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라디오
모자 지음, 민효인 그림 / 첫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SNS에는 올릴 수 없는 소소한 사연들, 『방구석 라디오』에서 들려줍니다!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가을입니다. 땅도, 피부도 메말라 갈라지는 가을입니다. 더불어 마음까지 계절을 타는 이 가을은,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감성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줄 에세이를 읽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기 감성에 젖어들거나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에세이는 별로입니다. 내 눈은 그렇게 촉촉하지도, 선하지도 않으니까요.


   제목에서부터 물씬 친근함이 느껴지는 『방구석 라디오』는 '모자'라는 필명은 가진 30대의 '평범한' 직장인이 쓴 에세이 입니다. 그는 자신의 필명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 가 봅니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소개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필명으로 이런 에세이를 펴낼리 없을테니까요.

   아무튼 제목과 필명에서 오는 친근함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조금 '모자란' 이야기들이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옵니다. 거창하게 여행을 떠나거나 무언가를 이뤄낸 일이 아닌 매일의 소소한 일상들이 담겨 있습니다. 너무 소소해서 SNS에 조차 올릴 수 없었던 일상의 기록들, 그 이야기들이 『방구석 라디오』에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런 에세이들은 으레 '세상을 아름답게 본' 에피소드들을 담아내며 자신의 '선한 시선'을 자랑하곤 하는데 이 에세이에는 그 반대의 에피소드도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박수를 쳤던 「눈을 감아」를 소개합니다.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은 '과연 누가 노약자인가' '어떤 기준으로 노약자와 일반인을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다음 중 노약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쉽게 지치는 어린이들,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 과외에 치이는 청소년들,

   취업난을 이겨내고자 스펙 쌓기에 아르바이트까지 더하는 청춘들,

   새벽같이 일어나 야근에 회식까지, 몸을 불태운 직장인들,

   회사에서 눈치 보고 집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중년들,

   젊은이들 위주의 시스템에서 하루하루 눈칫밥 먹는 노인들,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힘겹게 지하철에 오른 장애인들,

   사람들이 기피하는 걸 알면서도 물건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간신히 귀갓길에 오른 너와 나와 우리들.

   우리 중 누가 가장 약자일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까. 지하철을 타고 하루를 견디는, 우리 모두 약한 사람들 아닐까.

   힘들었던 오늘 하루, 지하철에서만이라도 편히 쉬고 싶다면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아보는 건 어떨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잠시 미뤄두고 말이다. (40쪽)


   그리고 오랫동안 블로그를 통해 글을 써온 분들이라면 분명 이런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참 기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칭찬 대신 반성을 해야 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과거에 자기가 쓴 글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그땐 내가 어렸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본인이 얼마나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는가의 척도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과거의 글을 보면서 '예전엔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했지'라고 감탄한다면, 틀림없이 글을 쓴 이후의 삶에서 별로 나아진 부분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글을 남긴 이후 끊임없이 도전을 계속해 지적 성장을 이루어온 사람만이 과거의 글을 보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을까.

   때로는 내가 부끄럽다고 느끼는 과거 속에 나 자신의 내면적 성장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42쪽)


   『방구석 라디오』는 흔한 일상을 담은 에세이로, 무언가를 자랑하거나 독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뿐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입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SNS의 페이지를 하나씩 내리다 보면, 나의 지인 또는 지인의 지인들의 특별한 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해외여행, 맛집에서 먹은 특별한 음식, 신나게 데이트하는 커플 사진 등을 내 생활과 비교하면서 울적해지거나 떠나고 싶어지기도 한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일상이 모여 SNS를 가득 채우는 건데, 나도 모르게 그들의 특별함을 일상이라고 믿게 된다.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올린 것들인데...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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