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2만리 2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도 아니기에 매력적인 '네모 선장'!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소설가 김영하는 누군가 어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의 어려움을 에세이 『말하다』에서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니 이런 느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특정한 어떤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합니다. 때로는 이런 작가를 사랑했으나 곧 다른 작가에게 빠져듭니다. 프랑스 소설을 막 읽다가 일본 소설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소설은 안 읽고 역사서만 읽기도 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영화 대사도 있지만 변해야 사랑입니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평생 한 작가 혹은 특정 작품만 줄창 읽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김영하의 『말하다』, 179쪽)


   그렇습니다. 이것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비록 좋아하는 책은 상황따라 달라져서 추천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책 속 캐릭터는 있어서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캐릭터는 바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 입니다. '네모 선장'은 몇 번을 만나도 그 매력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 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원작으로 유명한 『해저 2만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고래 때문에 사고가 빈번하자 이 괴물 고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출항한 미국 군함에 프랑스 박물학자 아로낙스 박사 일행이 합류하면서 시작됩니다. 배가 출항하고 몇 달이 지나도 괴물 고래를 만날 수 없었던 군함이 기수를 돌리려하는 순간 괴물 고래가 나타나고 고래와의 싸움 도중 바다에 빠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네모 선장을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목숨을 건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이내 거대한 고래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엄청나게 큰 고래라고 생각했던 괴물의 정체는 바로 네모 선장이 이끌고 있는 잠수함 '노틸러스 호'였습니다. '노틸러스 호'는 순전히 전기로 움직이고 빛을 발산했는데, 『해저 2만리』가 발표됐던 1869년은 아직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기로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엄청난 과학 기술의 집약을 보여줬던 '노틸러스 호'는 오직 쥘 베른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산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에 '노틸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를 모델로 만든 것이라서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소설 속 '노틸러스 호'를 만든 네모 선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네모 선장이 잠수함에 '노틸러스' 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베른의 은밀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노틸러스'는 ─ 콩세유의 말투를 흉내내면 ─ 두족강ㆍ앵무조개과ㆍ앵무조개속에 딸린 조개 이름이다. 지상과 인연을 끊고 잠수함이라는 조가비 속에 틀어박힌 네모 선장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덧붙여 말하면, 네모 선장의 'N이라는 금글씨가 박힌 검은 깃발'은 본래 해적 깃발을 뜻하지만,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상징이기도 다. (「해설」, 410쪽)


   '네모 선장'의 이름은 라틴어로 '아무도 아니다(Nemo)'라는 뜻으로, 그는 아로낙스 박사 일행에게 자기 자신을 "불운한 사정 때문에 인간 사회와 인연을 끊은 사람"(118쪽)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지만 그의 국적이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모두 꽁꽁 감춰뒀기 때문에 아로낙스 박사는 그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 합니다. 그는 다만 어떤 이유로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고 버림 받아 복수를 꿈꾸는 과학자 혹은 귀족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네모 선장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더욱 매력을 발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신비의 섬』에서 늙은 네모 선장을 통해 그의 정체가 밝혀진다고 합니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분들은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지만, 사실 저는 『신비의 섬』을 읽은 적도, 읽을 계획도 없습니다. 정체가 밝혀지고 나면 '아무도 아닌' 네모 선장의 매력이 반감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쥘 베른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를 통해 엄청난 과학 기술의 산물들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쥘 베른의 상상 속 그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것들을 누리고 살지만, 이제 막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던 19세기에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또다른 '경이'를 보여줍니다. 아직 에디슨도 전구를 발명하지 못했던 때에 오직 전기로만 움직이고 빛을 발하는 잠수함으로 바다 끝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해저 2만리』의 화자 아로낙스 박스는 처음 '노틸러스 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의 일행들이 '노틸러스 호'를 탈출하자고 했을 때도 경이로움과 궁금증 때문에 탈출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모 선장이 '노틸러스 호'로 전함을 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거대한 선체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며 네모 선장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쥘 베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또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이나 부작용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노틸러스' 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멜스트롬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을까? 네모 선장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는 아직도 바다 속에서 무서운 복수를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대학살로 복수를 끝냈을까? 그의 생애가 담긴 원고는 언젠가 파도에 실려 어딘가로 흘러갈까? 나는 결국 선장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수 있을까? 가라앉은 전함의 국적이 네모 선장의 국적을 알려줄까?

   그러기를 바란다. 네모 선장의 놀라운 배가 가장 무서운 바다를 이겨내고, 그렇게 많은 배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서 살아남았기를 바란다. '노틸러스' 호가 살아남았다면, 네모 선장이 스스로 조국으로 택한 바다에 아직 살고 있다면, 그 거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바다의 수많은 경이를 보고 복수심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입법자 노릇을 그만두고, 과학자로서 평화로운 해저 탐험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의 운명은 야릇하지만 숭고하기도 하다.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나는 열 달 동안이나 그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성서가 6천 년 전에 제기한, "너는 바다 속 깊은 곳을 거닐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두 사람, 네모 선장과 나뿐이다. (2권, 385~3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