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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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NS에는 올릴 수 없는 소소한 사연들, 『방구석 라디오』에서 들려줍니다!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가을입니다. 땅도, 피부도 메말라 갈라지는 가을입니다. 더불어 마음까지 계절을 타는 이 가을은,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감성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줄 에세이를 읽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기 감성에 젖어들거나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에세이는 별로입니다. 내 눈은 그렇게 촉촉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까요.


   제목에서부터 물씬 친근함이 느껴지는 『방구석 라디오』는 '모자'라는 필명은 가진 30대의 '평범한' 직장인이 쓴 에세이 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명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 가 봅니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소개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필명으로 이런 에세이를 펴낼리 없을테니까요.

   아무튼 제목과 필명에서 오는 친근함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조금 '모자란' 이야기들이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옵니다. 거창하게 여행을 떠나거나 무언가를 이뤄낸 일이 아닌 매일의 소소한 일상들이 담겨 있습니다. 너무 소소해서 SNS에 조차 올릴 수 없었던 일상의 기록들, 그 이야기들이 『방구석 라디오』에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런 에세이들은 으레 '세상을 아름답게 본' 에피소드들을 담아내며 자신의 '선한 시선'을 자랑하곤 하는데 이 에세이에는 그 반대의 에피소드도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박수를 쳤던 「눈을 감아」를 소개합니다.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은 '과연 누가 노약자인가' '어떤 기준으로 노약자와 일반인을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다음 중 노약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쉽게 지치는 어린이들,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 과외에 치이는 청소년들,

   취업난을 이겨내고자 스펙 쌓기에 아르바이트까지 더하는 청춘들,

   새벽같이 일어나 야근에 회식까지, 몸을 불태운 직장인들,

   회사에서 눈치 보고 집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중년들,

   젊은이들 위주의 시스템에서 하루하루 눈칫밥 먹는 노인들,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힘겹게 지하철에 오른 장애인들,

   사람들이 기피하는 걸 알면서도 물건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간신히 귀갓길에 오른 너와 나와 우리들.

   우리 중 누가 가장 약자일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까. 지하철을 타고 하루를 견디는, 우리 모두 약한 사람들 아닐까.

   힘들었던 오늘 하루, 지하철에서만이라도 편히 쉬고 싶다면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아보는 건 어떨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잠시 미뤄두고 말이다. (40쪽)


   그리고 오랫동안 블로그를 통해 글을 써온 분들이라면 분명 이런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칭찬 대신 반성을 해야 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과거에 자기가 쓴 글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그땐 내가 어렸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본인이 얼마나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는가의 척도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과거의 글을 보면서 '예전엔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했지'라고 감탄한다면, 틀림없이 글을 쓴 이후의 삶에서 별로 나아진 부분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글을 남긴 이후 끊임없이 도전을 계속해 지적 성장을 이루어온 사람만이 과거의 글을 보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까.

   때로는 내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과거 속에 나 자신의 내면적 성장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42쪽)


   『방구석 라디오』는 흔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로, 무언가를 자랑하거나 독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뿐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입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SNS의 페이지를 하나씩 내리다 보면, 나의 지인 또는 지인의 지인들의 특별한 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여행, 맛집에서 먹은 특별한 음식, 신나게 데이트하는 커플 사진 등을 내 생활과 비교하면서 울적해지거나 떠나고 싶어지기도 한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일상이 모여 SNS를 가득 채우는 건데, 나도 모르게 그들의 특별함을 일상이라고 믿게 된다.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올린 것들인데...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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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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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당장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세요!

   세계에서 가장 큰 가구 브랜드 이케아가 한국 상륙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 속으로 진출했습니다.

   마른 체형의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머리에 큼지막한 터번을 둘렀긴 하지만 그래도 돈 많은 인도 사업가처럼 보이는 '아자타샤트루 라바슈 파텔'은 이케아 못침대를 사기 위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이케아로 향합니다. 비록 인도에는 아직 이케아 매장이 없긴 하지만, 파텔은 어떤 사연으로 침대 하나를 사기 위해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8시간 15분 동안 비행기를 타야 올 수 있는 파리까지 오게 된 걸까요?


   인도에서 온 '파텔'은 고행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칼 삼키기, 유리 조각 삼키기, 양팔에 바늘 꽂기 등의 '주술적 능력'을 선보여 유명해 졌는데 이제 못이 1만 5천 개나 박힌 못 침대에서 자는 '기술'을 선보이려고 합니다. 그가 이케아 최신 못 침대를 살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줬고, '파텔'은 그 돈으로 인도에서 가장 저렴하게 갈 수 있는 파리 이케아 매장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최신 이케아 못 침대는 99유로 99상팀인데, 그에게는 반만 인쇄된 100유로 지폐 한 장 밖에 없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 대신 시내를 빙빙 돌아야 도착할 수 있는 이케아 매장까지 태워준 택시 기사 귀스타브에게 100유로 지폐 한 장을 건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 한눈 팔도록 만든 다음 다시 100유로 지폐를 자신의 손으로 가져옵니다.


   그렇게 이케아 매장에 도착한 파텔은 그가 사려고 했던 못 침대가 세일 기간이 끝나 판매가가 99유로 99상팀이 아닌 115유로 89상팀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주문하면 내일 매장에서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의 '주술적 능력'이 또 힘을 발휘합니다. 그는 이케아 매장에서 일부러 한 여자에게 부딪히며 처음부터 조각나 있던 선글라스 파손에 대한 보상비에 미안함의 대가로 밥까지 얻어 먹게 됩니다. 덕분에 못 침대를 살 수 있게 된 파텔은 호텔 대신 아무도 없는 이케아 매장에 몰래 숨어들어 하룻밤을 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이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불 꺼진 매장으로 이케아 직원들이 다시 돌아와 가구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하더니, 파텔이 숨어든 이케아 옷장은 다시 조립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통째로 포장해 화물차에 실어 영국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파텔의 여행은, 영국-스페인-이탈리아-리비아를 거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끝이 납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던 저는 유랑 사기꾼 행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속였습니다. 고향 사람이든 관광객이든 구별할 것 없이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속였죠. 최근에만 해도 난 주위 사람들에게 이케아 최신 못 침대를 반드시 사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지 뭡니까. 아마 황금 양털을 찾으러 떠난다고 했어도 믿었을 거예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주었죠. 물론 전 못 침대에서 자진 않습니다. 거실 옷장 속에 푹신한 침대를 숨겨두었었죠. 그때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는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걸 제공하기 위해 어디까지 속아줄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을 전체가 나를 위해 빚을 내 돈을 모아주었죠. 당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준 것과 마찬가지요. 다만 나의 경우 속임수였다는 게 다르지만요. 지독히도 이기주의자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은 자신들도 배불리 먹지 못하면서 나를 위해 기꺼이 돈을 내주었으니까요. 날 도와주겠다는 마음, 반신인 나를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제가 이번 여행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전 이제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제일 먼저 당신의 이야기가 날 감동시켰어요. 그 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마리의 사랑, 이 이야기는 곧 들려드리겠습니다. 소피 모르소와의 우정, 이 이야기도 물론이요. 마지막으로 이 가방 안에 들어 있는 8만 5천 유로." (243~244쪽)


   프랑스에서 시작된, 파텔의 예상치 않은 여행은 사기와 눈속임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던 파텔에게 새로운 시작과 꿈을 심어 줍니다. 그는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 생전 처음 봤지만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줬던 사람들을 통해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막히게 운이 좋았던 9일 동안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합니다.


   파텔은 가만 생각해 보니 여행 내내 자신에게 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흐레 동안 놀라운 여행을 했다. 그에게 이 세상엔 다른 것들이 존재하며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음을 가르쳐 준 내면 여행. (260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똑같은 일들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반복되는 일들에 길들여지고 굳어지게 됩니다. 여행은 그 반대입니다. 낯선 길을 걷고, 한번도 본 적 없는 혹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에는 엄두도 못냈던 일을 경험하곤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시야가 넓어지고 순발력이 생기며 또다른 일을 꿈꾸게 됩니다.


   아직 진정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비행기 표를 예약하세요. 파텔처럼 파리도 좋고, 로마도 좋아요. 가장 저렴한 비행기 표를 끊어도 상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를 '여행'이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2015. 07. 1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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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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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말하는대로' 소원을 들어줬을뿐! 그러니 소원 함부로 말하지마라!

   우리는 가끔 이런 상상들을 합니다. 내 키가 5cm만 더 컸더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내 얼굴이 조금만 더 예뻤더라면, 나에게 글 쓰는 재능이 있었더라면, 하고 말이죠.​ 이런 작은(!) 소망들만 이루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여기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작은 악마가 있습니다. '아자젤'이라는 이름의 이 작은 악마는 뿔에서부터 꼬리 끝까지 겨우 2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셔츠 주머니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우리의 작은(!) 소망들은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대로, 그리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말이죠.


   "아, 아자젤은 ─ 아자젤이 그 악마 이름입니다 ─ 상냥합니다. 제 생각에는, 원래 사는 곳에서 좀 무시를 당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기 힘을 이용해 저에게 인정받으려고 좀 심하게 안달을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를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해 그 힘을 쓰지는 않으려고 하더군요.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을 생각해 보면 그래야 마땅한데 말이지요. 아자젤 말로는, 자기 힘은 반드시 다른 이들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는 데에만 쓰여야 한답니다." (「2센티미터짜리 악마」, 20~21쪽)


   이 작은 악마를 불러낸 것은 화자의 친구 조지입니다. 작가인 화자 ─ 어쩌면 아이작 아시모프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는 자신의 글감을 찾기 위해 만날 때마다 자신을 무시하고 돈 한 푼 쓸 줄 모르며, 심지어 돈까지 빌려가는 조지의 이야기를 기꺼이 청해 듣습니다. 다소 황당하기는 하지만 조지의 작은 악마 이야기가 그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악마를 불러내는 법이 적힌 스벤의 책을 찾아냈거든요. 저는 한때 우리 가문 소유였던, 지금은 폐허가 된 영국의 낡은 성에서 그 책을 찾아냈습니다. 그 책에는 정확한 관목의 종류, 관목을 태우는 방법, 시간을 조절하는 방법, 힘의 원천의 이름들, 주문을 외우는 어조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고대의 영어, 그러니까 앵글로색슨어로 적혀 있었지만 마침 제가 언어학자인 덕분에 ……." (「2센티미터짜리 악마」, 18~19쪽)


   조지, 아자젤 2인조가 펼치는 활약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조지에게는 성격이 급한 '모르데카이 심스'라는 작가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방금 전에 출발해서 평소보다 더 기다려야 할 때, 건강검진을 받으려고 예약을 했는데 예약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때, 은행 창구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때마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뭔가를 기다리는 시간만 줄어들어도 자신이 쓰는 원고의 양이 10에서 20퍼센트쯤 늘어날거라고 생각합니다. 원고의 양이 늘어나면 당연히 그의 수입도 늘어날테고, 조지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하는 날도 많아지겠죠? 그래서 조지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작은 악마 '아자젤'을 불러냅니다.

   아자젤은 조지의 친구를 도와주려면 확률의 법칙에 간섭해야 하며,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친구의 삶이 질서 정연해지는 대신 다른 것들은 조금 무질서해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게 되는 시기가 예정보다 250만 년이나 더 빨리 찾아온다고 하지만, 어차피 조지는 그때까지 살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아자젤에게 친구를 도와줄 것을 청합니다.


   "은행에 들어갔는데 줄이 없는 빈 창구가 있었고, 직원은 생글거리며 웃고 있더라고. 우체국에 갔을 때도 줄이 없는 빈 창구가 있었고, ─ 뭐, 자네 설마 우체국 직원이 생글거릴거라고 기대하지는 않겠지 ─ 그 직원은 거의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내 편지를 등기로 부쳐 줬어. 내가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 즉시 버스가 도착했고, 어제 러시아워에는 내가 손을 채 다 들기도 전에 택시가 방향을 바꾸더니 내 앞에서 멈추더라고. 게다가 체커 캡이었어. 그리고 5번지와 49번가로 가자고 하니까 운전사는 시내 거리 구석구서을 잘 안다는 티를 팍팍 내며 그곳까지 나를 데려다 줬어. 심지어 그 운전사는 영어로 말하기까지 했다니까." (「글 쓸 시간」, 156쪽)


   며칠 후 조지를 다시 만난 모르데카이는 조지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전혀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원하는대로 이뤄졌는데, 그는 왜 글을 못 쓰게 된 것일까요?


   "나는 전혀 글을 쓸 수 없어."

   "대체 왜 못 쓴다는 거야?"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거든."

   "뭐가 없어져?" 제가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 줄을 서거나 모퉁이에 서 있거나 관공서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생각을 했었어. 뭐를 쓸지 구상했었다고. 그 시간은 내게 가장 중요한 준비 시간이었단 말이야."

   "난 그런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지." (「글 쓸 시간」, 162~163쪽)


   하지만 아자젤은 한번 소원을 들어주면 절대 그 소원을 철회해 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를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했던 조지의 속셈은 완전히 틀어지게 됐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조지는 '엘더베리'라는 돈 많은 조각가의 대부입니다. 엘더베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도 많았고, 자신의 작품을 팔아 번 돈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조지는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 때문에 남자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피그말리온'처럼 말이죠.


   "고대의 이야기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을 말한 거란다. 피그말리온은 너처럼 조각가였어. 차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남자였지. 그리고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었어. 남자로서 그 사람의 편견 때문에 여자를 조각한 게 다르지만 말이야. 피그말리온은 그 여자 조각품을 갈라테아라 불렀단다. 그 조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피그말리온은 그것과 사랑에 빠졌지. ……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기도를 했고, 아프로디테는 그 진심 어린 기도에 탄복해 조각에게 생명을 주었지. 갈라테아는 살아 있는 여자가 되었고 피그말리온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단다." (「갈라테아」, 313~314쪽)


   조지의 이야기를 들은 엘더베리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 '행크'에게 누군가 생명을 줄 수만 있다면,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백만 달러를 줄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지는 아자젤을 불러 엘더베리의 소원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주문합니다.


   "넌 단지 차가운 걸 따뜻하게, 돌을 살을, 단단함을 부드러움으로 바꾸기만 하면 돼. 부드러움이 특히 중요해. 내가 보기에 엘더베리는 조각을 껴안고, 자기 손끝으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살결을 느끼고 싶어 하니까. 너무 단단하면 안 돼. 그 조각은 인간을 완벽하게 닮아 있으니 넌 그냥 그 안을 근육, 혈관, 장기, 신경으로 채우고, 겉을 피부로 덮기만 하면 된다고." (「갈라테아」, 317쪽)


   엘더베리의 소망대로 행크는 진짜 사람이 되었고, 조지 후 며칠 후 백만 달러를 받기 위해 엘더베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엘더베리는 "행크가 부드러워지길 원한다고 말한 건 모든 곳이 영원히 부드러워지길 바란다는 뜻이 아니었다"며 오히려 조지에게 화를 냅니다.


   "조지,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설마 자네가 그 친구를 돕겠다는 생각에 아자젤과 합심하여 엉뚱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 친구를 비참함과 절망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내용인 건가?" (「논리학에 따르면」,196쪽)


   조지와 아자젤은 늘 이런 식으로 소원을 들어줍니다. 상대가 말하는대로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 결과는 항상 친구들을 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밀어 넣습니다. 물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섣부르게 조지에게 소망을 말한 친구들에게도 잘못이 있긴 합니다.


   『아자젤』에는 조지, 아자젤 2인조가 활약한 에피소드 18편이 담겨 있습니다. 18편이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도 없지 않지만, 친구들의 작은 소망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궁금해서 다음 이야기를 또다시 펼쳐보게 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머릿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단편들은 웃기게 풍자할 생각으로 쓰였으며, 만약 글의 성격이 너무 과하고 아시모프답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건 내가 일부러 그렇게 썼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걸 경고라고 생각하시길. 뭔가 다른 걸 원한다면 이 책을 사지 말라. 괜히 샀다가는 짜증만 날 테니까."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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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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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책을 잡기 시작하면 놓칠 수가 없습니다. 캄캄한 밤, 온 몸에 소름이 돋아도... 포기하지 않게 읽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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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2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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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니기에 매력적인 '네모 선장'!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소설가 김영하는 누군가 어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의 어려움을 에세이 『말하다』에서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니 이런 느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특정한 어떤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합니다. 때로는 이런 작가를 사랑했으나 곧 다른 작가에게 빠져듭니다. 프랑스 소설을 막 읽다가 일본 소설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소설은 안 읽고 역사서만 읽기도 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영화 대사도 있지만 변해야 사랑입니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평생 한 작가 혹은 특정 작품만 줄창 읽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김영하의 『말하다』, 179쪽)


   그렇습니다. 이것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비록 좋아하는 책은 상황따라 달라져서 추천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책 속 캐릭터는 있어서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캐릭터는 바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 입니다. '네모 선장'은 몇 번을 만나도 그 매력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 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원작으로 유명한 『해저 2만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고래 때문에 사고가 빈번하자 이 괴물 고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출항한 미국 군함에 프랑스 박물학자 아로낙스 박사 일행이 합류하면서 시작됩니다. 배가 출항하고 몇 달이 지나도 괴물 고래를 만날 수 없었던 군함이 기수를 돌리려하는 순간 괴물 고래가 나타나고 고래와의 싸움 도중 바다에 빠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네모 선장을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목숨을 건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이내 거대한 고래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엄청나게 큰 고래라고 생각했던 괴물의 정체는 바로 네모 선장이 이끌고 있는 잠수함 '노틸러스 호'였습니다. '노틸러스 호'는 순전히 전기로 움직이고 빛을 발산했는데, 『해저 2만리』가 발표됐던 1869년은 아직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기로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엄청난 과학 기술의 집약을 보여줬던 '노틸러스 호'는 오직 쥘 베른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산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에 '노틸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를 모델로 만든 것이라서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소설 속 '노틸러스 호'를 만든 네모 선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네모 선장이 잠수함에 '노틸러스' 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베른의 은밀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노틸러스'는 ─ 콩세유의 말투를 흉내내면 ─ 두족강ㆍ앵무조개과ㆍ앵무조개속에 딸린 조개 이름이다. 지상과 인연을 끊고 잠수함이라는 조가비 속에 틀어박힌 네모 선장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덧붙여 말하면, 네모 선장의 'N이라는 금글씨가 박힌 검은 깃발'은 본래 해적 깃발을 뜻하지만,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상징이기도 다. (「해설」, 410쪽)


   '네모 선장'의 이름은 라틴어로 '아무도 아니다(Nemo)'라는 뜻으로, 그는 아로낙스 박사 일행에게 자기 자신을 "불운한 사정 때문에 인간 사회와 인연을 끊은 사람"(118쪽)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지만 그의 국적이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모두 꽁꽁 감춰뒀기 때문에 아로낙스 박사는 그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 합니다. 그는 다만 어떤 이유로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고 버림 받아 복수를 꿈꾸는 과학자 혹은 귀족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네모 선장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더욱 매력을 발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신비의 섬』에서 늙은 네모 선장을 통해 그의 정체가 밝혀진다고 합니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분들은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지만, 사실 저는 『신비의 섬』을 읽은 적도, 읽을 계획도 없습니다. 정체가 밝혀지고 나면 '아무도 아닌' 네모 선장의 매력이 반감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쥘 베른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를 통해 엄청난 과학 기술의 산물들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쥘 베른의 상상 속 그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것들을 누리고 살지만, 이제 막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던 19세기에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또다른 '경이'를 보여줍니다. 아직 에디슨도 전구를 발명하지 못했던 때에 오직 전기로만 움직이고 빛을 발하는 잠수함으로 바다 끝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해저 2만리』의 화자 아로낙스 박스는 처음 '노틸러스 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의 일행들이 '노틸러스 호'를 탈출하자고 했을 때도 경이로움과 궁금증 때문에 탈출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모 선장이 '노틸러스 호'로 전함을 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거대한 선체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며 네모 선장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쥘 베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또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이나 부작용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노틸러스' 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멜스트롬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을까? 네모 선장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는 아직도 바다 속에서 무서운 복수를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대학살로 복수를 끝냈을까? 그의 생애가 담긴 원고는 언젠가 파도에 실려 어딘가로 흘러갈까? 나는 결국 선장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수 있을까? 가라앉은 전함의 국적이 네모 선장의 국적을 알려줄까?

   그러기를 바란다. 네모 선장의 놀라운 배가 가장 무서운 바다를 이겨내고, 그렇게 많은 배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서 살아남았기를 바란다. '노틸러스' 호가 살아남았다면, 네모 선장이 스스로 조국으로 택한 바다에 아직 살고 있다면, 그 거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바다의 수많은 경이를 보고 복수심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입법자 노릇을 그만두고, 과학자로서 평화로운 해저 탐험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의 운명은 야릇하지만 숭고하기도 하다.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나는 열 달 동안이나 그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성서가 6천 년 전에 제기한, "너는 바다 속 깊은 곳을 거닐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두 사람, 네모 선장과 나뿐이다. (2권, 385~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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