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작가의 치밀함에 욕이 나올 뻔한 이야기! 예감은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줄리언 반스의 말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진 않았지만 ─ 그러지 않으려고 정말 정성들여 읽었습니다  ─  그 순간 욕이 튀어 나올 뻔 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전혀요. 예감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속된 말로 우리는 제목에 낚인 겁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국 문학의 제왕이라 불리는 줄리언 반스의 장편소설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2011년 맨부커 상을 수상합니다. 원문으로는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소설의 분량을 두고 당시 약간의 말이 오갔지만, 반스는 이렇게 반격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독자들이 나에게 책을 다 읽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고 말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이 삼백 페이지짜리라고 생각한다.'(p.261)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1960년대에 함께 고등학교를 다닌 네 친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 토니 웹스터, 그의 패거리인 앨릭스와 콜린, 그리고 총기 넘치는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당시 그들이 다녔던 학교에는 자살한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친구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하지만 유서도, 일기도, 그 어떤 기록도 없었기 때문에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대학생이 된 그들은 각각 대학교로 진학했는데, 당연히 총기 넘쳤던 에이드리언 핀은 명문대에 입학합니다. 친구들은 서로 에이드리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즈음 토니는 베로니카를 만나 사귀게 되고, 여자친구의 집까지 방문하게 됩니다. 베로니카가 아버지, 오빠와 함께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고 토니 혼자 남게 되자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토니에게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p.54)라고 합니다. 보통의 어머니가 딸의 남자친구에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러고나서 베로니카는 토니의 친구들도 만나게 되지만, 둘은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얼마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베로니카와 데이트를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토니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왜 하필 그의 친구여야만 하는 걸까요? 몇 주 후 그는 에이드리언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와 베로니카가 공동으로 느낄 윤리적 가책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또 나는 베로니카가 오래전에 받은 괴로운 상처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에게 신중할 것을 권했다. 그런 다음 그에게 행운을 빌었고, 그의 편지를 텅 빈 벽난로 속 쇠살대에 넣고 태운 후(신파조라고?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청춘이었음을 참작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그 두 사람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내치기로 결심했다. (p.78)


   그 이후로 에이드리언과의 연락을 끊었던 토니는 한참 후에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에이드리언은 그 옛날 친구와는 달리, 자신이 왜 죽으려고 하는지 편지를 남겼지만 실제로 그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했는지는 더이상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을 공표해줄 것을 부탁했고, 검시관은 그의 말대로 했다. (p.88)


   그 사건으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나고, 토니는 이제 60대 노인이 됐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던 토니는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를 받습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그에게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500파운드는 당장 지급될 수 있지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그녀의 딸인 베로니카가 거부하고 있어서 당장은 집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그에게 500파운드를 남겼고, 또 어떻게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토니는 의문을 풀기 위해 베로니카를 만나지만, 베로니카는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은채 그 옛날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 한 장만을 보여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앞서 토니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토니는 정말 격정적으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 속에는 베로니카를 향한 온갖 저주와 경멸이 담겨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옛날 친구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듯이 에이드리언에게도 베로니카를 임신시켜 보라고 했습니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 ─ 올더스 헉슬리 (p.263)


   이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는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토니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열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맨 첫 페이지에 등장했던 문장처럼,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p.11)이니까요.

   토니가 편지를 받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자 베로니카는 또다른 힌트를 던져 줍니다. 하지만 토니는 그것이 힌트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토니의 기억과 시선을 따라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독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떤 것에 대한 힌트일까요?

   모든 비밀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밝혀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감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닙니다. 예감은 한번도 맞았던 적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독자는 줄리언 반스의 치밀함에 무릎을 치며 욕을 하게 됩니다. 줄리언 반스는 이 장면의 반전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토독 치밀하게 이야기를 짜놓았던 것입니다. 그 말 많던 부커상 심사위원들이 한마디의 이견도 없이 이 소설을 만장일치로 선정해 버린 이유를 알겠습니다.

   작가가 이토록 치밀하게 이야기를 짜놓은 것처럼 독자 또한 치밀하게 읽지 않으면, 작가의 말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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