428~429)

 

   조르바와 헤어진 '나'는 여전히 여행을 하며 책에 파묻혀 삽니다. 조르바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고, 가끔씩 '나'에게 안부를 전해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5년쯤 지났을 때, '나'는 조르바에 대한 연대기를 쓰기시작하고 그 연대기가 완성되었을 때 조르바의 죽음을 전하는 편지 한 통을 받게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60세 때 완성한 『그리스인 조르바』는 34세 때의 카잔차키스와 함께 보낸 실존 인물을 토대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는 살면서 네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 입니다. 그가 평생 무엇을 갈구하고 중요시했는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p.464)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를 갈구합니다. 조르바처럼 완전하게 자유를 누리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르바의 이야기처럼, 저마다 '자유'를 갈구하기는 하지만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줄의 길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줄의 길이만큼 누릴 수 있는 '자유'마저도 누리지 못한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차마 끊어버리지는 못하더라도, 누릴 수 있을만큼은 누리고 '오늘'을 즐기며 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수많은 작가들을 매료시킨 『그리스인 조르바』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많은 작가들 혹은 책 읽는 사람들이 '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p.98)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두목, 나는 최악의 인간도 최선의 인간도 아니오. 중간쯤에 들겠지요. 나는 내가 먹는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 과히 나쁠 것도 없겠지요!" (p.99~100)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p.119)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요? (p.222)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p.389~390)

 

   "그래요, 조르바. 당신 덕택이에요. 나도 당신 방법을 채용해 볼까 합니다. 당신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 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